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1일 목요일

미군주둔 60년, 우리는 왜 맥아더를 이야기해야 하는가(2)

[이 글은 2005년 9월, 인천 월미도에 있는 이른바 <맥아더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라는 농성시위를 하던 때에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의 홈페이지 측의 요청에 의하여 3번으로 나누어 맥아더의 우리나라에 대한 범죄를 폭로하기 위하여 쓴 글입니다. 그중 둘째 글입니다. 그중 둘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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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고도 영웅이 된 더글러스 맥아더

1941년 12월에 태평양전쟁을 맞은 아들 더글러스 맥아더는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2월 8일 진주만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의 초기에서 선제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필리핀 주둔 미 공군사령관이 타이완의 일본군 비행장의 공격하려고 했는데, 맥아더는 이 요청을 받고 판단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놓쳐버렸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108대나 되는 일본 해군의 육상공격기의 공격을 받게 되어, 처음부터 맥아더는 전쟁의 선제주도권을 빼앗기는 용장(庸將)으로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폭격을 맞은 미군의 클라크비행장은 못 쓰게 되었고 미군의 비행기는 일본군의 일격으로 30분만에 98대의 폭격기와 전투기를 잃어버렸다. 그 이튿날 9일은 악천후로 일본군의 비행기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10일에는 캬비테 군항에 일본군 폭격기와 전투기들이 공격을 가해왔다. 미국의 아시아 함대는 이미 남쪽으로 도망가서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초계정과 어뢰정, 유조선등이 격침되었고, 정박 중이던 잠수함 1척이 격침되었다.

10일 항공기지 확보를 위한 일본군의 대대적인 상륙작전이 시작되었으나, 이미 용장이 되어버린 맥아더는 이 상륙이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수비군의 파견을 요청했지만 그 요청을 거절했고, 전력이 급격히 줄어든 항공기들만으로 상륙저지에 나서게 했다.

그러나 사령관의 우둔한 지휘로 만신창이가 된 미군이지만 상륙저지에 나선 항공기는 해안으로 돌진해오는 일본군 주정을 공격하고, 일본군 전투기가 마구 설쳐대는 하늘에 올라가 일본군의 수송함대를 공격하여 소해정 1척을 격침하고 순양함을 대파하는 등 미군은 강렬하게 저항했다.

일본군은 원군을 못 받은 1개중대에 불과한 수비대를 공격해서 내쫓은 다음 오후 2시경에 아바리 비행장을 비롯해 그 남쪽의 무르뉴간 비행장과 쓰게가라오 비행장 점령하고 이들 비행장에 일본군 육군 5비행집단이 일제히 날아와 11일부터는 이곳을 거점으로 해서 미 항공병력을 격멸하는 작전에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이미 제공권을 장악한 일본군의 주력부대 상륙은 12월 22일 야간에 시작되었다. 이들은 두 곳에서 상륙하여 마닐라를 협공하는 태세를 취했다. 일본군은 마닐라 북방 200km 지점인 링가옌 만에 상륙을 했고, 24일에 마닐라 동남쪽 110km 지점의 라몬 만에 상륙을 했다.

초전에 주도권을 상실한 맥아더는 연속 패전을 겪어야 했고 이 국면을 타개할 전술을 내오지 않고 도망할 궁리만 하고선 23일에는 벌서 각 부대에게 이미 만들어놓은 퇴각계획대로 바탄반도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만 할 뿐이었다.

바탄반도는 남지나해와 마닐라 만 사이에 길게 나온 길이 48km의 반도로서, 협곡, 바위, 정글로 이루어진 산악지대였다. 이곳에 수비군을 집결시키면 마닐라는 일본군에게 내어주더라도 정작 중요한 마닐라 만은 연합군의 지배하에 놓이는 것이다.

마닐라 만의 입구에 있는 코레히도르 섬에는 강력한 요새가 있었다. 그리고 그 섬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은 꼭 바탄반도를 거쳐야 한다. 이를 맥아더는 ‘적은 병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병마개는 우리에게 있거든’ 하고 적절하게 비유했다.
과연 이 전술이 들어맞아 일본군은 바탄반도 점령을 위해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되도록 많은 수의 병력이 무사히 바탄반도에 들어와야 한다고 보고 맥아더는 바탄반도로 후퇴하라고 재촉했다.

27일에는 마닐라가 무방비도시로 선언되었고, 1월 1일에는 남부 루손군의 마지막 부대가 안전지대로 빠져나와 바탄반도로 들어왔다.

1월 2일에 일본군은 무방비 상태의 마닐라를 점령했고, 1월 6일까지는 미군과 필리핀군이 모두 바탄 반도로 후퇴했다. 남아있던 B-17은 모두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하였고, 아시아 함대는 자바로 들어갔다.

바탄반도 안에는 미군과 필리핀 군대를 합해서 총 85,000의 병력을 집결시켰는데 병력 수로 보아서는 일본군보다 약 10배나 우세했다. 너무 많은 병력이 좁은 곳에 집결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일본군은 적은 병력으로 포위하기 쉽고, 모두 적의 공격을 피해 후퇴한 상황이라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열성적으로 저항한 자들은 현지인 필리핀군뿐이었다.

1월 10일부터 공격을 시작한 일본군에 대항해서 필리핀군 부대는 자기 땅을 지키려는 일념을 가지고 싸웠으나 미군은 전투를 서로 미루기만 하고 꽁무니를 뺄 뿐이었다. 26일까지 필리핀군은 일본군의 맹렬한 공격을 이겨냈다. 그 후 보급이 떨어진 상태이지만 그들은 영웅적으로 방어진을 펴고 2개월이 넘도록 버티었다. 그러나 맥아더와 미군은 10배도 넘는 병력을 가지고도 일본군과 싸워 상황을 타개할 생각은 않고 코레히도르 섬을 포기하고 이미 바탄반도를 오래전에 탈출하고 말았다.

일본군이 병력을 자바공격을 위하여 빼고 6,000의 부대로 공격하는 데에도 맥아더는 85,000이나 되는 병력을 좁은 곳으로 후퇴시켜 놓았기 때문에 오히려 많은 병력이 적은 병력에게 역으로 포위되는 꼴이 되었다. 맥아더는 결과적으로 자신이 말했던 병의 마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군에게 주고 만 격이 되고 말았다. 그는 많은 병력을 남겨두고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지휘관이 없는 병력은 오합지졸이 되고 만다. 도망을 못 간 미군은 허둥대다가 일본군의 포로로 되었고, 그 14,000의 포로는 「죽음의 행군」이라고 일컫는 일본군의 학대행군으로 반수 이상은 행군 중에 쓰러져 죽었다. 그 많은 부하를 이 꼴로 만든 장군을 과연 누가 명장이라 할 수 있겠는가.

머리에 엘리트의식으로 가득한 웨스트포인트 출신의 맥아더는 오직 출세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래서 세 불리하면 출세를 위하여 내빼고 식민지민중을 탄압하고 지배자로서 위엄만 부리는, 행세만 하는 장군일 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줄행랑을 친 맥아더는 1942년 3월 남서태평양전역 연합군사령관직을 맡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로 복귀했다.

그는 뉴기니에서 공격개시를 명령하여 1943년 1월 파푸아진군을 시켰고 미 태평양군은 영웅적 전투로 일본군을 몰아냈다. 미군은 1943~44년의 일련의 전투로 중남부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장악하고 필리핀으로 진군했다.

맥아더에 의해서 필리핀에 투입된 미군은 이 우매한 장군에 의해 발이 묶여 1945년의 7개월을 루손 섬의 진흙바닥에서 뒹굴도록 만들었다. 그가 인식하는 태평양전쟁은 그가 쫓겨난 필리핀이 미 식민지로 복귀하는 일 뿐이었고 거기에서 지배자로 되는 것으로만 보았을까.

그는 1944년 12월 육군 원수로 승진되고, 4개월 후 태평양지역의 미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서야 잠을 깼는지 비로소 사이판으로, 이오시마로, 오키나와로 올라오게 되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조선의 북부에서 조선인민혁명군과 북부 조선인민의 전민항쟁으로 조선해방의 최후결전을 하고 있을 때, 그는 북위 38도선과는 수천 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진 루손 섬에서 그리고 오키나와 섬에서 진구렁에서 죽탕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게 무조건항복을 했다.

이로써 우리 조선은 일제식민지통치로부터 해방되었다. 조선에 있는 일제의 모든 통치기관과 군대는 연합군에게 항복을 하게 되었고 북위 38도선 이남은 미군에게, 이북은 소련군에게 항복하고 무장해제하도록 얄타회담에서 결정되어 있었다.
전후 미국은 단연 다른 제국주의 열강을 제치고 최강의 제국주의로 되었다. 아직 일천하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동맹은 자기나라의 전후복구문제 이외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 소련이 원자폭탄을 가지고 있는 막대한 국력을 가진 미국의 주장에 대해 어찌 맞설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전후처리의 당면적인 문제는 미국의 의도대로 되는 수밖에 없었다.

38선문제도 그 무렵 우리나라에서 아직 수 천리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군대를 가진 나라가 바로 가까이 있는 나라에 대해 38선으로 경계를 삼아 주둔한다는 것은 분명히 도무지 이치에 당치 않는 처사이다. 미국은 당시 국력으로 이 비합리를 관철시키려고 했고 소련은 일본에 투하한 미국의 원자폭탄에 얼어 있었는지 그 비합리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수락하기만 했다.

이처럼 조선의 38선 분단은 미국의 억지주장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은 지금까지 60년 넘는 분단의 시초로 된 것이다.


3. 미군의 남조선강점과 맥아더

미제와 숭미 사대주의자 그리고 미제의 식민지통치의 교육정책을 충실히 받아들인 대부분의 이남 사람들은 조선의 8.15 일제 식민지해방을 연합군의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특히 이남은 미군의 점령을 미군의 승리에 의한 당연한 이치로 알고 그 자체를 해방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승의 영광 위에 빛나는 장군이 맥아더이고, 그래서 맥아더는 영웅이고 우리 이남사람에게는 일본을 내쫓은 해방의 은인으로 비치는 것이다.

이는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을 비롯해서 이남 땅의 역대정권에 의해 교육, 문화, 언론 등으로 조성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거짓된 환상이다. 사람들이 이 환상에서 깨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 환상 속에서 우리들 민중이 깨나기 위해서 맥아더를 이야기해야 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1945년 8월 15일이 되기 전에 이미 우리나라의 북부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결전과 전민항쟁으로 우리민족의 손으로 일제 통치기관을 파괴하고 식민지통치로부터 우리민족 스스로 해방되었고 각 지방에서 주권기관이 자연스레 터전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남은 사정이 좀 달랐다.

당시 조선총독인 아베 노부유끼는 이제 패망 후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받기 위해 시정권을 조선인의 대표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이를 위하여 부하인 정무총감 엔도를 시켜 처음은 송진우에게 교섭을 했지만 송진우는 친일신문인 동아일보 사장을 했던 자인지라 자신이 나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거절했다.

그러자 하는 수 없이 엔도는 조선 사람들에게 당시 이남에서 가장 존경을 받고 있던 독립혁명투사인 여운형을 만나 시정권 이양을 교섭했다. 여운형은, 정치범과 경제범으로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전원석방과 치안과 시정을 조선인에게 맡기고 간섭하지 말 것 그리고 가을추수까지 3개월의 식량배급의 확보, 이 3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이의 수락을 조건으로 이양받기로 했다.

여운형은 이미 일제의 최후의 날이 올 것을 예상하고 일제와 최후결전을 위한 준비로 지하비밀단체인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있었고 그 조직망은 전국적으로 망라되어 있었다.
여운형은 이 단체의 조직과 각 지방의 일제에게 절개를 팔지 않은 애국인사들로 하여금 「조선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를 조직하여 일제통치기관을 접수하고 치안대를 조직하여 치안을 확보하고 시정을 원활히 했으며 인민들의 후생을 담당했고, 당시 해방된 조국으로 물밀듯 들어오는 귀환동포의 원호를 원활히 했다.

그러는 한편 식민지해방 이후 일어나는 문제를 권위 있게 처결하기 위하여 나라의 주권기관을 건설해야 했다. 이를 위하여 각급 지방인민대표자를 선출하고 그 대표자회는 각급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 대표자를 보내어 1945년 9월 6일 서울 경기여고 강당에 회집하여 중앙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정강정책을 채택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그 이틀 후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에 들어왔다.

미군은 그 전날 7일에 전국 방방곡곡 조선 사람이 있을 만 한 곳에 비행기를 띄워 전단을 뿌렸다.

거기에는 미군이 일제의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를 하는 단순한 주둔군이 아니라 조선의 이남 땅을 점령하고 군정을 펴는 점령군임을 밝히고 있다. 그 포고문은 미합중국 태평양군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정말로 어처구니없었으나 소련도 어쩌지 못하는 원자폭탄을 가진 미군인지라 이에 항의할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더구나 그 포고문에는 일제 통치의 원상대로 일제관리가 그냥 복무하고 조선 사람들은 거기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래도 조선 사람들은 원수의 적은 우리 편이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일본의 적인 미국은 우리 편으로 생각했는지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다는 말을 듣고 미군주둔을 환영하려고 인천부두에 몰려갔는데 부두의 경비를 서고 있는 자들은 일본군이었다. 이 일본군은 질서를 잡는다면서 조선 사람들에게 실탄을 쏘아 여러 사람의 사상자를 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일제로부터 조선이 해방되는 사실을 말한 어떤 문건에서도 미군이 조선에 일제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하여 진주한다고 했지 점령하여 군정을 편다는 말은 없었다. 이에 대해서 북조선에 주둔한 소련군은 주둔군사령부라고 했지 점령군이라는 말도 군정청이라는 말도 없었다.

참으로 나라에 힘이 없으면 이런 꼴을 당해도 그냥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맥아더는 그의 부하인 하지를 점령군사령관으로 했고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라는 정식 이름을 달고 점령군으로서 군정을 폈다.

이와 같이 맥아더는 논리적 사고를 전혀 무시한, 그래서 바로 폭력의 논리, 따라서 깡패의 논리를 가지고 자기 자신의 지배욕과 미제의 패권주의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폭력의 무법자임을 스스로 나타내었다.


4. 6.25전쟁과 맥아더

6.25전쟁을 두고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가지고 사람들의 사상을 재단한다. 그 재단방식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승만 정권과 그 전통을 이어받은 역대 군사정권 그리고 민간정권이라 하는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이 선 이후 줄곧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2분법논리, 미군정이 들어와서 시작된 OX문제식 해답으로 하는 사상검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6.25전쟁을 남침이라고 하면 영락없이 국가보안법에 걸린다. 남침도 되고 북침도 된다고 하면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해서 취직도 안 되고 그래서 먹고 살기가 말이 아니다.

이렇게 길들여져 왔으므로 설사 그것이 틀리더라도 그릇되게 주입되면 그것이 바른 것으로 인식되어 머릿속에 콱 박히게 된다.

사실 6.25전쟁은 그 시작의 시점을 잡는 데 따라 북침도 되고 남침도 되는 것 같다. 당시 그처럼 38도선 상에서 일상다반사로 충돌이 있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발생된 그 시대의 상황을 분석해서 누가 전쟁을 도발했는가, 전쟁에서 이익을 보는 쪽이 누구이며 손해를 보는 쪽이 누구인가를 분석해서 어느 쪽이 어떻다는 정도의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맥아더의 6.25전쟁에서 역할을 알기만 하면 되므로 전쟁이 발생된 그 시대의 상황을 분석해보기로 하고 결론은 내리지 않기로 한다.

당초 미국은 남조선에 일제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하여 주둔한 미군을 점령군으로 탈바꿈하여 들어온 이상, 철수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더구나 일제의 항복과 무장해제 이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철수한다는 의사는 조금만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1947년 3월에 트루만이 의회에서 발표한 독트린을 보아서 명백히 알 수 있다. 미국의 대 소련 포위망 구축을 내용으로 하는 그 독트린에서 조선반도의 역할이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미ㆍ소공동위원회 사업을 파탄 냈으며, 전후문제를 취급하지 않는다는 국제연합의 헌장을 짓밟고 전후처리문제의 하나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한 조선 문제를 국제연합에 가지고 가서 남조선단독선거를 실시하고 남조선에 그들의 예속정권으로서 이승만 정권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를 반대하고 분단을 받아들지 않는 모든 세력들이 협상을 벌여 전 조선적인 대표자를 선출하여 비록 북조선에만 그 권위가 통하지만 명분상으로는 전 조선적인 정권으로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조국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기회 있을 때마다 북진통일을 부르짖고 북조선의 공화국은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통일하자고 호소했다.

이승만 정권은 남조선의 통일세력을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살인적으로 탄압하여 다스렸고 남조선 인민들은 줄기차게 자주통일을 위해 투쟁해왔다.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투쟁했으나 일부 세력은 무너졌지만 다른 일부세력은 2년 후 5.30총선거에 크게 진출하여 다음 2년 후에 있을 대통령선거에 이승만 정권은 무너지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바로 미제의 대조선반도정책의 실패로 귀결되고 미제는 조선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제는 전후복구에 의해 일시적으로 상승되던 경제가 하강을 맞고 있어서 경제회복의 기회를 만들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를 위해 지구 상 어디든 분쟁이 조성되어 군수산업의 경기를 되찾아서 경제회복을 도모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조선반도에서의 분쟁이다.

조선반도의 전쟁은 당시 38도선 상에서 항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충돌을 그 규모를 키우면 되는 것이다.

2년 후 권좌에서 쫓겨나게 될 이승만은 전쟁을 일으키는데 혈안이 되어 도쿄에 있는 극동군사령부로 날아가서 맥아더를 만났고, 워싱턴의 당시 트루만 대통령의 고문이고 나중에 국무성 장관으로 된 존 포스트 덜레스, 이들 3자의 연락이 빈번해지더니 덜레스가 1950년 6월 19일 남조선을 방문하고 국회에 연설하며 38선을 시찰하는 등 돌아가다가 1주일 만에 전쟁이 일어났다.

그래서 6.25전쟁은 이승만과 맥아더 그리고 덜레스 3사람의 작품으로 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맥아더는 호전가의 기질을 여지없이 발휘했다.

맥아더는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있는 미군을 즉시 동원하여 우리민족 내부문제에 무력으로 간섭하여 전쟁을 확대시켰다. 그는 스스로 조선에 날아와 공황상태로 허물어가는 국군을 그의 휘하군대로 받쳐 주고 이승만 정권의 명맥을 이어주었다. 이승만에게는 정말로 은인이었지만 북진통일을 부르짖는 분단의 원흉을 살려줌으로써 우리민족의 통일을 적극적으로 방해한 자주통일의 방해자로 되었다.


'Unews에 게재 2005.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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