[아래 글은 <월간 말> 2009년 6월호에 게재한 글인데 저와 게재한 <월간 말>측 모두 청년학생들의 현대사의 확실한 인식을 위하여 쓴 것입니다. 그리고 게재된 글은 표현이나 의도하는 바에서 이 글과는 다른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월간 말> 편집 측에서 제 원고를 그냥 쓰기가 사정 상 좀 꺼끄러운 점이 있어서 표현을 약간 고쳐 본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그 입장을 충분이 양해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독자도 저와 같은 뜻으로 생각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60년 현대사에서 미제는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이때까지 이남체제에 대한 신식민지적 경영(정치, 군사, 경제, 문화 사회의 모든 경영)의 주체자로서 그들의 예속정권을 통하여 지배・경영해왔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조국의 남부 정권은 미제의 신식민지적 본질이 더욱더 분명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교육은 이러한 우리의 신식민지적 현대사를 은폐하고 완전한 자주독립의 국가로 그 종주국으로서의 미제와 대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가 어려울 때는 언제나 도움을 주는 ‘언클 톰’의 나라로 인식되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미제는 우리 조국의 남부의 60년 현대사를 군사점령상태로 해서 역사의 구비마다 간섭하고 때로는 그들의 주구로 하여금 자주와 민주, 평화와 통일의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가로막아 나섰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남부 단독선거에 의한 이승만 정권의 창출을 비롯해서, 4.19청년학생의 봉기가 민주혁명으로 시동되고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운동으로 나아가자 박정희로 하여금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도록 해서 군사깡패들의 폭력으로 짓밟아버리게 했다.
그들이 내세운 이 박정희도 그의 부하인 김재규에 의해서 사살되었다고 하나 그 죽음의 의문은 안개에 가려져 있다. 아무튼 박정희의 제거는 정치, 군사, 경제에서 미제와 갈등을 빚는 고분고분하지 못한 예속정권에 대한 당연한 결말이기는 하지만 학살과 폭압의 원흉은 제거되었다. 그 후계자로서 전두환이 나서서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 일컫는 몇 달동안의 아주 조그마한 자유, 그 자유가 자주평화통일의 길로 틀림없이 구비 틀 것을 예상해서 광주학살로 짓밟도록 만든 장본인으로서의 미제의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전으로 조선에 북위 38도선 이남의 일본 식민지총독정권과 그 무력으로 조선군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하여 진주한 미군이 점령군으로 돌변하여 미제가 조국의 이남으로 들어온 것이다.
우리는 그 8.15일제해방의 역사적 사실과 우리민족으로서 그 의의를 올바르게 앎으로써 우리 현대사를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이남의 현대사는 미국에 의해 굴곡이 되었건, 가령 미국이 이남 땅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이 8.15민족해방으로부터 씌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도권 교육에서 현대사는 8.15해방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으로 일본식민지정권을 물리치고 약소민족인 우리 민족에게 베푼 것이라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과연 그런 것인가!
8.15민족해방의 의의
우리나라는 19세기 영․정조 시대부터 자본주의의 맹아가 트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의 봉건체제는 이 시대에 이르러 농민과 양반지주 사이의 모순이 격화되고, 농민도 도시빈민과 지주로 양극분화가 이루어졌으며 수공업의 규모가 커져 상업자본이 객주와 전주의 형태로 성장되고 있었다. 이 상업자본은 대규모의 수공업적 생산자본으로 성장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근대사상이 자생적으로 실학사상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미 근대화를 마치고 산업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선 서유럽 열강들이 동부 아시아에 그들의 식민지를 찾아 물밀 듯이 들어왔다. 인도, 베트남, 말레이지어, 중국, 일본으로 밀려들어와 그들 나라를 식민지로 또는 반식민지로 만들었고, 우리나라에는 대원군시대에 포화로 위협을 하고 침략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반항했지만, 1876년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해서 여러 열강들이 이 땅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들의 근대화가 이들 제국주의에 의해서 그 방향이 반식민지로 틀어지게 되었다. 좀 일찍이 근대화를 시작해서 서유럽식의 근대화를 본 딴 일본이 제국주의적 식민지 쟁탈에 동참하여 우리나라에 대한 서유럽의 제국주의의 이해관계를 받아 안고 지난 20세기초부터 나라의 주권을 강탈하여 우리나라를 그들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고 말았다.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무단정책으로 가장 악랄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우리나라는 자주적인 근대화의 길이 막혔고 일제에 의하여 봉건적 토지관계가 그대로 온존된 데다가 온갖 봉건적 유제마저 그대로 껴안고 있는 반봉건사회로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광복운동은 일제를 타도하여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쳐부숴 이 땅에서 몰아내고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에 심어진 일제의 모든 잔재를 청산하는 민족해방운동임과 동시에, 일제가 온존한 봉건적 토지제도와 그에 기반된 온갖 봉건적 유제를 타도하여 새로운 근대적 나라를 건설하는 민주주의운동으로서, 지난 시대의 봉건사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혁명운동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바로 민족해방민주주의운동으로서의 사회혁명인 것이다.
8.15전후의 민족해방투쟁
일제의 대륙침략은 41년 12월에 대평양전쟁으로 확대되고 이 전쟁으로 일제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1945년에 들어서자 일제는 멸망의 마지막 숨결을 모으는 듯 조선에는 그 지독한 유생, 무생의 역량수탈도 그 힘이 현저히 줄어들고 치안력마저 약해졌다. 곳곳에 철도폭파, 징용, 징병, 학병으로부터 그리고 수탈에 저항하다 도망한 자들이 속출하고, 평양의 일본군 연대에서는 대대적인 조선청년의 집단탈영이 이어졌다. 이는 일본의 마지막 모습을 잘 보여준다. 마침내 지리산에서도 이현상 선생이 징병, 학병 도망자, 수탈에 저항하다 도망한 청년들을 모아 무장대를 조직하고 있었고, 함양경찰서를 습격하여 불태우고 무장을 탈취하여 일제와 최후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선의 여러 산악지대에서는 연합군이 상륙하면 일본군의 배후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한 무장대의 준비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1930년대부터 백두산 밀림을 근거지로 하여 일제의 100만 관동군과 조선군 20만, 만주괴뢰군 40만을 상대로 백전백승의 유격전을 벌였던 김일성 장군의 조선인민혁명군이 조국해방의 최후결전을 위하여 백두산 밀영을 근거지로 해서 활동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의 대일선전포고에 앞서 8월 8일 새벽, 김일성 장군의 조선인민혁명군이 두만강가의 당시 웅기군 토리에 있는 일본군의 요새를 격파하여 국내침공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8월 9일 소련의 대일선전포고와 더불어 김일성 장군은 조선인민혁명군에게 항일무장투쟁의 최후공격을 명령했다. 이를 기념해서 웅기군을 「선봉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노도와 같이 국내로 들어왔고, 이미 조직되어 있던 조국광복회 산하의 무장돌격대는 일제의 경찰관서와 통치기관을 접수했으며 조선인민혁명군을 일본군의 퇴로로 인도하여 적을 섬멸시켰으며, 또한 조선인민혁명군은 대일작전에 참가한 소련군대와 연계를 취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조국을 해방시켜나갔다.
한편 이남에서는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소련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이 파죽지세로 밀려오자 일제의 아베 총독을 우두머리로 한 일제 통치배들은 그들의 생명보호를 위해 시정권을 조선인에 넘겨주기로 했다. 처음은 친일신문 「동아일보」 사장을 했던 송진우에게 부탁하였으나 송진우가 감당할 일이 못되는 지라 거절당하고, 하는 수 없이 여운형 선생에게 엔도 정무총감을 보내어 부탁했다.
여운형 선생은, “1. 감옥에 가두고 있는 모든 정치범, 경제범을 석방할 것, 2. 향후 3개월 동안(추수 때까지) 1인 1일 3합의 식량배급을 보장할 것. 3. 조선인이 하는 일에 일체 간섭하지 말 것.” 등 3가지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을 다짐받고 시정권을 받아들였다.
여운형 선생은 1944년 8월부터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에게 마지막 타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건국동맹」의 3불맹세(三不盟誓 - 1. (不名)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2. (不居) 거처를 말하지 않는다. 3. (不文) 글을 남기지 않는다.)로 유명하다.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시키고 있던, 이 조직을 핵심으로 하여 조국의 남부 전역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해방직후의 혼란한 치안을 확보하고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또는 수탈과 탄압에 못 견디어 조국을 떠나게 된 동포들의 귀환을 원호하면서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모두가 하나같이 떨쳐나서도록 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정권기관을 창출하기 위하여 먼저 동・리와 면・군의 지방정권기관으로서의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이들이 각급지방의 대표를 선출하고, 9월 6일 서울 이화고등여학교에 모여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정강」과 「중앙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로써 남과 북은 모두 각급 주권기관을 창출하고 중앙정권기관을 내와서 이제 통일정권을 내오는 일만 남은 것이었다.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첫 단계가 우리민족의 손으로 빛나게 승리한 것이다. 이제 일제의 모든 식민지잔재를 청산하고 남녀, 귀천, 사상, 종교, 정치 등 모든 차별을 철폐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와 같이 미군이 조국의 이남에 들어오기 전에 일제의 총독부가 자기들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 통치권을 넘겼고, 이북은 바로 총대로 일제 통치기관을 짓부숴버렸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8월 15일에는 이미 우리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고, 이때 미국은 저 멀리 오키나와에서, 그리고 필리핀의 루손 섬에서 정글의 진창에서 허덕이고 있지 않았던가!
일제의 식민지에서 미제의 식민지로 된 이남 땅
일제의 항복을 받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하기 위해 상륙할 것으로 알고 있는 미군이 상륙을 앞두고 일본군과 총독부에게 미군이 상륙할 때 일본군이 무장하여 경비하고 질서를 지키도록 할 것과 미군의 허락이 있을 때까지 부서를 지킬 것을 명령했다.
9월 7일, 미군은 인천에 상륙했다. 순진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적의 적은 우리 편’이라는 단순한 형식논리로 수많은 사람들이 인천부두로 전승국 미군을 환영하러 나갔다. 일본군은 철모르고 환영하러 나온 군중에게 총질을 해서 수많은 우리 청년들을 죽이고 상했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이날 또 미군은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이남 전역에 비행기로 전단을 살포하고 군정을 실시한다고 했으며 군사강점을 선포했다. 그리고 일제의 모든 통치기관은 그대로 온존한다고 했고, 각급 관리들은 직장을 지킬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미군은 총독부에 군정청을 두고 조선의 북위 38도선 이남의 권위는 군정청에 있다고 했으며, 다른 어떤 것도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따라서 「조선인민공화국」은 인정하지 않으며 「중앙인민위원회」와 각급 「인민위원회」는 해체하라고 명령했다. 미군은 지프차에 기관총을 달고 와 각급 「인민위원회」와 「치안대」의 간판을 뜯고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분통이 터진 열혈청년들은 도처에서 저항하다가 총에 맞아죽고 부상을 입었다. 그중에서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곳은 전라남도 화순광산의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미군과 그 앞잡이 경찰에게 다이나마이트로 대항했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진압당하고 말았다. 총대 없는 정권이란 정말로 맥없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했다.
미군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관인 「총독부」관리와 친일지주, 친미종교인, 친일관리,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끌어 모아 「군정청」을 설치했다.
한편, 38도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대륙침공의 첨병부대인 일본군 나남사단 등 모든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이북의 모든 행정권을 이북의 북조선인민위원회에게 이양했다.
이북의 모든 행정권을 이양 받은 김일성 장군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일제의 모든 법령과 통치제도를 타파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실시해나갔다. 그 첫째가 9할이 가까운 농민의 봉건적 착취의 기초였던 봉건적 토지제도의 청산이었다. 즉 모든 토지를 밭갈이하는 농민에게 무상분배하는 토지개혁이었다. 이로써 이북은 한날한시에 지주가 몽땅 소멸되고 말았다. 다음은 8시간제 노동을 기본으로 하는 민주적인 노동법을 선포했다. 그리고 일제가 가지고 있는 공장, 은행, 선박, 교통기관 등 중요산업기관을 국유화했다. 이것은 노동자가 바로 공장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남녀평등권법령을 공포했다. 수 천 년을 봉건적 억압 속에서 살아온 여성들에게 남자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가지게 되었고, 산후 산전의 유급휴가를 받게 되는 등 여성으로서의 신성한 권리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북은 항일투쟁시기에 내걸었던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강령을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정강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20개 정강으로 이루어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해나갔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과 「미소공동위원회」
이남 땅에 미군이 들어오게 된 명분은 미・소 양국의 협정에 의하여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그들을 무장해제하는 것이었다. 미・소 양군은 이 과업을 마치고 적당한 권위를 인정받는 정권을 창출하여 거기에다 권력을 넘겨주고 철수해야 마땅할 것이다.
38선을 경계로 미・소 양군이 일본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결정한 얄타회담에서 합의한 내용에 따라 1945년 12월에 전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영・소 3개국의 외상이 모스크바에 모여 회담을 하고 「조선문제」에 대한 결정을 발표했다. 즉 “미・소 양군은 「미・소공동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선인민의 정당・사회단체의 대표자들과 협의하여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수립을 위한 정강을 결정하고, 이를 미・영・소・중 4개국의 정부의 승인을 받아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고 4개국은 최장 5개년을 신탁통치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신탁통치’란 것은 국제연합 헌정에서의 ‘신탁통치’는 아니고, 러시아어의 원본에는 ‘후견’이라는 말로 되어 있다고 한다. 미제는 이를 모략적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의미를 사상해버리고 그냥 ‘신탁통치’라는 기분 나쁜 보도로 만들어 처음부터 딴지를 걸었다. 이 보도를 보고 우리들은 모두 격분을 했으나 그 내용이 일제의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 한 후 양군이 돌아가기 위해서 하는 정당한 조치임을 알게 되자, 친일파 민족반역자와 미제의 점령 밑에서 출세하려는 친미 숭미 사대주의자들을 제외하고, 절대다수의 민중들은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미제와 이른바 「상해임시정부」에서 분파로 분탕만 일으키다가 미국으로 들어가 독립운동자금이라면서 「임시정부」를 팔아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서 안락한 생활을 하다가 조국이 해방이 되자 미제의 충실한 주구로 된 이승만과 이자가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끌어 모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폭력집단들은 「미・소공동위원회」사업을 백방으로 방해해 나섰다.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5월에 협의대상의 정당・사회단체들에 친일파의 단체까지 넣자고 하는 미국 측의 주장 때문에 무기휴회로 들어가고 말았다.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절대다수의 농민들이 토지개혁으로 제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게 되리라고 고대하던 일이 허사로 돌아갔고, 때마침 모리배들이 미제의 묵인 아래 쌀을 일본으로 대량 밀수출한 결과로 생긴 도시민중의 쌀 소동과 맞물려 10월달에 대구지방 일대에서 항쟁이 터졌다. 사람들은 이를 ‘10월인민항쟁’ 또는 ‘10월폭동’이라고 한다.
하늘도 일제 해방을 축하해주는 듯 전쟁 중 내내 가물어 흉년이었던 것이 해방의 1945년은 대풍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6년 봄부터 시장에 쌀 공급이 줄어들어 쌀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도시민은 그들의 임금으로 식량을 사댈 수가 없었다. 월급쟁이들이 한 달 월급을 몽땅 털어도 쌀 한 말 사기가 어려웠다. 쌀값이 이처럼 뛰어오르자 물가는 쌀값에 미치지는 못해도 덩달아 오를 수밖에 없었다. 6월초에 당국에서 물가지수란 것을 발표했는데 3월말 기준이라고 하면서 1945년 8월 15일을 100으로 할 때 524라고 했다. 불과 반년 남짓 한 기간에 5배나 오른 셈이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쌀 배급을 도시에 실시하려 했지만 쌀은 이미 물 건너 일본으로 가고 만 것이다. 창고에 있던 총독부가 공출로 빼앗아놓은 얼마 남지 않은 묵은 쌀을 털어 일단 서울에 1인 1일 1합의 배급을 해보았지만 며칠이 안 되어 그것도 바닥나고 말았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자 사정은 더 악화했다.
초여름에 보리 수확 철을 맞고 식량 사정이 좀 풀리는가 했더니 도시민의 식량 해결의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미군정 당국이 이른바 군정관리에게 그 해결 방안을 강구하도록 했는데 그 방안으로 꺼낸 것이 일제 총독부가 만든 이른바「식량공출령」이라는 묵은 법률이었다.
군정청은 그들의 졸개 행정기관을 통해 농민에게 보리 공출을 할당하고 공출을 독려했지만 농민의 반발은 격렬했다. 농민조합은 이를 즉각 반대했고 농민들은 조직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군정은 미군이 지휘하는 경찰을 동원해서 강제공출에 나섰다. 미군이 지프차를 타고 뒤따라오고 군정경찰을 앞세워 마을에 들어가 집집마다 뒤지고 빼앗았다. 도처에서 실력행사가 일어났다. 많은 농민들이 붙잡혀 유치장으로 끌려갔고 실력행사 와중에 사상자도 났다.
이리하여「신한공사」가 만들어져서 토지개혁이라는 희망도 사라진데다가 공출까지 당해야 하는 농민은 군정과 이제 영영 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공출소동에 동원된 군정경찰의 모진 탄압으로 경찰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나빠졌다. 이렇게 빼앗은 보리로 배급을 주려고 했지만 그것으로 식량문제 해결에는 새발에 피였다.
쌀소동으로 세상이 한참 뒤숭숭할 때 이승만 박사는 한 말씀했다.
“한국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쌀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될 것을 왜 쌀만 먹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말이 나돌자 사람들은 말했다.
“정말 천황씨 같은 양반이네. 쌀 살 돈도 없는데 고기를 사 먹을 돈은 어디 있는데? 어이구 참, 미국에서 살았다고 고기만 아는가 봐. 그런 사람에게 나라를 맡겼다가는 우리들 다 굶겨 죽이겠다.”
당시 물가는, 왜놈들이 망할 무렵 그들이 앞으로 필경 조선에서 쫓겨날 것을 염두에 두고 그때 쓸 요량으로 많은 조선은행권을 찍어둔 것을 군정청이 차지하여 그들의 군정 비용으로 시중에 아무런 제한 없이 유통시켜서 일어난 것이다.
신식민지체제의 기반구축
미제는 조선민중의 끈질긴 저항을 폭력적 탄압만으로는 군정을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마침내 미제는 「미・소공동위원회」를 다시 열어 일단 민중의 저항을 달래보려고 했다.
미제의 점령군 사령관 하지는 북조선 주둔군 사령관에게 「미・소공동위원회」재개를 제안하고 그 서한을 공개하여 저항을 달래보려고 했다. 거기에는, 먼저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 정부와 민주단체와 더불어 후견안(여기에서는 신탁이라는 말이 없다)을 작성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지는 신탁의 의미를 정하기 전에 임시정부를 먼저 수립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조선민중의 저항에 당황한 미제는 경찰에게 일제히 무기휴대를 금하고 대신 방망이를 가지게 했다. 경찰복장도 일제 경찰의 검은 복장을 없애고 엷은 카키색 미 군복에다 아프리카 식민지 서양 사람들이 쓰던 민간 헬멧으로 바꾸었다. 폭동을 진압한다면서 마구잡이로 잡아간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지시하고 급히 미국으로부터 밀가루와 우유, 설탕, 과자를 엄청나게 대량으로 들여와서 배급이라고 주었다.
뿐만 아니라 미제는 원면을 헐값으로 들여오고 그들이 군수잉여물자로 광목, 낙하산감, 심지어 모기장감의 직물을 마구 들여와 우리 민족경제의 바탕으로 되어 있던 면직, 견직, 마직 공업을 결딴내었고, 화학비료를 무제한으로 들여와 화학비료의 득실을 모르는 우리 농민으로 하여금 마구 뿌리도록 만들어 토지를 산성화시켜 농업생산의 기초를 파괴했다. 민족경제를 그 기반으로부터 파괴하여 경제를 완전히 미제에 예속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미제위 이런 물자의 선심은 결코 그처럼 고마운 원조나 시혜가 아니었다. 남조선 군정이 미제의 금융자본으로부터 대조선차관 2,500만 달러를 빌려다가 태평양방면에 있는 미국의 전쟁잉여물자를 사서 들여온 것이다. 이 차관은 미군이 철수할 때는 그 빚이 조선정부에 이양되고 25개년 기간으로 1951년부터 연리 2.63퍼센트로 매년 분할상환 한다는 것이다.
미제는 알토란같은 쌀을 모리배로 하여금 일본에 갖다 팔도록 해서 떼돈을 벌게 하여 장차 미제의 식민지 경제에서 그들의 주구가 되는 매판자본까지 키웠고, 쌀을 달라는 아우성이 폭동으로 번지자 귀한 외환을 빚내어 과자부스러기나 사다가 안겨서 달래는 한편, 자립적 민족경제의 기반까지 파괴하는 일석이조의 사기를 치는 것이었다. 미국놈의 원조가 바로 그렇고 차관이 바로 그렇지 않는가.
특히 미군정은 2월 21일 일제가 조선농민으로부터 강탈해간「동양척식주식회사(약칭 동척)」의 땅을 일본의 소유로 규정하여 적산이라는 이유를 들어 미군정의 소유로 하고「신한공사」라는 것을 만들었다.「신한공사」는 조선정부와 독립된 기관으로서 사장은 미군 장교로 임명하고 조선정부는 어떠한 권한도 없다고 했다. 공사에 관계된 범죄는 미군의 군사재판이 담당한다고 발표했다. 미군정이 말하는 조선정부란 그때 3상회의 결정으로 수립될「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독립이 된 후에도 그 땅을 미국의 재산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강도가 탈취한 것을 보다 힘센 새로운 강도가 빼앗아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제 것으로 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해 농민들은 결사적인 반대투쟁을 조직하고 저항했지만 총칼을 가진 미국 놈들에게 속수무책이었다.
실제로 미군정은 3월 11일에「신한공사」의 법률을 제정 공포하고 왜놈들이 강탈해간 조선 사람의 땅을 제 것으로 차지하고 그 땅에서 소작료를 받았다. 미군정은 소작인들에게 군사재판으로 위협했고 그해 가을부터 약 3할의 소작료를 강탈했던 것이다.
해방군의 너울을 쓰고 들어온 미제는 이때부터 침략의 의도가 노골화되어 갔다. 미제는 일제가 조선에서 차지하고 있던 모든 중요산업과 일인의 개인재산까지 전부를 점령군이 점유한 재산으로 결정하고「적산관리부」를 만들어 차지했다. 이로써 미제는 조선의 대부분의 부동산, 동산을 차지한 것이다.
또 미제는 남조선을 문화적으로도 식민지화하려는 기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해방 후 경성대학과 각 전문학교는 거기에 있는 조선인 교수들의 열성적인 활동으로 교수를 새로이 초빙하고 학생자치회와 더불어 자치경영하고 있었다. 미군정이 학원을 간섭하기 전에는 참으로 학문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었다. 미군정과 군정 관리는 이것이 못마땅했고 자유주의적인 교수와 사회주의 경제학을 연구하는 교수들의 새나라 건설의 자주적인 일군을 양성하는 일이 특히 눈에 가시처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되자 학문의 자유에 대해서 가장 열렬한 도상록 교수와 사회주의 경제학자로 일제 때부터 탄압을 무릅쓰고 연구에 전심해서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낸 것으로 유명한 백남운 교수를 본보기로 해서 일차적으로 파면했다. 그것은 앞으로 식민지 교육정책으로 내놓을 이른바 「국대안」을 위한 전주곡이었고 다른 교수들에 대한 위협이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이르는 「국대안」이란 6월 19일에 발표한 이른바 「국립서울종합대학안」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미군정이 학교 경영권을 가지고 군정에서 관제로 이사회를 조직하여 대학의 경영을 맡긴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것은 또한 서울에 있는 일제 총독부의 관립 도립전문학교와 수원에 있는 농업전문학교를 한데 통합한다는 것이다.
6월 19일 이른바 「국대안」이라는 것이 나오자 전국의 학원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제일 먼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전에서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어 서울대학을 비롯해 「국대안」에 들어갈 전문학교들이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연이어 다른 학교들도 동정 휴학을 선포했다. 나중에는 중학교도 이에 동조해서 군정청의 민족교육을 무시한 교육정책을 비난하고 진보적인 교수와 교사의 해임을 반대하며 즉각 복직시킬 것을 주장해 동맹휴학으로 나섰다.
미군정의 교육당국은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자 국립서울대학교의 총장은 조선인으로 한다고 무마해 나왔지만 이미 그들의 식민지교육정책의 마각이 드러난지라 믿을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동맹휴학의 열풍은 지방으로까지 번져나갔다.
미군정은 한편으로 회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탄압을 강화했다.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교수, 교사를 다른 구실을 붙여 학교에서 축출했고 학생들은 학원에서 퇴학시켜 추방했다.
당시 사회는 일제로부터 막 해방이 되어서 일제의 우민정책으로 대학이나 중학교의 교사로 임명할 수 있는 정식 자격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중학교 교사 중에서 실력이 있고 자발적으로 학문을 꾸준히 연구해온 학자들이 대학의 교단을 담당했다. 여기에 곁달아 수단 좋은 사람들도 줄을 달아 대학으로 올라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중학교도 마찬가지로 공인된 정식교사가 아주 적었다. 갑자기 불어난 중학교 교원의 수요를 감당할 수가 도저히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교원 중에서 일부 실력 있는 자들이 중학교 교원으로 올라왔다. 여기에서도 여러 가지 경로로 줄을 달아 초등학교 교원도 못할 자들이 들어와 학생들에게 배척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일제 때부터 왜놈들 밑에서 식민지 노예교육의 첨병으로 복무했던 군정의 문교관리들은 노예교육정책의 실행과 거기에서 얻은 모략적 책략에 이골이 난자들이라 이러한 해방 직후의 불가피한 상황을 이용했다. 그들은 대학과 중학교의 교원의 자격문제를 정리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진보적인 대학교원과 중학교 교원 중 앞으로 교육의 식민지적 지배에 방해될 교원들을 정리하려는 했다. 그들을 무자격이라는 핑계를 걸고 학원에서 추방하는 일을 벌였다. 대신에 실력도 없고 줄을 타고 중학교에 대학교에 교원으로 올라온 자들은 온갖 위조졸업장을 만들고 자격증을 위조해서 그것을 근거로 교원의 자격증을 남발하여 미제의 군정교육정책, 즉 식민지교육의 첨병으로 나서게 했고, 실력은 있지만 위조졸업장을 만들거나 자격증을 위조해서 학생들을 속일 수 없는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교원들은 학원에서 대거 추방당하는 어처구니없는 꼴을 당했다.
유신정권시대에 교수재임명을 빙자해서 학생들의 통일운동 민주화운동에 동정적인 교수들을 추방하는 방법의 원조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학생들이 따르고 실력이 있는 대학 교원과 중학교 교원들은 일시에 직업을 잃고 방황하게 되자 여기에 조국의 북부에서 구원의 손길이 뻗쳐왔다. 많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이때 북으로 넘어갔다. 거기에서 그들은 자기의 능력에 따라 일할 곳을 얻어 나라의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지금 북 공화국의 강성한 과학기술과 화려한 문화예술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에 그들은 크게 이바지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미제의 신식민지적 기반을 구축하는 한편, 이로 인하여 일어나는 저항을 우선 조금이라도 누그러지도록 하기 위하여 1947년 5월에 미제의 사령관 하지는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요청했고 소련을 이를 받아들여 재개되었다. 소련 측은 대폭 양보하여 협의대상자의 수를 정당・사회단체의 회원 수에 비례하여 정하기로 제안하여 이를 합의하고 결정을 보았다.
이러한 결정이 발표되자 하룻밤 사이에 425개의 유령, 협잡단체가 생겨 협의대상자의 신청을 해왔고 그 회원 수는 전체 남북인구의 근 2배에 달하는 5,600만 명이나 되었다.
소련 측은 마지막으로 협의대상자의 수를 남북 동수로 하자고 주장했으나 미국 측은 인구수의 비례로 하자고 하여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소련 대표들은 이북으로 돌아가서 조선문제는 조선인민의 자결권에 맡기고 양군은 1947년 연말까지 동시에 철수하자고 제안했다.
분단, 남조선단독선거와 단독정부
모스크바 3상회결정으로 이루어진 「미․소공동위원회」를 파탄내고만 미제는 조선문제를 국제연합으로 넘겼다. 그리하여 국제연합은 미제의 의사대로 그를 따르는 회원국의 수적 우세를 이용하여 국제연합 감시 하에 총선거를 한다는 미제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미제는 국제연합을 만들 때 대서양헌장이라는 국제연합 헌장에 전후문제에 관계되는 사항은 국제연합에서 취급하지 않고 이해당사자 간에 해결하도록 되어있다. 조선문제는 전후문제에 관계되는 것으로, 그래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취급했던 것이다. 소련은 그에 따라 조선문제의 해결책으로 ‘조선문제는 조선인민의 자결권에 맡기고 미소 양군은 1947년 12월 말까지 동시 철수’를 제안해두고 있었다. 미제는 이러한 소련의 제안을 묵살하고 조선문제를 국제연합 헌장마저 짓밟고 국제연합에 넘겼던 것이다.
그러는 한편 이남 땅에서는 대대적인 탄압으로 민주인사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고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 「학련」 그리고 깡패들을 동원하여 민주인사들의 가옥과 살림을 쳐부수고 사람들을 마구 팼다. 그래서 이남 땅을 완전히 공포분위기로 만들고 민중들을 「향보단」이라는 조직으로 몰아넣어 부정선거를 준비해나갔다.
미국의 제안에 따라 국제연합 감시 하의 총선거를 결의한 국제연합은 「조선위원단」을 조직하여 들어왔으나 이북 측의 거부로 이북에는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다시 국제연합에 총회시기도 아닌 때에 급히 국제연합 헌정에도 없는 「소총회」라면서 소집해서 선거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제안하고 이를 결의하여 이남 땅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총선거를 한 것이 이른바 5.10선거라는 것이다.
이남 민중은 이를 반대하여 총궐기해서 투쟁을 전개했다.
1948년 2월 7일에 이남 땅 전역에서 총파업투쟁이 벌어졌고 농민들은 경찰관서를 습격해서 무장을 탈취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곳곳에 야산대가 조직되고 밤이면 산마루에 봉화가 올랐고 ‘단독선거 반대’의 함성이 울렸다.
제주도에서는 4월 3일 전 섬에 총궐기가 있었다. 무장을 들고 그 동안 도민을 탄압해온 경찰관서를 점령하고 서북청년단을 까부쉈다. 이것이 ‘제주도 4.3인민항쟁’이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제주도는 미군 군정청 행정이 들어가지 못했다. 제주도에서는 남조선단독선거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1948년 5월 10일, 이른바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나 곳곳에서 저항을 받았고 투표를 못한 곳도 있었지만 대리투표, 무더기표 등 부정선거로 얼룩진 선거였고 무장경찰이 마을을 다니면서 투표장으로 몰고 가는 선거였지만, 이른바 국제연합 선거감시단은 평화적이고 순조로운 선거라고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국회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그 결과는 이남 「국회의원」 198명 중 그 성분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는 노동자와 농민의 대표자는 한 사람도 없다.
이들이 헌법을 만들었고 「대한민국」이라는 정부를 만들었는데 이는 지주, 자본가, 친일관리들이 정부임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이것이 미제에 의하여 만들어낸 분단된 예속정권의 실상이라 할 수 있다.
이리하여 8.15 일제로부터 해방의 의의였던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완수는 이남에서는 미제에 의하여 완전히 좌절되었고 그들이 세운 예속정권인 이승만 정권에 의하여 학살되고 말았다.
이남의 민중 앞에는 새로이 미제 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새로운 민족해방운동과 그 예속정권의 파쇼폭압에서 벗어나는 민주주의운동이 과업으로 주어지게 된 것이다.
역사의 새로운 시작, 통일운동
미제의 식민지 통치는 제2차세계대전 이전의 주권을 완전히 찬탈하는 식민지 통치가 아니라, 주권은 그들이 세워놓은 예속정권에게 주어 식민지를 통치하도록 하고 각종 협정과 조약으로 종주국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하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제도이다. 이를 전전의 식민지제도와 구별해서 신식민지제도라고 한다.
이남 땅에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운동이 격화해지는 가운데 이북에서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으로 하여금 조국이 분단의 위기에 처한 상황을 반대하고 민족자주역량을 하나로 모으기 위하여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개최를 제안했다. 이에 대해 이남의 정당・사회단체 중 「한국민주당」과 이승만 일파 등 지극히 소수만 제외하고 모스크바3상회결정을 반대하던 김구 선생까지도 지지하는 등 거의 모든 민중들이 지지하고 대표자를 선정했고 이들이 이북 평양으로 모여들었다.
1948년 4월 30일에는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지도자들의 협의회가 진행되었다. 회의에서는 「남북조선 제 정당・사회단체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여 미・소양군 철수안을 절대 지지하며 양군이 철거한 후의 완전한 질서를 담보하며 외국군대 철수 후에는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고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남조선단선에 의하여 조작되는 단독정부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성명했다.
남북연석회의 참가자들은 서로 정견과 신앙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구국방안과 통일방침을 일치하게 결의하고 회의에서 채택된 결정을 실현하기 위하여 한결같이 떨쳐나설 것을 호소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1948년 5월 10일 남조선 단독선거가 결행되자 1948년 6월 29일 「남북조선 제 정당・사회단체들의 지도자협의회」를 소집하여 지체없이 전조선적인 통일적 중앙정부를 세우는 방침을 결정을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 방침은 모든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전체 인민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지도자협의회는 남조선에서 강압적으로 실시된 단독선거의 무효를 선언한 다음 전조선적인 선거를 실시하며 이에 기초하여 최고인민회의를 창설하고 중앙정부를 세울 것을 결정했다.
남북조선 전지역에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는 1948년 8월 25일에 진행되었다.
이북에서는 일반적인 평등적, 직접적 비밀투표에 의하여 선거가 진행되었는데 유권자의 99.97%가 참가하여 98.49%의 찬성투표로서 212명의 대의원을 선출했다.
이남에서는 군정경찰과 우익깡패들의 방해책동을 고려하여 비밀리에 선거자들의 서명을 받는 방법으로 인민대표들을 선출하고, 선출된 인민대표들이 이북 해주에서 모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을 선거하기로 했다.
군정경찰과 이남의 우익정치깡패들의 폭력적 탄압을 무릅쓰고 서명투표가 진행되었다. 이 탄압은 정말로 격심했다. 8월 20일 하루 동안 이남에서 1,370명이 붙잡혔고 선거의 전 기간 동안 수만 명이 체포 투옥되었으며 수 천 명이 살상되었다.
미제와 군정경찰 그리고 폭력배들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이남 민중은 통일의 열망을 가지고 선거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전체 유권자의 77.52%에 해당하는 673만 여명이 선거에 참가하여 1,080명의 대표를 선출했다.
이 대표자들이 이북지역인 해주에 들어가서 8월 21-26일 사이에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여기서 비밀투표에 의하여 이남인구 5만 명에 1명 비례로 360명의 최고인민회의대의원을 선거했다.
이러한 남북총선거에 기초하여 1948년 9월 2일 평양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가 소집되었고 회의에는 남북조선에서 선거된 572명의 대의원들이 참가했다.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했다. 회의에서 김일성 장군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으로, 국가수반으로 추대되었으며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선포했다.
이와 같이 해서 이남은 이북의 대표자들이 한 사람도 없는 친일지주와 자본가들 그리고 친일관료 출신들로 이루어진 명실 공히 반동가리 정부인 셈이고, 이북은 그래도 이남 출신의 대의원으로서 전체 대의원수의 63%를 차지하고 거기에는 노동자, 농민, 교육자, 소시민 등도 자기 계급계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참가한 전체 민족의 정부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명분은 정당하지만 실지 현실로는 그 정부의 권력은 이북에서만 실행가능한 정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그 후 이남의 「민주주의민족전선」과 합동한 「조국통일민족전선」의 이름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가지로 통일방안을 제의하고 인사들을 보내어왔지만 미제와 이승만 정권은 이를 일축하고 북진통일만 부르짖었고, 통일을 위해 넘어온 인사들은 감옥에 처넣거나 살해하고 말았던 것이다.
반미구국운동의 전개와 6.25 전쟁
미제는 이승만 정권을 세움으로써 우리민족을 분단 시켰고 이 분단을 반대하여 투쟁하는 민중들은 유격대를 조직하여 대항해 나섰다. 한라산의 유격대, 지리산, 태백산, 운문산-신불산 유격대를 비롯하여 높은 산에는 모두 유격대가 조직되어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미제는 이승만 군대를 정예화 시키고 과거 악명 떨친 일본군의 삼광(三光)적전과 중국 장개석 군대의 건벽청야(建壁淸野)작전에다, 미제가 인디안을 몰살했던 작전까지 동원하여 유격대와 산간민중을 잔인하게 토벌했다. 여기에다 투쟁의 지도부인 남노당 지도부의 배신적 간첩행위로 유격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민중들은 굴하지 않았다. 2년후 1950년 5월 31일에 총선거가 있었다. 민중은 거기에 무소속 후보에게 표를 던져 이승만의 지지자는 3분의 1에도 못 미치게 되었다. 당시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거하는 간선제였으므로 2년 후에는 이승만이 끝나게 된 것이다.
당황한 미제와 이승만은 살 길을 찾았으나 그 길은 전쟁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침 미제는 전후 호경기가 끝나고 불황에 빠져 허덕이고 있던 중이라 그들도 불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38선에서 항시 충돌이 있었으며 그것은 전투가 대대전투규모로 더러 연대전투규모로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이 충돌이 더 규모가 커지면 바로 전면전쟁으로 되는 것이다.
1950년 6월에 들어서자 늘 있던 충돌의 규모가 예사롭지 않았고, 소련・중국의 포위망 구축을 제안했던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 날아오고, 워싱턴, 토오쿄오, 서울이 서로 오고가며 한참 바쁘더니 마침내 1950년 6월 25일에 38선에서 전면전쟁으로 발전된 것이 6.25전쟁인 것이다. 이리하여 이승만은 살아났다.
이승만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미제의 비호 아래에 그를 반대하는 세력을 모조리 공산당으로 몰아 학살을 했다. 이미 사상전향을 한 「보도연맹」 회원까지 쓸어 넣어서 산골짜기에, 바다에, 광산 폐광에 죽여 처넣었다. 약 30만 명이나 되는 대학살이었다고 한다. 이런 대학살은 우리 역사에는 물론 없었고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물다.
그리고는 공포정치를 폈다. 그의 공포정치의 하수인으로 극히 유명한 자들로 특무대장 김창룡, 백골부대장 김종원, 헌병사령관 원용덕이 있었다. 이승만의 주장에 반대하는 자들은 모조리 공산주의자로 몰아 감옥에 처넣고 죽였다. 이승만은 헌법도 협잡 날치기로 개정하여 간선제을 직선제로 고치고 나중에는 종신 출마제로 뜯어고쳤다.
사회는 실업자로 넘쳐났고, 무슨 토지개혁이라면서 지주에게는 지가증권을 주어 그것으로 자본가로 변신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농민에게는 분배받은 토지의 농지세라고 하면서 거두어들였다. 이러한 토지개혁은 농업경영을 영세화시켰고 그 결과 엄청난 절량농민을 발생시켜 살길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도시는 판자촌과 사창굴로 화하고 말았다.
전쟁을 부추겨 동족상잔을 일으켰던 미제는 얼마 안 되는 구호물자를 풀어 나누어주고 후안무치하게도 그들이 무슨 구호의 천사인 양 했다. 이들로부터 구호물자와 원조물자를 받아 이를 판 돈으로 대충자금이라 하여 예속정권의 유지비용으로 썼고 미제의 식민지 통치자금으로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승만 정권의 사회는 일제 해방의 의의인 민족해방 민주주의혁명을 완전히 봉쇄해버린 봉건적 토지소유가 그대로 온존된 사회이였고, 그 정권은 미제의 신식민지 예속정권으로서 군사통수권마저 갖다 바친 예속정권이다. 그 사회는 일제 식민지체제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식민지반봉건사회였던 것이다.
끝으로
일단 이야기를 여기에서 마무리하고 이승만 정권의 창출과 나라의 분단, 우리 현대사로서의 미제의 신식미지체제의 정착과정을 이야기함으로써 이남 사회의 현대사의 시작을 대강 그려보았다.
분단으로 시작된 우리의 현대사는 필연적으로 통일의 현대사도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의 현대사, 굴곡되고 식민지통치로 오욕에 찬 역사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해방운동으로서의 긍지도 함께 가질 수 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수탈과 압제의 세상에서 가장 보람 있는 삶은 그에 반대해서 투쟁하는 삶이고, 그런 삶에서 얻은 만신창이로 당한 상처마저도, 때로는 죽음마저도 그보다 더한 영광은 없는 것이다.
(2009년 5월 2일)
(월간 말 2009년 6월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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