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4일 목요일

국가로서 「대한민국」의 정통성

_____ 5.10단독선거(1948년)에서 제3회 국련총회(같은 해 12월)에 이르기까지


이 논문은 「씨알의힘사」 주최로 1986년 8월 3일, 도쿄(동경)에서 개최된 「몽양 여운형 선생 탄생백주년, 순의40년을 기념하는 강연회」에서 저자 매코매크 교수가 일본어로 강연한 것을 수록한 것이다. 텍스트는 잡지『씨알의 힘』제9호로부터 전재한 것이다.



1.

조선의 분단은 “종전”의 해, 1945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단이 화해 불가능할 만큼 틀어져버리게 된 것은 1948년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해가 미ㆍ소의 냉전이 조선민족의 내부적 항쟁으로 변전된 해이고, 그 과정의 일환으로서 국련이 조선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조선이 일제의 굴레로부터 해방되어서 3년째가 되는 이 해에 들어서자 문제는 점점 더 깊이 착잡해지고 회담으로써 해결할 가능성이 적어졌고 동시에 조선의 국토에서 전쟁의 검은 그늘이 엿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48년이라는 해는 조선으로서는 비극적인 해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문제와 관련해서 국련이 스스로의 원칙을 짓밟아버린 해였다는 점에서 세계로서도 비극적인 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냉전에 대해서 초연해야 할 국련이 미ㆍ소의 대립에 휘말려, 특히 조선문제를 둘러싼 2국간의 분쟁에 관여하게 되고부터 국련은 물러날 수 없는 궁지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로부터 2년 후에는 분명히 세계평화를 위해 만든 국제기관이 인류사상에서 희유할 만큼 비참한 조선전쟁의 당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국련이라는 국제기관이 이와 같은 행동을 한 일은 전무후무, 조선 이외에는 없습니다. 국련은 그 때문에 권위를 실추당하고 조선의 민족주의는 커더란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자신의 정부만이 조선반도 전역을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정통정부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1948년 12월,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국련총회의 결의문(195-III)에 있다는 것으로 일반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결의를 낸 국련이 조선문제에 관여할 권한이 있었던가, 그리고 관여 방법이 정당했던가, 「대한민국」이 정통정부라고 주장하는 그 「정통성」이 역사의 비판을 감당해낼 수 있는가 어떤가라는 것이겠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자료를 입수할 수 있기에 그 의문점을 해명하는 데 불편을 느낄 일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지금 내가 거주하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측의 자료 중에서 조선문제의 본질을 밝히는 데 만족할 만한 재미있는 사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에 근거해서 쓴 것이 나의 저서『Cold War, Hot War ____ An Australian perspective on the Korean War, Hale and Iremonger Pry Ltd., Sydney. 1983』입니다.

2.

조선문제가 미국의 동의(動議)로 국련에 들어간 것은 1947년 9월입니다. 법적으로 본다면 조선문제가 국련으로 이관되기에는 2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첫째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상회의(미ㆍ소ㆍ영)의 조선문제에 대한 결정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파기함으로써 비로소 조선문제를 국련으로 이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둘째는 국련 헌장의 제107조에서 「전후처리에 관한 분쟁」은 국련 안으로 가지고 가는 일을 금지하고 있는데, 조선문제야 말로 바로 일제의 패퇴로부터 생긴 전후처리문제이기 때문에 조선문제에 대해서 국련이 관여한다는 것은 바로 국련 헌장을 명백히 위반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문제가 안보이사회가 아니라 총회의 의제로 상정되었다는 사실은, 물론 안보리에서 소련의 거부권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작전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정당한 방식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고, 조선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더구나 조선민족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이 분명한 문제를 토론하는 데 어느 누구 한 사람의 조선사람도 국련총회에 초청되어 발언이 허용된 사실이 없었습니다.

1948년 이후부터 당하는 조선민족의 고통과 비극은 그 근본 시작부터가 조선문제에 대해 국련이 관여하는 데에 있다고 말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태가 여운형선생의 죽음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는 것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몽양 여운형선생이 흉탄에 쓰러진 것은 1947년 7월 19일이었고, 여운형 선생이 없어지면 선생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던 좌우합작위원회가 유명무실하게 되고 결국 해산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10월 6일), 좌우합작의 성공에 희망을 걸고 있던 제2차 미ㆍ소공동위원회도 할 일을 잃고 만 격이 되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10월 18일). 이어서 11월 4일, 국련총회(제2차) 정치위원회에서 「국련임시조선위원단」*(UNTCOK)의 설치를 요구하는 미국 안이 소련의 반대를 물리치고 가결하기에 이르렀고 뒤이어 조선의 비극적인 운명이 결정되어버렸다고 하겠습니다.

* UNTCOK는 「국련임시조선위원」라고도, 「국련임시조선위원」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
다. 본문에서는 저자는 전자를 썼지만 여기에서는 후자를 썼다.


3.

아무튼 조선문제에 대한 국련의 관여는 다음의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① 국련의 관여는 조선에 병력을 주둔하고 있는 2개국 중 한 나라만의 제안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한 나라는 이를 반대하고 있었다는 사실.

② 38도선 이남에 군정을 실시하고 있는 미국은 이미 거기에 강력한 반공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고, 국련의 관여가 미국의 기득권을 위협할 염려는 전혀 없었다는 사실.(1)

③ 대저 국련은 평화로운 세계질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고 특히 대국의 권리뿐만이 아니라 소국의 권리도 보호됨으로써 정의의 지배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전세계의 기대를 부여받아야 할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 국련이 미국의 지배 밑에 들어가 미국의 국익을 옹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략되고 말았다는 사실.

1945년 당시, 세계의 경제, 군사, 정치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감히 이에 도전할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국련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적어도 총회에서 투표는 미국의 뜻대로 조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무국 직원의 3분의 1 이상은 미국인이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2) 국련총회에 가지고 온 조선문제가 미국이 바라는 대로 요리되는 것은 물론이고, 앞서 말한 「국련임시조선위원단」을 두고 보더라도 그 인선이 당시 국련의 미국 대표인 존 포스터 덜레스의 개인적인 선호(preference)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것은 지금에야 두루 알고 있는 사실로 되어있습니다.(3) 동 위원단은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국(대만), 엘살바도르, 인도, 필리핀, 프랑스, 시리아의 8개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자주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어서 미국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나라는 인도와 시리아 2개국뿐이었습니다.

이 위원단이 조선에 도착한 것은 1947년이 저물어가는 때였습니다. 서울에 도착하자 곧 그들이 발견한 일은 위원단의 활동이 숙사와 사무실부터 비롯해서 이동이나 통신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미군정청에 의존되어야 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과 일제시대부터 토지귀족이었던 김성수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민주당의 세력은 미 군정청의 전면적 지원 밑에서 남에서 실질적인 권력으로 장악하고 있고, 게다가 그런 권력이 폭력과 협박이라는 수단을 통해 행사되고 있다는 것,(4) 그리고 이미 구축되어 있는 냉전구조로부터 배제된 중도 내지 좌파세력은 철저히 박해를 받고 있고 폭력으로 비합법화되어 투옥, 고문, 죽음, 도망 등으로 침묵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5)

위원단은 처음부터 조선전토에 국련의 위탁사항을 전혀 실행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국련이 나선다는 것만으로 둘로 분단된 나라의 모순이 일거에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 등은 처음부터 빤히 알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미국이 조선문제를 국련에 들여온 것은 소련과 같은 격으로 놓인 입장에서는 해결할 수 없고, 국련이라는 장소가 자기의 입장을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하는 토의로써 조선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공정권 이외의 것을 자기 나라가 점령하고 있는 남쪽의 지역에 인정할 작정이 전혀 없는 그들의 결의를 생각한다면, 당시 미국의 강대한 힘과 국련의 힘으로 조선의 모순을 해결하리라고 생각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그래서 국련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떠맡은 것이었습니다.



4.

앞에 말한 바와 같이 국련임시조선위원단은 미국의 선호에 따라 그 구성원을 용의주도하게 선발했지만 미국의 기대에 반해 동위원단은 남쪽만의 단독선거에는 반대했고, 그에 대한 「감시」를 도맡을 이유도 없다는 태도를 명백히 했습니다. 위원단의 단장은 인도의 K. P. S. 메논이었는데, 그는 “남쪽에 수립될는지 모르는 단독분리정권은 적어도 국련총회(제2차)의 결의에 근거를 가진 합법적인 전국정부(네슈널 가버멘트)는 될 수 없다.”라는 것이 위원단의 일치된 의견이라고 발표했습니다.(6)

이 말은, 조선의 여러 지도자들과 이야기를 한 결과 위원단의 태반이 자유로운 선거가 실시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서방의 일원으로 당연히 미국의 노선을 추종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짓궂게도 그 오스트레일리아가 미국에 대해 반대파의 선두에 섰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표의 잭슨 대령은 1948년 1월 29일, 서울에서 본국정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미국의 군정청은 친미우익을 지지하고 있고 그 이외는 공산주의자거나 적어도 그와 가까운 자로 취급하고 있다. 우리들이 인터뷰를 한 많은 지도자들은 우익이 경찰의 배경을 얻어 사태를 완전히 조정하고 있어서 자유로운 선거 따위는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 사실과 가까울 것이다."

그보다 이전, 즉 1947년 11월 11일, 주일 오스트레일리아 사절단 쇼우 씨는 본국정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실권이 잔인한 경찰의 손에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한국의 감옥은 지금 일본 통치시대보다 더 정치범으로 넘쳐나고 있다. 극우단체에 의한 정적에 대한 고문, 살육은 일상다반사로 행해지고 있고 이와 같은 불법행위는 널리 공인되고 있다. 미군의 G-2는 좌익을 억압하는 데만 열심이고 그들의 한국인 앞잡이들이 어떤 수단을 취하건 단속할 생각은 없다."



5.

미국이 조선문제에 대해 국련이 관여하도록 강력하게 추진한 것은 이승만 친미단독정권에게 정통성의 이미지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 마디 말로 끝낼 수 있지만, 그러한 목적에 따라 설치된 국련임시조선위원단의 역할이 미국의 대한정책을 옹호하고 미국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조선을 위해서도 세계를 위해서도 비극적인 것이었습니다. 소련은 위원단이 북에 들어와 국련소총회의 지령에 근거해서 활동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만, 미국의 공산주의 박멸운동에 소련과 북조선이 협력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국련은 분단의 해소라고 하는 조선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불가능하도록 하는 역할을 떠맡게 된 것입니다.

1948년 2월 5일, 서울에 있던 임시조선위원단은 소련이 38도선 이북에서 위원단이 활동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상황 가운데서도, 역시 남쪽만의 선거 실시를 용인하고 단독정권수립하는 데에 손을 빌려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지시해주도록 국련소총회에 요청함과 동시에, 사태를 설명하기 위하여 단장인 메논을 소총회에 파견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국련의 미국 대표단과 함께 전 직원은 소총회가 남쪽만의 단독정권수립에 찬성하는 결정을 내리도록 각 대표에 대해 직접적인 압력을 포합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도록 명령했습니다.(9)

이러한 미국의 압력은 마침 소총회가 열리고 있었던 2월 중순에 체코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서 공산정권이 수립된 사실로 보다 쉽게 효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체코에서 공산주의가 이겼다면 조선에서는 절대로 이기지 못하도록 손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10)

국련임시조선위원단에 대해 남쪽만의 단독선거 실시를 인정하도록 하고 또 그것을 감시하도록 요청하는 미국의 제안을 표결한 것은 1948년 2월 26일이었습니다. 소련권의 보이콧 속에서 강행된 이 표결의 결과는 찬성 34, 반대 2, 기권 11이었는데, 반대의 2표가 미국의 동맹국이고 더구나 위원단의 구성원인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였다는 것, 기권 11표 가운데는 전통적으로 미국의 외교정책에 추종해왔던 라틴아메리카의 3개국(컬럼비아, 파나마, 베네수엘라)와 북구 3개국(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기억해둘만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소총회가 이 결의안이 채택한다는 것은 조선을 영구히 분단할 뿐 아니라 장차 세계평화를 크게 위협할지도 모르는 잘못된 방책이라는 것을 내심으로는 겁을 내고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단독선거에 대해서 일관되게 반대해왔던 위원단의 단장 메논 씨가 돌연히 태도를 바꾸어 소총회에서 찬성표를 던진 사실에 대해서 한 마디 해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K. P. S. 메논 씨는 그 후에 쓴 자서전 가운데, 조선임시위원단 단장을 맡았을 그때가 외교관으로서 재임했던 전 기간을 통해 “머리 속에 있는 이성(理性)이 자기의 심장에게 완패 당한 유일한 사례였다.”고 술회하고 있는데, 메논 씨의 심장을 꽉 잡은 여성은 바로 한국의 유명한 여류시인 마리안 모(毛允淑)이었습니다.(11)

정경모(鄭敬謨) 씨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메논과 모 사이의 「우정관계」는 자연발생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이승만이 생각한 술책에 모윤숙이 동의한 결과였던 것 같은데, 아무튼 메논 씨 자신의 고백으로부터 보더라도 단독선거를 반대했던 그가 돌연히 찬성 쪽으로 돌아버린 것은 모윤숙의 애원과 설득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조선민족으로서는 참으로 불행했던 이런 에피소드는 어떻게 사소한 우연에 의해 한 민족의 역사의 방향이 결정되는가를 아주 적절한 예로써 제공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6.

앞서 말한바와 같이, 2월 26일의 표결에 근거해서 국련소총회는 서울에 주재하고 있는 임시조선위원단에게 남쪽만의 단독선거의 실시를 진행시켰고, 또 이를 「감시」하도록 지령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그것으로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지령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는 의연히 단독선거에는 반대였고 남북 각각의 대표가 동의할 때까지는 최종적 결론은 보류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3월 11일, 단독선거의 가부를 두고 임시조선위원단으로서의 표결이 현지 서울에서 실행되었습니다. 이 표결에서 프랑스와 시리아는 기권을 했습니다. 결국 중국(대만), 엘살바도르, 필리핀, 거기에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인도의 6개국이 어떤 태도를 나타내는가에 따라 조선의 운명이 걸려 있게 된 것입니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2개국은 반대입니다. 대만, 필리핀, 엘살바도르 3개국은 미국이 제안한 것은 어떤 것이든 찬성하는 나라입니다. 문제는 인도가 어떻게 나오는가라는 것입니다. 만일 인도가 반대표를 던진다면 지령은 소총회로 반려되고, 적어도 「국련이 승인하고 감시했다」는 명분을 치켜든 단독선거는 불가능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미국은 단독선거를 강행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되었더라면 전쟁은 없었을는지도 모르고 「국련군」이 조선전쟁에 출동하는 일은 물론 없었을 것입니다. 남북통일의 문제가 오늘날과 같이 곤란한 상황으로 빠지고 마는 일도 없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인도를 대표하는 메논은 소총회의 지령에 따르는 데 찬성표를 던져서 단독선거는 4 대 2의 다수결로써 결정된 것입니다.(12) 메논의 이 투표가 그의 비극적인 여성관계로부터 생긴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메논 자신은 공무에 대한 이처럼 명백한 배임행위를 변호하면서 자서전 안에 “그것은 아무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역사가로서 본 바로는 그의 행위의 중대함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더구나 그 결과는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편 모윤숙 쪽은 아마 메논과의 관계로부터라고 하겠는데 국련에서 한국대표를 맡고, 국회의원, 예술원 회원, 펜크럽 한국본부 회장을 역임하는 등 화려한 생애를 보냈으며, 그녀가 자서전 풍으로 쓴 「잊지 못할 메논 위원장과 나의 우정」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우리들의 우정은 미묘한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만일 나와 메논 위원장 사이의 우정이 없었더라면 남쪽만의 단독선거는 없었을는지도 모르며,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오늘의 한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13)

창건 당시에 대한민국의 이러한 반영웅적(反英雄的)인 이야기와 그 불행한 유산은 오늘까지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7.

그런데, 단독선거를 감시한다는 감시위원단의 결정은 이상 본 바와 같이 아슬아슬한 차를 가지고 다수결로써 결정되었지만 그것은 또한 엄중한 조건이 붙은 것이었습니다. 그 조건이란, 「언론과 집회에 관한 민주주의적인 권리가 완전히 보장된 분위기 속에서만」 위원단은 감시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었습니다.(14)

그때에 이르러서도 오스트레일리아의 예상은 잭슨 씨의 말을 빌리면 “단독선거는 극우파를 제외한 모든 정당으로부터 보이콧 당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15) 임시조선위원단의 최종 표결이 있었던 당일, 이승만을 제외한 남쪽의 가장 저명한 지도자들은 북조선의 김일성에 대해서 민족문제를 토의할 남북회담의 개최를 제안했습니다.(16) 위원단 안의 반대파는 사태가 단독선거로 기울은 이 최종단계에 이르러서도 남북회담 개최를 환영하고 조선의 분단을 영구화하지 않을 해결책을 계속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는 단독선거의 강행은, “현명함이 결여됨과 아울러 동시에 제2차 국련총회의 결의를 짓밟는 것이고, 첫째로 남쪽에서 공평한 선거가 실시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라는 의견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캐나다 대표 바터슨)(17) 이에 대해 미 군정청의 하지 중장은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이와 같은 의견은 “소련에 대한 유화(宥和-appeasement)를 나타내는 것이며”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가열한 냉전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무지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면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18) 특히 캐나다 대표에 대해서는 “소련과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일에서 나는 그 사람처럼 열심인 사나이는 과거 수개월 사이에 만난 일이 없다.”라고 하는 비난마저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한편 오스트레일리아 대표단의 잭슨 씨는 3월 13일자로 다음과 같은 보고문을 제출하고 단독선거에 대해 반대를 표명했습니다.

"본 위원단 분과위의 인터뷰에 응해준 24명의 조선의 정치지도자 중 북측이 협력을 거부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단독선거라도 어쩔 수 없다고 진술한 사람은 9명. 나머지의 11명은 반대이고 4명은 의견을 보류했다. 이 24명의 대다수는 우파에 속한 사람들인데 그것은 좌파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우리들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들 사람들은 서면으로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는 취지의 의견을 표명해왔다. 요컨대 우파 정당 가운데 가장 무게를 가진 김구의 한국독립당, 중도좌파의 모든 온건파, 게다가 좌편향의 극좌 그룹은 예외없이 남쪽만의 단독선거에는 반대하고 있다."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의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압력은 바로 강경 일변도였습니다. 캠벨러의 오스트레일리아정부는 국련의 지원없이도 미국은 이래저래 단독선거를 강행할 것으로 생각하고 단독선거에 그 이상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선거가 독립국가의 국회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국련이 남북을 포함한 전 조선의 문제를 해결하는 모색과정에서 협의대상으로 될 수 있는 자문기관을 만들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확하게 해두었습니다.(21) 메논 자신이 선거는 단순히 자문기관을 도입하기 위한 것이고 결코 단독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고, 이것이 2월 13일의 임시조선위원회에서 전원일치로 된 사실임을 명백히 해두고 있습니다.



8.

그러나 이러한 제한조항 따위는 미국이 개의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해서 반대 측에 선 나라는 미국의 하는 짓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가를 통감했다고 하더라도 맞바로 미국을 비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군정청은 위원단의 염려를 달래기 위하여 「그저 그런 정도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보이기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3,140명의 정치범을 석방하고 그들에게 선거권을 준 것은 그 중 하나였습니다.(23)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위원단은 위원단의 시찰반이 4월 5일부터 10일간에 걸쳐 실행한 6일간의 조사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습니다.

"시찰반은 극좌파 그룹과는 접촉이 이루지지는 못했으나 인터뷰에 응한 다른 저명인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선거를 반대한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들의 염려는 남쪽만의 단독선거가 남북의 분단을 고정시킬 것이고 그러한 선거에는 협력하지 않는다는 것이 의론의 초점이었다."

조선위원단이 부닥친 국련선거에 대한 이와 같은 원칙적 반대는 미 군정청에 의한 개혁이나 보장으로는 ____ 그것이 어떠한 모양으로건 ____ 반론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선거를 약 2주일 앞에 둔 4월 28일, 국련조선위원단은 남쪽의 정치적분위기는 「그저 그런 정도의 자유로웠고」 따라서 선거에 대한 감시의 역할을 맡는다.」는 결의를 5 대 3으로 가결했습니다. 이 결의가 이루어진 바로 그때 제주도에서는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4. 3인민봉기가 한창때였고 로버츠 중장이 이끄는 한ㆍ미군의 무참하기 이를 데 없는 살육이 전개되고 있었다는 것도 덧붙여 두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 당시의 조선의 분위기가 「그저 그런 정도의 자유로웠다.」(2 reasonable degree atmosphere)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튼 반대표를 던진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의 대표는 이 단계에 이르러서도 아직 체념하지 않고 치연작전을 벌여 여운형 선생의 생전의 동지였던 김규식을 방문하여 북측의 지도자와 회담하기위하여 평양을 찾을 수 있도록 작용을 했습니다.



9.

선거는 5월 10일, 좌파와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우파 민족주의 진영의 보이콧 속에서 강행되었습니다. 이 선거에 관해서는 적어도 3가지 점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첫째는, 국련에 의한 이른바 「감시」라는 것은 실제로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거 때의 분위기는 대체로 「자유로운 것」이라고 일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조선위원단 자체가 이 선거가 「국민정부」(national government)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첫째의 점, 즉 「감시」는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 ___ 미군의 점령지역, 즉 현재의 한국은 10만 평방킬로미터의 면적을 가지고 당시 2,000만의 인구를 안고 있었습니다. 조선위원단은 각국의 대표와 사무원을 포함해서 총원 30명을 넘은 일이 없었고, 이 인원으로 전국에 걸친 일반선거를 감시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1935년에 실행된 자르지방의 국민투표에는 1,000명, 같은 해의 니카라과의 선거에는 775명의 중립인 감시원이 동원된 사실을 상기한다면 1948년의 한국에서 실시한 선거의 「감시」가 어떤 것이었다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26) 게다가 당시의 국련 사무총장 리이가 말한 바와 같이 감시반이 이동하기 위한 교통수단은 전면적으로 미군에 의존하고 있었고 미 군정청이 보이고 싶지 않은 곳에 감시반이 나갈 수가 없음은 명백합니다.(27) 사실상, 국련임시조선위원단의 감시반은 미 군정청이 지정한 겨우 몇 군데를 잠시잠간 얼굴을 내민 것뿐이고, 그렇게 얼굴을 내민 투표소는 전체의 2%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감시」라고 말할 것이 못됩니다.

둘째의 점은, 「자유로운 분위기」 가운데 선거가 실시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___ 한국의 경찰 발표조차도 3월 하순부터 선거가 실시된 5월 10일까지 589명이 살해되고, 10,000명 이상이 검속되었습니다.(28) 조선위원단의 보고는 한국 측의 부당행위라고 보아야 할 수많은 사건을 열거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독자적인 조사는 실행하지 않았습니다.(29) 투표소는 경찰 또는 예비대에 의하여 포위되어 있고 선거를 관리하는 임무는 특히 그것을 위해 미군에 의해 조직된 준경찰조직인 향보단(鄕保團)이 가세하고 있었습니다.(30) 오스트레일리아정부는 이와 같은 선거로는 「만족한다는 뜻을 도저히 나타낼 도리가 없고 경찰의 압력을 나타내는 수많은 증거를 발견했다.」고 발표했습니다.(31)

셋째의 점은, 단독선거가 정권수립을 위한 것이었는가라는 점에 대해서 ___ 국련조선위원단의 구성원 중 어느 누구도 이 선거에 의해 국회가 구성되고 남쪽만의 단독정권이 생겨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이것은 조선반도의 1구역 내의 지방선거로 생각하고 있었고 이 선거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은 단지 자문기관이고, 그 이상의 것은 아니라고 하는 점에서 전원이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32)

선거를 합법적이었다는 사실을 승인하라는 미국의 압력이 가해지는 속에서 위원단의 토의는 7주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만, 그러나 결론에 이르지를 못했습니다.(33) 그러던 중 시리아의 대표가 팔레스티나문제로 위원단에서 물러나고(5월말), 오스트레일리아 대표가 병으로 입원하는 일이 있어서(6월 24일)(34), 6월 25일에 위원단은 이른바 ‘말썽꾼이 없을 때 일 친다’고 “이 선거는 동위원단이 출입가능한 조선의 부분에서 선거민의 적법한 자유의사의 표현이었다.”라는 결의를 가결했던 것입니다.(35)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그리고 인도의 정부는 각각 개별적으로 이 선거 결과로 생겨난 서울의 정부는 1947년, 제2차 국련총회 결의문(112-II)이 생각하는 전 조선의 「국민정부」(national government)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을 미국정부에 대해서 명백히 밝혔습니다.(36) 국련임시조선위원단은 그 후 뉴욕으로 철수하여 다시 20회에 걸친 토의를 거듭했습니다만 위원단이 감시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견해 차이를 끝까지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37)



10.

그러나 조선위원단은 자신들이 「감시」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승만과 미국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선거에 당선된 「의원」들은 서울에 「국회」를 설치하고, 다시 「국회」가 「헌법」을 제정한 다음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이것은 그해 7월부터 8월에 걸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즈음 이승만은 얼굴 두껍게도 자기는 국련조선위원단의 결정에 근거해서 행동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물론 사실이 아니고 위원단의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이 이가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행세하는 일에 동의해준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8월 12일, 5.10선거로 성립된 기구는 이것을 일국의 국회로 인정하고 그로부터 생겨난 정부는 제2차 국련총회 결의문이 요구한 전 조선의 「국민정부」로 승인할 것을 선언했습니다.(38)

그러나 일이 여기까지 이르러서도 캠벨러의 오스트레일리아정부는 이러한 미국의 주장에 동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8월 15일(1948년)에 거행된 「대한민국」의 건국선언의 식전에 국련조선위원단의 자국대표(A. B. 제이미슨)의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39)

미국은 사방팔방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반대를 넘어가려고 국련에서 맹렬한 로비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파리에서 제3차 국련총회에서 그 후의 조선의 운명으로서는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결의안이 얄궂게도 오스트레일리아 대표(J. 프림솔)에 의해 제안되었습니다. 이 결의문은 그 자신과 미국, 대만의 대표 3자에 의하여 기초된 것입니다.(40)

이 결의안은 그 후 12월 12일에 채택되었는데(195-III), 그러나 이것은 선거결과로 남북을 통한 국민정부가 수립되었다는 따위를 승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바는 「임시위원단이 감시할 수 있었던 조선반도의 부분에서 유효하게 관리하고 통괄할 수 있는 합법정권이 수립되었다」는 것, 그리고 「조선에서 이러한 종류의 정권으로서는 이것이 유일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41) 국련총회의 이 결의문을 근거로 해서 “「대한민국」이 국련에 의하여 부여된 정통성의 이유로 한반도 전역을 지배해야 할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되고 있는데, 아무리 번잡한 말로 씌어 있다 하더라도 이 결의문은 그러한 사실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때까지 보아온 바와 같이 오스트레일리아는 미국의 대조선정책에 반대해왔던 중심적인 나라였지만 이상과 같은 번잡한 표현으로 말한 국련총회에 대한 결의문의 제안자가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대표였다는 것은 짓궂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반대의 중심이었던 나라가 지지 쪽으로 돌아버린 것은 미국으로서는 정말 기분좋은 일임에 틀림없겠습니다. 1948년 당시, 동서 어느 진영에건 속하도록 두 초대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압력은 지극히 컸으며 동서를 불문하고 힘있는 것을 섬기는 사대주의는 공통이었고 유독 오스트레일리아만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국련총회의 마당에서 사회주의 여러 나라가 전개했던 여러 가지 의론도 압도적으로 찬성 받은 국련임시조선위원단이 실제로 제출한 보고서의 내용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는 것도 한 마디 덧붙여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토론에 상정되지도 않았고 무시되기만 했습니다. 북조선의 대표를 국련에 초청하여 그들의 의견을 청취해야 한다는 제안도 미국과 그 지지그룹에 의하여 전면적으로 거부되었습니다.

조선민족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이 제3차 국련총회의 결의문은 이상과 같이 격렬하게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 채택에서 투표는 이른바 사령관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병졸들에 의하여 결행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11.

1948년의 이 결의문은 그 2년 후인 1950년에는 미국이 국련의 사무총장 트리구브 리이의 적극적 지지를 얻어 다른 나라들을 움직여 국련의 「기치」를 쳐들고 조선전쟁에 참전하는 법적 근거로 되었습니다.(42) 조선민족에게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참화를 가져온 이 전쟁이 「침략자에 대한 국련의 경찰행동」이라고 선전되고 있는 것은 국련 자체의 권위와 역사를 보더라도 비극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1965년 6월에 채결된 한ㆍ일기본조약은 그 제3조에서 「대한민국이 국련총회 결의문 195-III에서 명백히 나타내고 있는 대로 조선에 있는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라는 것이 확인된다.」라고 씌어 있어서, 허구의 위에다 또 허구를 쌓아올리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일본이 북조선과 적대하는 한편 한ㆍ일유착의 관계를 심화시킴으로써 남북의 대립을 부채질하고 조선의 통일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도 「국련총회 결의 195-III」가 그 애당초의 원인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며, 국련이라는 조직이 조선민족에게 가져다준 불행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지금에 와서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48년이라는 해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국가의 자립, 국련에서 정의와 평등이라고 하는 이념이 서서히 포기되고 있었고 그 대신 미국에 대해 무조건적 지지해주는 노선이 채용되기 시작한 해였습니다.(43) 오스트레일리아는 초대국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의 전쟁의 발생과 분단의 고정화라고 하는 그 뒤에 되어가는 결과에 중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나라, 그리고 그밖에 많은 나라가 국제문제를 생각할 때 정상적인 법의 규범과 도의의 감각을 회복하고, 「보호자」로 행세하는 초대국의 생각대로 추종할 것이 아니라 개개의 나라 각각의 주장과 이익이 관철되도록 하지 않으면 냉전체제와 냉전사고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문제의 해결은 냉전적 사고와 냉전적 대결의 해소와 불가분리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2가지 문제는 동시적으로 해결될 수밖에는 없고, 이렇 해서 조선문제가 해결될 때 국련은 1945년 창립당시의 원래의 이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민주노동당 양주시당부 간부 연수회 강연 초


안 재 구

2008. 11. 22



1. 나는 무엇인가.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갈 때 문득 내가 무엇인가, 그리고 삶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납니다. 부모를 잘 만나서 먹고 사는 데 걱정이 없고 삶이 힘들지 않은 사람들은 그 삶을 즐기느라고 이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별로 없겠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일해서 자기 삶을 스스로 영위할 때가 되면 이런 생각을 안 해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특히 요즘과 같이 삶이 고되고 세상이 어지러워질수록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삶에 대한 문제가 더욱 절실해질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혼자 하늘에서 뚝 떨어졌거나 땅에서 불쑥 솟아난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생명을 이어받아 부모와 형제자매로 구성된 가족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받아 자라고 일가친척들의 도움과 우애로 외롭지 않게 살게 되며, 이웃 사람들과 유무상통하면서 서로 친교를 하는 가운데서 배우고 자라 성인이 되며, 그래서 장차 또 하나의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창조하고 인생을 살면서 역사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가족공동체 안에서 부모로부터 생명을 이어받아 태어났고, 사회라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 안에서 사람의 삶을 배우고 일하며 더욱 나은 삶을 영위해나가기 위한 물질적 정신적 재화를 생산하며 창조하고, 이들 재화를 삶의 수단으로 해서 살아나갑니다.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그 안에서 재화를 생산하고 소비하여 삶을 영위하며 그 삶의 방식과 슬기를 더욱 발전시키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들의 집단을 사회라고 합니다.

사람은 부모로부터 육체적 생명을 이어받아 가족공동체 안에서 그 구성원의 사랑을 받고 자랍니다. 그리고 더 넓은 사회라는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자질을 배워서 스스로 생산하는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도록 성장하여, 마침내 한 사람의 온전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집단으로서의 사회는 처음부터 지금과 같이 나라라는 민족공동체와 같은 완전한 집단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은 가족공동체라는 혈연적 집단에서 출발했고, 더욱 큰 규모의 생산을 위하여 혈연적 관계를 가진 여러 개의 가족공동체의 연합으로 씨족공동체로 발전했으며, 더욱 큰 규모의 집단적 노동이 필요한 농업생산으로 발전하자 거기에 걸맞게 가까운 씨족공동체들이 연합하여 더욱 큰 규모의 사회로서의 부족공동체로 발전했습니다. 부족공동체의 사회에서 농업생산의 규모가 터 잡게 되고 발전됨으로써 부족을 넘는 더욱 더 큰 규모의 공동체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로써 더욱 많은 잉여생산물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욱 많은 잉여생산물을 위하여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고 이를 위하여 다른 부족공동체를 습격하고 그 생구를 노예로 삼고 또 한편 공동체의 규범을 어긴 죄인과 더불어 노동생상에서 소외되고 오직 착취만 당하는 노예계급이 발생했으며, 노예계급을 지배하여 더욱 많은 잉여생산물을 차지하는 노예주와 그 지배체제에 속하는 신관, 관리와 귀족, 제왕 등의 지배자계급들로 구성된 인류최초의 계급사회인 노예제사회가 나타났습니다.

노예제사회는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강제수단으로 법률제도와 이를 집행하고 옹호하는 무력을 가진 권력이 생겨났습니다. 그 법률에 따라 왕, 관료, 제관, 장군 등 지배계층구조가 생겨났으며, 착취제도가 법률적으로 보장되고 합리화되는 역사상 최초의 국가가 발생한 것입니다.

국가는 그 통치권이 미치는 영역이 확정되며, 핏줄이 같고,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삶의 형식과 슬기, 즉 문화의 공동성을 가진 인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같은 핏줄, 같은 말, 같은 땅이라는 공통성으로부터 민족이라는 공고한 집단의 구성체로서의 민족공동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우리민족은 대동강 연안의 비옥한 농경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최초의 민족국가로서 생겨났으며 그 이름을 조선이라 했습니다. 최초의 민족수장으로 단군왕검이 있었으며, 다른 민족과 구별하여 아사달, 배달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 영역이 둘레가 7천리, 남으로는 반도 전체와 북으로는 할아빈 일대까지, 동으로는 산해관 너머 지금의 북경지역까지, 서로는 연해주까지 이르는 광대하고 강성한 고대국가로 발전하였습니다. 사회는 노동을 착취하는 지배계급과 노동을 수탈당하는 피지배계급으로 나누어진 최초의 계급사회인 노예제사회였으며, 문화는 청동기문화로 그 비파형 동검은 우리민족의 최초의 표징으로 되었습니다. 신지문자로 찬란한 문화를 이루었고, 강력한 기마군대로 주변 여러 나라를 복속시켜 동북아시아의 강성한 나라로 번영했습니다.

우리들은 바로 이 단군조선의 핏줄을 이어받아 찬란한 문화전통을 창조하면서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민족국가의 자랑스러운 성원인 것입니다.


2. 찬란한 문화로 이어온 민족의 성원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의 해답은 인간의 삶의 본질, 삶의 목적과 의의, 생활의 보람과 가치, 참된 삶을 누리기 위한 방도로부터 나옵니다. 이러한 문제는 세계와 인간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한 견해와 관점으로부터 나옵니다. 이를 인생관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관은 본질적인 것으로 철학의 문제로 되겠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해명함으로써 철학의 본래 사명을 다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와 관점 그리고 입장, 즉 인생관은 시대가 바꿔짐에 따라 변화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자주의식과 창조적 능력의 발전정도, 사회제도의 성격,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조류들과 도덕, 생활양식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대와 중세에는 주로 종교가 사람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에 따라 그 시대의 인생관에서는 일반적으로 종교적 색채가 강했던 것입니다. 혹독한 억압과 고통 속에서 올바른 철학의 영향을 받을 수 없었던 당시의 민중은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 것으로 스스로를 달랬던 것입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돈으로 계산되고 사람의 인격마저 돈에 의하여 평가되는 개인주의적 인생관이 지배적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자본주의의 첨단인 미국이 퍼뜨린 세계관으로 실용주의(‘인간에 유용한 것만 가치가 있다는 것’이라고 하는 사상조류)와 물질만능주의가 있고, 이러한 삶을 위해 애쓰다가 실패한 패배주의자들이 빠지고 마는 실존주의(인간은 홀로 고독한 존재이며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허무주의철학), 쾌락주의(살아있을 때가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철학)도 있습니다.

인생은 오직 한번만 살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오직 한번 사는 ‘일생’을 보람되게 살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이 가지는 너무나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요구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생을 살기 위하여 먼저 우리 자신, 즉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3. 사람의 본질적 속성

사물은 그것이 그것이게끔 규정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본질적 속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본질적 속성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자주성입니다. 자주성은 ‘세계의 주인으로 그리고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의 사회적 속성’입니다. 사람은 자기 주변의 세계에 있는 그대로 따르지 않고, 도구를 만들어 개조 변혁함으로써 다른 생명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더욱 고등한 생명체로서의 사람으로 되는 것입니다.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세계를 개조 변혁하는 자주성은 세계에 대한 주인으로서 세계에서의 사람의 지위를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주성을 쟁취하는 사람의 활동은 크게 자연에 대한 투쟁(노동), 사회에 대한 투쟁(민족적ㆍ계급적 억압과 예속을 비롯한 온갖 사회적 구속과 예속을 없애기 위한 변혁과 건설의 투쟁), 그리고 인간의 의식에 남아 있는 비자주적인 사상을 일소하기 위한 사상투쟁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구속과 압박을 거부하고 이 세 가지(자연ㆍ사회ㆍ인간 자신)의 자주성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서는 것은 자주성을 생명으로 하는 참된 사람의 본성입니다.

둘째, 창조성입니다. 창조성은 ‘자주적 요구에 맞게 목적의식적으로 세계를 개조하고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입니다.

‘인간이 창조성을 가졌다.’는 것은 ‘창조적 능력(지혜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성은 세계에 작용하는 인간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셋째, 의식성입니다. 의식성은 ‘세계와 자기 자신을 파악하고 이를 개조 변혁하기 위한 모든 활동을 규제하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입니다.

의식의 내용에는 지식과 사상의식이 있는데, 지식이 주위세계에 대한 합법칙성을 아는 것이라면 사상의식은 자기의 이해와 요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사상을 자기의 철학으로 가졌느냐’ 에 따라 사람은 이렇게도 움직이게 하고 저렇게도 움직이게 합니다.

사상의식 중에서도 자주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노동자와 민중의 철학인 자주적인 사상의식은 사람을 각성시키고 그래서 더욱 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결정적 요인인 것입니다.


4. 인간의 속성은 천성적인 것인가, 사회적인가.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이 인간을 주위세계와 근본적으로 구별 짓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하여,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인간의 속성은 천성적인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나라 속담에 ‘자식은 겉을 낳지 속은 못 낳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식의 육체는 낳지만 그가 지니게 될 지식ㆍ인품ㆍ사상 같은 사회적 속성은 낳지 못한다.’ 는 뜻입니다.

인간의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은 자연이 인간에게 준 생물적 속성이 아니라 사회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발전되어온 사회적 속성입니다. 사회적인 교육과 실천을 통하여 자주적인 사상의식과 창조적인 능력이 배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와 완전히 단절된 인간은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할 수 있고 사회적 속성을 가질 수 있는 생물학적 바탕 즉 발달된 육체구조를 가진 유일한 존재입니다. 고도로 발달된 뇌수, 보행기관에서 해방되어 노동의 기관으로 바뀐 손, 언어를 소통할 수 있는 후두구조와 같이 인간의 육체기관은 다른 생명물질이 가질 수 없는 사유의 기능과 의사교환의 기능, 노동의 기능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육체기관은 인간의 속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물질적ㆍ생물학적 기초일 뿐입니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본질적 속성은 그 형성에서부터 사회적 산물이며 그 내용과 수준이 역사적으로 변화ㆍ발전하는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떳떳한 사회적 존재로 살며 발전하려면 사회적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생명, 즉 사회ㆍ정치적 생명을 가지고 사회생활, 사회적 실천에 적극 참여하여야 합니다. 자주성을 위한 투쟁에 적극 참여하는 길에서만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은 더욱 강화ㆍ증대될 수 있습니다.

인간을 ‘고독한 개체’ 로 묘사하면서 집단 속에 들어가면 인간개성이 ‘말살’되고 ‘평균화’된다고 하며 인간들에게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 것을 역설하는 온갖 부르주아사상(특히 실존주의에 이런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이 노리는 것은, 사람들을 민족ㆍ민중이라는 집단과 그것이 처해진 현실에 등을 돌리고 무위도식하는 속물로, 사회도 민족도 모르고 오직 개인의 생물학적 생명만을 위해 사는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려는 것이며, 지금 한창 고양되고 있는 자주ㆍ민주ㆍ통일과 노동해방을 통한 새 사회 건설투쟁을 어떻게 하든지 막아 보려는 데에 그 속셈이 있는 것입니다.

본질적 속성으로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헌신성을 가집니다. 사람들의 가장 작은 공동체로서 가족공동체에서는 부부ㆍ부모ㆍ형제자매 사이의 자기희생적인 헌신성이 있습니다. 사회적 관계로부터 생겨나는 모든 공동체에서도 그 공동체의 이상이 잘 구현되려면 공동체의 성원이 그 공동체의 이상실현을 위한 헌신성이 담보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공동체에 대한 자기헌신성으로부터 발현하는 정서를 우리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헌신적인 정서로서의 사랑으로 그 공동체의 공고한 단결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대한 헌신성의 정서로서의 사랑은 아주 강렬해서 주어서 기쁘고 보람을 느끼는 정서로서, 특히 가족이나 앞으로 창조될 가족공동체의 주체로서의 남녀 사이에서는 매우 강렬하게 발현됩니다. 한편 특히 민족공동체는 그 흥망성쇠의 운명이 성원의 운명과 함께하는 운명공동체로서 그 성원의 강렬한 생명력으로서의 애국심을 발현시켜 줍니다.

사회혁명ㆍ민족혁명이라는 운동의 전위조직이라는 공동체의 성원들 사이에는 동지애라는 가장 의식적이고 가장 강렬한 자기헌신의 정서가 발현됩니다. 동지애는 자기의 혁명이상이 동지의 혁명투쟁으로 담보되고 자기의 혁명투쟁이 동지의 혁명이상을 담보시켜주는 데에서 발현되는 것이며, 그 정서가 사상의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서로 생명을 주고받는 가장 숭고한 사랑으로까지 발현되고 있음을 우리는 혁명투쟁의 역사에서 봅니다.


5.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의 높이와 질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그래서 인간다운 가치를 발휘하는 삶, 즉 인간다운 삶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에 맞는 삶, 그것을 더욱 증대시키고 빛내어 가는 삶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민족의 민중으로서, 노동자로서 살아가는데서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삶은 어떤 삶이라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앞서 인간을 둘러싼 모든 예속과 착취, 억압과 압박에 맞서 그것을 우리의 요구대로 지배ㆍ개조하는 것이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삶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을 옥죄는 억압ㆍ예속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너무나 많습니다. 많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을 말하자면 아마 이런 것들이겠습니다.

장시간의 힘든 노동, 직장에서의 비인간적인 대우, 사회의 싸늘한 냉대, 넉넉하지는 못한 생활, 충분한 휴식과 문화생활을 누리기 어려운 시간적ㆍ경제적 제약.

더 나아가서는, 정치적으로는 무권리, 정치는 노동자와는 무관하게 몇몇 정치꾼들이 차지, 사회는 점점 물질만능ㆍ극단적 개인주의, 나 자신도 점점 그렇게 변해 가는 것 같고.

이런 상황을 벗어나고자 조금만 투쟁에 나서면 국가보안법입네 집시법입네 해서 잡아가두고 해고시키고.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어디서 비롯되었습니까? 이 모든 것들은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민중이 생산수단과 국가주권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생산수단과 국가주권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구경꾼으로 그저 일하는 기계로 전락하게 만든 이 사회 때문에.

생산수단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힘들게 열심히 일하지만 생산물은 내 것이 아니고 사장의 것, 노동자는 그저 몇 푼 월급만 받으면 ‘땡’(노동의 소외). 국가주권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의 압도적 다수가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이건만 우리를 위한 정치는 없고, 가진 자, 있는 자를 위한 정치만 있을 뿐 말할 기회도 말할 통로도 없기 때문에. (사회의 소외)

그래서 그저 술이나 한 잔 걸치고 노래방에 가서 고함이나 치며 스트레스나 해소하고, 아니면 한쪽 구석에서 볼멘소리로 중얼거릴 뿐.

이래서는 안 됩니다. 과감히 나서야 합니다. 생산수단의 주인으로 국가주권의 주인으로 당당히 나서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이남사회의 본질은, 아직도 미국에 예속되고 지배받고 있는 분단된 식민지자본주의사회입니다.

미국의 부당한 간섭을 끝장내고 우리 힘으로 조국을 통일하며 노동자와 민중이 주인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투쟁으로 떨쳐 일어서야 합니다.

이 길이야 말로 이 시대, 이 땅에 태어난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게 사는 길이 될 것입니다.

착취가 있고 억압이 있으며 노예 같은 예속이 있는데, 이를 쳐부수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는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놔두고 어디에서 인간다운 삶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에게는 육체적 생명 외에 자주성이라는 사회정치적인 생명이 또 하나 있습니다. 육체적 생명은 끝나면 그냥 분해되고 없어지고 말지만, 자주적인 삶의 사회정치적 생명은 오히려 육체적 생명보다 더 중요하고 보람 있고 길이길이 후대에게서 부활되는 영생하는 생명이라 하겠습니다. 자주성은 인간이 인간다운 잣대이기 때문에 자주성이 없으면 인간이되 이미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물려준 찬란한 물질적ㆍ정신적 재부를 자양분삼아 우리가 다른 생명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생명체, 즉 인간으로 자라온 민족공동체에 우리는 우리 후손들에게 또 다른 물질적ㆍ정신적 재부를 많이 남겨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돈이나 물질 자체가 아니라 인간중심의, 인간을 위한 새 사회건설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예속과 억압당하는 민족과 민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 이 길만이 이 시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인간답고 보람차며 가치 있는 삶을 살며 빛내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육체적으로는 안락하지 않아도, 또 설사 그 길에서 쓰러질지라도 우리의 사회정치적 생명은 우리조국, 우리민중과 함께 영원히 살아 숨 쉬며 후손들의 소중한 재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인생의 의미와 보람을 보는 것입니다.

(2008. 11. 22)

2009년 5월 22일 금요일

지식인과 변혁운동

[ 아래글은 지난 2004년 7월 23일 '한국비정규직교수노동조합'의 '여름연수'에서 강연한 것인데 다시 여름을 맞아 연수에 참가하는 지식인 들을 위하여 그대로 게재합니다.]

지식인과 변혁운동

1.

여러 선생님.

저도 대학 교단에서 추방되어 학문이 박탈되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한때 대학 강사로서 고생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고통을 어느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그냥 같은 입장의 선생님들을 만난다는 것보다 혈육을 함께 한 형제를 만난다는 느낌이 듭니다.

나는 소년시절 어린 나의 눈앞에서 조국이 분단되는 엄청난 비통을 겪고 이를 반대하여 혁명조직에 들어 손에 무기를 들고 투쟁하는 조직생활을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연락선이 파괴되는 바람에 조직에서 이탈되어 집에 돌아왔고, 살기 위하여 생의 방향을 바꾸어 학문의 길에 들어 대학에서 학문에 열중하였습니다. 마침 좋은 은사를 만나 당시에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학문의 길잡이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과거, 드러나면 죽거나 감옥에 들어가는 과거를 안고, 그 공포를 잊기 위해서도 학문에 더욱 감싸여 젊은 한 시절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박사도 되고 교수도 되었으며 교실의 주임교수로 학자로서의 최고의 영예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많은 논문을 내고 교실의 잡지(학술논문집)를 발행하여 그것으로 나와 나의 교실이 세계 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2.

제가 변혁운동에 다시 뛰어든 것은 4.19학생봉기 이후부터였습니다.

10 년 넘도록 이승만 정권 밑에서 공포에 떨며 살았고, 때때로 함께 투쟁했던, 조국의 어느 산야에서 피지도 못하고 산화한 어린 봉오리 소년 동지들에게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죄스러워 밤새 술타령으로 지새는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 내가 우리들의 어린 후배가 그 포학하기 그지없는 이승만 정권을 때려눕히는 것을 보고 정신이 버쩍 들었던 것입니다.

나는 우리도 일어나면 그 이승만과 같은 독재자도 때려눕히고 미국 놈도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있다는 자신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변혁운동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몫을 찾아 투쟁의 대열에 나섰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나에게는 운동이 주된 사업이었고 학문은 이를 위한 한 방도로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학문에 대해서 절대 소홀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럴수록 논문도 열심히 쓰고 강의도 열성을 다했습니다.

나는 이때부터 내가 하는 전문분야의 연구와 더불어 변혁운동에서 필요한 지식과 이론을 확립하기 위하여 철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학습도 열심히 했습니다. 당시 경북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먼지를 들쓰고 잠들고 있는 맑스주의, 레닌주의 이론의 책을 찾아 계통적으로 공부하고 모택동사상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평양에서 방송하는 방송대학의 강의를 매일 밤 듣고 녹취하여 공부했습니다. 나의 서재는 그래서 새벽 4시전에 불이 꺼진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런 공부들 중에서 방송대학에서 녹취한 철학을 줏대로 하고 소련 과학아카데미에서 출간한 철학교정, 경제학교과서가 뼈대가 되어 우리민족의 역사 공부를 살로 해서 나의 사상이 확립되어 갔으며 우리민족의 자주성을 구현하는 사상으로 발전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나의 학습은 내 혼자의 힘으로 진행도 했지만 당시 대구지역의 진보적 청년들과 함께 책을 서로 빌려주고 빌려보면서, 그러면서 서로 질문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 서로의 이론수준을 높여나갔으며 그러는 중에 서로의 사상을 함께 하면서 동지로 되어 갔습니다.


3.

당시 우리는 비록 어떤 조직을 형식화해서 결성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여러 운동에 핵심적 부분을 담당하면서 청년학생, 노동청년들을 지도하고 지원하면서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시민운동, 지역의 정치운동 등 여러 부문에 영향을 끼치며 이론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나는 주로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을 맡았습니다.

민주화를 요구하고 조국의 통일을 열원하는 학생들을 하나의 조직으로 묶어 세우고 이들에게 학습과 그 조직화를 지원하고 투쟁을 후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들 운동을 단순히 지원하는 것이었으나 점차 조직적으로 방조하는 사업을 꾸려나갔습니다. 그래서 [정진회], [정사회]라는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민주화운동과 자주적 통일운동을 위한 학생운동의 핵심으로서의 동아리를 조직 지도해 나갔습니다. 이들은 1960년대 말에 일어난 '삼선개헌반대운동'과 '교련반대운동'의 핵심조직으로서의 역할을 잘 해냈습니다.

1970 년대에 들어서자 박정희 파쇼도당은 대학 안에 있는 모든 사회과학연구 동아리와 학생운동의 동아리를 강제 해산했습니다. [정진회], [정사회]도 해체 당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동지들은 단순한 학술연구의 동아리로 위장하여 [한국풍토연구회](약칭 [한풍회])를 조직했습니다. 지도교수도 지극히 무난한 교수를 초빙하여 겉으로는 운동과 전혀 무관한 동아리로 위장하고 학생운동의 핵심을 꾸려나갔습니다.

이들의 학습과 회합은 산이나 바다에서 천막을 치고 등산이나 관광을 가장해서 열었습니다. 이들이 나중에는 '유신반대운동'의 핵심으로 성장되었던 것입니다. 운동도 파쇼정권의 탄압에 맞서 치고 빠지는 게릴라식 전법을 창조해서 영활하게 전개해 나가 한때 파쇼당국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나의 학생운동에 대한 지원을 눈치채게 되었고 파쇼당국은 나를 76년 2월에 처음 실시하게 된 교수재임명제에 걸어 이른바 '국가관 미확립'과 '정부정책 비협조'를 이유로 들어 대학으로부터 추방했습니다.

한 학기를 지나고 나서 동국대학교에서 교수대우라지만 강사로 임명받아 강의하다가 이듬해 새 학년에 교수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때부터 이재문 동지와 신향식 동지들과 함께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직업적 변혁운동가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 후 두 번이나 감옥살이를 했는데 그것도 사형수로 두 번 있었고 무기징역을 두 번이나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밖에 나와 있지만 내 어깨에는 남은 잔형 27년이라는 무거운 징역을 걸머지고 있는 형집행정지자, 보안관찰대상 좌익수라는 딱지를 붙이고 사는 사람입니다.


4.

저 자신의 자기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여러 분들이나 저는 지식인이라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잘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은 자기의 사회적 본질을 잘 알고 그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게 사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자면 우리는 지식인이라는 본질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와 같은 좋은 자리에서 지식의 본질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 지식인'이란 한마디로 해서 정신노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외국에서는 '인텔리겐챠', 이로부터 외래어로 줄여서 '인텔리'라고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지식인이라서 그런지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과 유다르게 말하기도 합니다만 육체노동으로만 삶을 영위하지 않고 주로 정신노동으로 사회생활에 참여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객관적인 정의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지식인으로 들게 되는 사람들로는 기사, 기수, 전문가, 의사, 예술가 등 자연 및 사회과학부문의 정신노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이에 속하게 되겠습니다.

이러한 지식인은 사람의 생산노동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으로 갈라지고 정신노동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 발생했던 시대인 노예제사회에서 발생하여 봉건제사회와 자본제사회로 거쳐왔습니다.

지식인은 여러 계급의 출신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사회의 지식인 가운데는 자산계급출신의 지식인들도 있고 소자산계급 출신의 지식인들도 있으며 그 수는 얼마 안되지만 노동자, 농민 출신의 지식인들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계급의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는 지식인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독자적인 계급으로 이루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지식인은 이러저러한 계급에게 복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인은 그 입장이 그가 속한 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데로부터 다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자본주의사회에서 지식인들은 주로 자본가계급을 위하여 복무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지식인들이 주권과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주인행세를 하는 자본가계급에게 복무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사회의 본질에서 나오는 피치 못할 현상입니다.

자본주의사회의 지식인들은 대부분이 자기가 가진 지식을 팔아 생활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이 바로 상품화되고 있습니다. 지식이 상품화된다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차별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마치 상품이 차별화 되고 경쟁이 일어나고 그래서 독점화 되듯이 지식도 경쟁화되고 독점화 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남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해 그것의 진리성은 도외시하고 자기는 그것과 다른 이론을 내어놓아야 하고 차별성을 강조하게 되고 독점화로서 지식에 대한 이해관계를 고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은 바로 남보다 더 높은 지위로 올라서는 도구로 이용될 수 있으며, 그 지위는 자본의 이윤을 올리기 위한 능력으로 담보되고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지식이 남보다 더 자본의 요구에 충족된다는 것은 바로 자기 생활을 더 유족하게 하는 수단으로 되고 그것은 사회적 지위와도 관계되며 또 높은 명예와도 연관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사회의 지식인들은 대부분이 경쟁상태 속에 있습니다. 따라서 지식과 이론의 가치를 그 진리성에서보다 경쟁에서 이겨 남의 위에 올라서는 데에 두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지식인들 사이에는 출세주의, 영웅주의, 배타주의 등 온갖 지식의 진리성이라는 본질과는 유리되는 부정적인 작풍이 만연되고 있습니다.


6.

그러나 아주 적기는 하지만 자본가계급을 반대하고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투쟁하는 선진적이고 혁명적인 지식인들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사회는 노동자들도 스스로 정신노동에 의하여 지식을 얻을 수 있고 그로부터 올바르게 얻어진 창조적인 사상의식에 의하여 자신의 계급적 처지를 인식하게 되고 그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도를 찾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뒤떨어진 식민지, 반식민지 나라의 지식인들은 제국주의자들에 의하여 민족적 억압과 차별대우를 받기 때문에 일정하게 혁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지식인들은 노동자, 농민들을 교양하고 그들의 처지를 개혁하는 투쟁으로 나서게 하고 그들을 혁명운동에 다리를 놓아주는 교량자적 역할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지식인들 자신의 민족적 해방이 노동자, 농민들의 해방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변혁운동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대단합니다.

변혁운동은 세상을 바꾸는 일입니다. 그것도 전혀 사람들이 걸어보지 못했던 길을 열어나가는 일입니다. 변혁운동에 참가한 지식인은 변혁운동의 사상의식을 창조하고 운동의 전략전술을 내와서 운동의 과학성을 보장해줍니다. 특히 특출한 운동가는 그 시대의 새로운 변혁사상을 창조하고 운동을 영도해나갑니다.

마르크스주의 사상도, 레닌주의이론도, 모택동사상도, 월남 호지명의 인민전쟁이론도,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주체사상도 변혁운동에 뛰어들어 그들이 그 시대의 변혁운동을 영도해나가는 가운데 창조된 빛나는 이론체계들입니다.

변혁운동은 전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만큼 그것을 창조하는 사람 역시 전혀 새로운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마다 살아온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그것도 미제의 예속식민지사회에서 자랐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주의사회의 이윤추구라는 본질에서 개인주의, 자유주의, 출세주의에 푹 젖었고 그것들이 충족되지 않을 때 생기는 소외로부터 허무주의와 냉소까지 안고 있으며, 식민지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사대굴종 노예주의까지 싸잡아 안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변혁운동, 새 세상을 창조하는 사업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변혁운동을 하는 지식인은 이러한 자본주의사회에서, 식민지사회에서 얻어진 변혁운동에 부정적인 사상을 청산하고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자기개조를 이루어내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들 변혁운동의 대열에 자기개조사업을 옳게 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 현상들이 바로 분파현상으로 나타나 운동의 통일단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진리가 아무리 명백하다 해도 운동에서 차지하려는 헤게모니에 눈먼 사람은 그 올바른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이와 해를 따르는 자본주의사상의 속성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렵게 차지한 지위와 그 보잘것없는 안락을 유지하기 위하여 센 놈에게 빌붙는 사대굴종의 사상이라는 식민지사회의 속성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혁운동은 이러한 사상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통일단결을 이루어낼 수 없고 새롭고 과학적인 전략과 전술을 모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7.

여러 선생님들.우리들은 반백년이 훨씬 넘는 민족분단과 미제의 식민지통치 시대에서 살아왔습니다. 이제 통일과 해방의 시대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6.15공동선언으로 그 대문이 활짝 열려져 있습니다.

우리민족의 역량이 미제의 전쟁책동을 막아내고 미제를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있을 만큼 강성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분단과 예속으로부터 해방되는 마지막 투쟁의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지금 우리시대에서 우리가 할 일은 지난 세월 친일잔재와 사대매국노들 그리고 군사깡패들이 가꾸어온 반통일 반민족세력으로부터 자주적 민주정권을 쟁취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미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 우리민족끼리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에게 보람차지만 아름차기도 합니다.

이 시대, 우리시대의 지식인에게는 이 민족적 역사적 대사업에 참여하여 민족대단결의 운동에서, 예속에서 자주의 나라로 나아가는 해방운동의 길에서, 우리시대에서 통일조국을 건설하는 일에서 지식인들이 지식으로 헌신하는 일이 놓여 있습니다.


2004 년 8월 1일

2009년 5월 21일 목요일

미군주둔 60년, 우리는 왜 맥아더를 이야기해야 하는가(3)


[이 글은 2005년 9월, 인천 월미도에 있는 이른바 <맥아더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라는 농성시위를 하던 때에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의 홈페이지 측의 요청에 의하여 3번으로 나누어 맥아더의 우리나라에 대한 범죄를 폭로하기 위하여 쓴 글입니다. 그중 셋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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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비전투 민간인을 300만 명을 학살한 맥아더

맥아더는 6.25전쟁에서 우리민족에게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재난을 들씌웠다. 전쟁에서 전투원끼리의 살상도 교전 이외의 살상은 전쟁범죄에 들어간다. 맥아더는 6.25전쟁에서 피난하는 민간인을 폭격과 기총소사로 마구 학살하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도시와 촌락, 농사 등 생업활동을 하고 있는 민간인을 아무런 경고도 없이 마구 죽이게 했다. 그의 지휘 하의 전투원은 도시를 점령하거나 촌락을 지나치다가 아무런 경고도 없이 사격을 가하고 주민을 끌어내다가 마구 죽이는 인간백정이었다.

그의 군정 하에서 조국의 분단을 반대하고 군정의 폭압을 반대하여 궐기한 제주도의 4.3항쟁에 대해서 그가 지휘하는 남조선의 군정경찰, 국방경비대, 그리고 국군으로 하여금 제주도를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만들었고, 당시 30만 제주도민에서 5만의 주민을 학살했다. 이것은 6.25전쟁 전의 일이다.

전쟁 중 지리산 등 조국의 산악에서 미제와 이승만 예속정권의 학살탄압을 반대하여 싸우는 유격대 토벌(이승만 군경은 이를 일제가 말하듯이 공비토벌이라 했다. 하기야 이승만 군경의 지휘자들은 대부분이 일제에 빌붙어서 동족을 탄압 학살하던 민족반역자들이었다.)에서 일제가 말하는 삼광정책(殺光, 奪光, 燒光의 三光으로 살아있는 것은 모조리 없앤다는 토벌방식, 일제가 중국의 동북지역을 위시하여 조ㆍ중 민간인의 학살초토화정책)과 중국의 장개석군이 말하는 건벽청야(建壁淸野) 그리고 미군이 장기로 하는 초토화 작전으로 수십만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미군이 38선을 넘어 벌인 민간인 학살은 미제의 군인이 얼마나 야수적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 실례로 황해도 신천학살은 대표적이다.

미군이 신천으로 쳐들어가 점령한 52일 동안, 신천군에서 남녀노소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해 신천군 전체 인구 14만 2,786명 가운데 3만 5,383명을 살해했다. 특히 신천군 궁흥면 만궁리에서는 주민의 87%, 온천면 운봉리에서는 66%, 신천면 양장리에서는 남자 전원을 학살했다.

미군의 이런 학살은 복조선 도처에서 일어났다.

미군은 이북에 또 무차별 공중폭격으로 엄청난 수의 민간인을 살상했다.

당시 인구 30만의 평양에 43만 발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이북 땅 전역에 1평방킬로미터당 18개의 폭탄을 퍼부었다. 1950년 6.25전쟁 이후 1953년 4월말까지 미군은 26만발의 중대형 폭탄, 2억발의 탄환, 약 40만 발의 로켓탄, 약 150만발의 네이팜탄을 쏟아 부었다. 이것은 태평양전쟁 중에 미국이 사용한 총폭탄 총량보다 더 많은 양이다. 이런 초토화 작전과 융단폭격으로 조선반도는 폐허로 변했고, 특히 이북은 완전히 '원시상태'로 되돌아갔다.

예컨대 당시 이북의 주요 산업지대였던 원산은 종전 후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며 말짱한 건물은 한 채도 없었고 공장들도 땅에 파묻혀버렸다. 이러한 상황은 이북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이북만이 아니었다. 이남도 이북 인민군의 점령지대였을 때 미군의 폭격은 이북의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6.25전쟁으로 하여금 우리민족은 약 100-150만의 전투원과 약 300-400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살상당하고 모든 산업과 전국토의 대부분이 파괴당했다. 이런 파괴를 지휘한 미제와 그 작전을 지휘한 당시 유엔군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의 전쟁수행방식이 얼마나 야수적이었고 범죄적이었는지 알 수 있도록 해준다.

맥아더는 일제의 전쟁범죄자를 감싸 안았다. 그 중에서도 백번을 죽여도 조ㆍ중인민의 한이 풀릴 수 없는 중북 동북 하르빈에 있던 일본군 세균무기제조와 실험부대인 일본 천황의 직속 제731부대의 부대장인 이시이를 보호하고 미군의 세균전을 위해 그들의 경험을 축적하여 6.25전쟁에서 사용하도록 했다.

세균무기는 실제 맥아더가 총사령관에서 추방된 이후에 실전에 사용되었지만 그 실험과 준비는 맥아더의 지휘 하에서 시작된 것이다.

벌레만도 못한 반인륜적인 살인의사 이시이가 미군의 보호아래 1951년 겨울, 극비리에 직접 조선반도의 세균작전현장을 다녀갔다. 이 인간쓰레기가 돌아간 뒤 이북과 중국의 동북지역에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엄동설한인데도 파리ㆍ모기가 산채로 발견되었다. 그 이후부터 주민들은 콜레라에 감염되고 페스트에 걸려 수 십 명씩 죽기도 했다.

미군의 이 세균전은 오키나와 기지에 있는 B29폭격기에 무수한 파리, 벼룩, 거미, 빈대, 모기, 이, 귀뚜라미 등의 해충이 가득 찬 세균무기를 실었는데, 거기에는 콜레라, 페스트, 장티푸스, 재귀열병 등 가장 지독한 전염병균이 무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세균무기를 사용한 세균전은 평안남도 안주군 발남리에서 실시되었는데 페스트환자가 발생했고 36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각지에서 숫한 인명을 살상했다.

미국은 이북의 후방에 대해서 화학전도 강행하여 숫한 민간인을 살상했다.

1951년 5월 6일 B29 3기는 남포시 근교의 삼화리, 후포리, 축돈리, 용정리, 용수리 일대에 가스탄을 투하하여 379명을 살상했다. 1951년 8월 1일에는 황해도의 연성리와 원철리에, 1952년 1월 9일에는 원산북방의 학성리에도 가스탄을 투하했다.

맥아더는 패퇴하는 전국을 만회하기 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감했다.

언제나 미군이 하는 것처럼 엄청난 화력을 써서 초토화 작전으로 제압하고 상륙을 감행했다. 맥아더는 300여척의 함선과 약 1,000여대의 비행기, 5만 여명의 방대한 무력을 동원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다.

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6시에 개시하여 2시간 만에 월미도를 점령했다고 하는데 이와 달리 말하는 쪽도 있다. 월미도를 수비하고 있던 인민군이 3일간을 버티었기 때문에 경인지역의 인민군 주력이 후퇴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

작전지휘관은 패퇴를 해도 대개 작전상 후퇴라고 강변한다. 물론 전쟁을 하다보면 작전상 후퇴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 후퇴가 작전상 후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패퇴라고 할 수 있는가는 그 후퇴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확보했는가, 못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쟁 초기 맥아더가 지휘한 미군의 낙동강으로의 후퇴는 패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초기의 국군은 공황상태로 무너지고 이를 밀어주기 위해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을 전선에 보내고 딘 소장이 지휘하던 미 제24사단도 전선으로 투입했으나 대전작전에서 전멸되고 말았다. 이로 인한 미군의 후퇴는 작전상 후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반해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인민군이 작전상 후퇴를 했는데 이 후퇴는 대부분의 병력을 유지하면서 후퇴했고, 미군의 이북 전진에 대한 반격을 위해 부대를 재배치하기 위하여 후퇴한 것이며, 이 결과 인민군의 겨울공세 때 이북에 들어온 미군과 국방군 30만 명을 포위 섬멸한 작전의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후퇴가 그야말로 작전상 후퇴라고 할 수 있는 승리의 후퇴라고 할 수 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후, 이북으로 확대될 육상전이 제3차 세계전쟁을 불러올 위험을 우려하고 있는 세계평화애호인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침을 감행하여 38선을 넘어 진격했다. 그의 휘하에 있는 미군은 이북에 들어가 살인, 강간, 방화, 파괴 등 온갖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그들의 52일간의 이북점령으로 이북 땅을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바꾸어 놓았지만 이북 동포들은 이 침략군에 반대하고 인민군의 작전을 도와 미군을 몰아냈다.

인민군의 후퇴는 새로운 거대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후퇴했는데, 그것은 전진해 들어온 미군의 그 후방을 차단하는 거대한 포위망으로 전변시켜 다가온 이북 겨울의 혹한을 자연적 무기로 하여 미군과 국방군을 섬멸시켜버렸다. 맥아더는 수많은 병력을 잃고 후퇴했다. 맥아더의 이 후퇴는 완전무결한 패퇴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를 1.4후퇴라고 부른다.

6.25전쟁에서 맥아더의 용병은 미제가 자랑하는 명장의 용병은 아니다. 그의 용병은 이 전쟁에서 두 번이나 패퇴한 패장(敗將)의 용병이었고, 물량에만 의지해서 사람과 물건을 가리지 않고 마구 파괴하는 폭장(暴將)의 용병이었으며 옥수수파이프나 입에 물고 겉멋만 부리고 속은 텅 빈 용열한 용장(庸將)의 거드름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용장이 생각해 내는 일이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마구 많이 죽이는 일이다.

그는 이북에 쳐들어가 그가 보기에는 이북 전체가 곧 그의 손아귀에 들듯 했다. 그런 생각이 남가일몽처럼 다 망했던 것이다. 다 잡았다고 생각했던 인민군의 주력이 고스라니 남아 그대로 나타났고, 게다가 그가 보기에는 소총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손에 폭탄만 쥐고 있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중국인민지원군이 나타나, 강력한 화력과 기동력 그리고 넘쳐나는 물량을 갖춘 이때까지 한 번도 패퇴한 적이 없는 천하무적의 미합중국의 군사를 쥐새끼 몰 듯 포위망에 몰아넣더니 마구 쳐 죽이고 무장해제를 시켜버리는 꼴을 보고 용장(庸將)으로서의 심술이 발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원자폭탄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6. 우리에게 핵 참화를 불러오려 한 맥아더


조ㆍ중국경의 산악지대까지 후퇴하여 태세를 고쳐 세운 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은 함께 이북의 험준한 산악지대까지 깊숙이 들어온 미국군을 포위 격파 패주시키고 12월 5일 평양을 탈환하고 51년 1월 5일에는 서울을 재점령했으며 3월 14일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경장부대였고 그 대부분은 중국 동북지방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청년들이어서 인민군과 바로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문화권의 형제 같은 동포여서 하나의 군대로 작전을 할 수 있을뿐더러 혼합해서 전투대열을 조직할 수도 있었다.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은 드럼과 피리를 불면서 산을 내려와 미군에게 반격을 가했고 이북의 엄혹한 동장군이 또한 무기로 되어 미군은 소탕당하여 패주하고 말았다.

압록강까지 다다랐던 미군과 국방군은 그만 쫓겨 내려와 11월 25일부터 28일까지의 청천강전투(평양 서북 100킬로미터 정도)에서 미군은 섬멸을 당했다. 이 청천강의 전투로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이루어놓은 전공은 그만 삭치고 말았다.

11월 28일 맥아더는 통합참모본부에 지급전보를 치고 「총병력 20만의 적군이 국련군과 대치하고 있다. 결과 우리는 전혀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고 있다.」는 비명이었다.

이 연락을 받고 트루만은 「소련과 드디어 핵 대결의 때는 왔다.」고 11월 30일 기자에게 말했다. 「핵무기도 포함해선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를 포함한다. 핵무기의 사용은 늘 검토하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맥아더와 트루만은 핵전쟁에 대해서 항상 죽이 맞아 있었다.

그래서 맥아더가 조ㆍ중 국경에 30개에서 50개의 원폭을 투하해서 코발트방사능오염지대를 만들어 만주로부터 물자와 병력이 북조선에 유입하는 것을 막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통합참모본부는 원폭사용반대를 표명했다. 그것은 국내외의 여론의 우려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 세계에는 반전의 목소리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캐나다도 영국도 한목소리로 원자폭탄의 투하는 필연적으로 전쟁을 확대시킬 수 있다면서 핵무기사용을 강력히 반대했다. 캐나다의 외상 피어슨은 속히 화평교섭에 들 것을 주장했다. 영국의회에서는 노동당소속 하원의원 100명이 애틀리 수상에게 서한을 보내어 핵무기 사용을 반대하고 미 정부에 항의할 것을 요청했다.

영국수상은 12월 4일 워싱턴에 도착하여 8일까지 연나흘 동안 트루만과 회담하고 트루만으로부터 영국정부의 사전 동의 없이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언질을 받으려고 매달렸다.

그들은 중국과 전면전쟁이 되고 마침내 소련과의 핵전쟁, 제3차 세계전쟁으로 발전되어 유럽 전체가 핵전쟁에 휘말려들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미국 내에서도 핵무기사용에 강력히 반대하는 기운이 높아졌다.

원자력위원회와 통합참모본부는 「조선반도에서는 이제 원폭투하에 적절한 목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핵무기사용을 반대했다. 당시 동부의 명문 컬럼비아대학교 총장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도 핵무기사용을 반대했다. 하지만 이자는 대통령에 당선 되더니, 12월 하순 태평양을 항행하는 순양함 헬레나에서 각료회의를 열고 조기정전을 위해 핵무기 사용도 불사한다고 표명했다. 그 석상 통합참모의장 아더 라드포드(Arthur Radford)제독은 핵무기에 의한 대량보복을 주장했다. 이와 같이 미국의 지배자들은 늘 핵무기사용을 생각해왔고 그 후로도 늘 핵 공갈로 일관해왔다.

결국 트루만은 4월 11일 맥아더를 해임하고 핵무기 사용을 걷어치우고 말았다.

이 이후부터 미국 내의 여론은 전쟁을 가능한 한 빨리 종결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국가목표로 되었다.


끝으로

이상 우리가 알아본 맥아더는 별 볼일 없는 장군이다. 미국이나 숭미 친미 공미의 미국숭배자들이 외대는 것처럼 용장(勇將)도 아니고 지장(智將)도 아니며 덕장(德將)이나 인장(仁將)은 더구나 아니다. 그가 지휘하고 치러낸 전쟁이나 전투를 보면 위에서 해설한 바와 같이 패장(敗將)이고 용장(庸將)이고 폭장(暴將)이기도 하다.

그러면 왜 이런 자를 미제와 미제를 숭모하는 자들이 그처럼 맥아더를 숭배하고 그를 은인으로까지 해서 받드는가.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8.15해방으로 민족의 배신자로서 배족의 죄업을 영원히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친일파ㆍ민족반역자들이 맥아더의 포고문으로 그들이 저지른 배족의 업(業)에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고, 분단의 원흉 이승만이 일으킨 전쟁으로 멸망의 문턱으로까지 들어선 그들의 생명을 지켜준 그야말로 은인이기 때문이다.

과연 친일 배족세력과 그들의 자손으로 보아서는 생명의 은인이고 구원의 하느님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배신한 동포들에게까지 은인이라고 우기는 것은 검은 것을 희다고 하고 흰 것은 검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그들이 배신한 동포들에게까지 그렇게 인식되도록 하는 길은 올바른 교육으로는 불가능할 것이고 고급한 심리적 사술에 의한 세뇌로밖에는 없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 제국주의의 세계 제패라는 패권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미국이 자랑하는 미디어의 기능에 의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맥아더가 겪어온 전쟁의 지휘에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장수는 용감하고 정의롭고 지혜롭고 인덕이 갖춘 사람이라는 점은 어디에고 찾아 볼 수 없다.

필리핀전투에서 85,000이나 되는 자기 병력을 그 좁은 바탄반도로 몰아넣어 보급로를 스스로 차단당하여 장졸들에게 고난을 들씌우다가 10분의 1도 안되는 6,000 남짓한 적의 공격을 받자 도망 가버리는 장수, 인천상륙작전을 하고서 적이 보이지 않자 적이 없다고 판단하고 잘 나간다고 적의 포위망인 줄 모르고 들어갔다가 몽땅 당하고 마는 장수, 적 지역의 인민을 마구 살상하도록 만드는 장수, 자기 윗사람에게 버릇없는 짓을 예사로 해버리는 예절 없는 장수를 어찌 명장이라 할 수 있겠는가.

미제의 미디어는 이런 장수까지도 명장까지는 아닐지라도 인기 있는 정군으로 만드는 재주는 과연 돈을 줄만큼 가치(?) 있다고 보겠다.

이제 우리는 「주한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어야 하는 투쟁을 전개할 때가 왔다. 이 운동에서 제일 먼저 전개해야 할 일이 「주한미군」이 우리를 지켜주는 고마운 존재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자주성을 짓밟고 우리민족의 살길을 여는 통일의 방해꾼임을 인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친미 숭미 공미의 반통일세력은 「주한미군」을 지지하고 그들을 은인으로까지 받들고 있다. 그 전형으로 맥아더를 들고 있다. 그들은 맥아더를 은인으로, 명장으로 그리고 덕장으로까지 모시고 이를 인민들에게 더욱 깊이 인식시키려고 발광을 하고 있다.

결코 맥아더는 명장일 수 없다. 민족의 배신자에게는 은인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민족에게는 전쟁의 참화를 들씌우고 핵 참화까지 들씌우려고까지 한 민족의 원수이고 세계평화의 파괴자일 뿐이다.

이런 용장(庸將), 패장 그리고 학살의 폭장(暴將)의 동상을 세워두고 우리민족의 자존심을 지킬 수 없다.

'Unews에 게재 2005. 9. 12.'

미군주둔 60년, 우리는 왜 맥아더를 이야기해야 하는가(2)

[이 글은 2005년 9월, 인천 월미도에 있는 이른바 <맥아더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라는 농성시위를 하던 때에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의 홈페이지 측의 요청에 의하여 3번으로 나누어 맥아더의 우리나라에 대한 범죄를 폭로하기 위하여 쓴 글입니다. 그중 둘째 글입니다. 그중 둘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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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고도 영웅이 된 더글러스 맥아더

1941년 12월에 태평양전쟁을 맞은 아들 더글러스 맥아더는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2월 8일 진주만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의 초기에서 선제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필리핀 주둔 미 공군사령관이 타이완의 일본군 비행장의 공격하려고 했는데, 맥아더는 이 요청을 받고 판단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놓쳐버렸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108대나 되는 일본 해군의 육상공격기의 공격을 받게 되어, 처음부터 맥아더는 전쟁의 선제주도권을 빼앗기는 용장(庸將)으로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폭격을 맞은 미군의 클라크비행장은 못 쓰게 되었고 미군의 비행기는 일본군의 일격으로 30분만에 98대의 폭격기와 전투기를 잃어버렸다. 그 이튿날 9일은 악천후로 일본군의 비행기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10일에는 캬비테 군항에 일본군 폭격기와 전투기들이 공격을 가해왔다. 미국의 아시아 함대는 이미 남쪽으로 도망가서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초계정과 어뢰정, 유조선등이 격침되었고, 정박 중이던 잠수함 1척이 격침되었다.

10일 항공기지 확보를 위한 일본군의 대대적인 상륙작전이 시작되었으나, 이미 용장이 되어버린 맥아더는 이 상륙이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수비군의 파견을 요청했지만 그 요청을 거절했고, 전력이 급격히 줄어든 항공기들만으로 상륙저지에 나서게 했다.

그러나 사령관의 우둔한 지휘로 만신창이가 된 미군이지만 상륙저지에 나선 항공기는 해안으로 돌진해오는 일본군 주정을 공격하고, 일본군 전투기가 마구 설쳐대는 하늘에 올라가 일본군의 수송함대를 공격하여 소해정 1척을 격침하고 순양함을 대파하는 등 미군은 강렬하게 저항했다.

일본군은 원군을 못 받은 1개중대에 불과한 수비대를 공격해서 내쫓은 다음 오후 2시경에 아바리 비행장을 비롯해 그 남쪽의 무르뉴간 비행장과 쓰게가라오 비행장 점령하고 이들 비행장에 일본군 육군 5비행집단이 일제히 날아와 11일부터는 이곳을 거점으로 해서 미 항공병력을 격멸하는 작전에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이미 제공권을 장악한 일본군의 주력부대 상륙은 12월 22일 야간에 시작되었다. 이들은 두 곳에서 상륙하여 마닐라를 협공하는 태세를 취했다. 일본군은 마닐라 북방 200km 지점인 링가옌 만에 상륙을 했고, 24일에 마닐라 동남쪽 110km 지점의 라몬 만에 상륙을 했다.

초전에 주도권을 상실한 맥아더는 연속 패전을 겪어야 했고 이 국면을 타개할 전술을 내오지 않고 도망할 궁리만 하고선 23일에는 벌서 각 부대에게 이미 만들어놓은 퇴각계획대로 바탄반도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만 할 뿐이었다.

바탄반도는 남지나해와 마닐라 만 사이에 길게 나온 길이 48km의 반도로서, 협곡, 바위, 정글로 이루어진 산악지대였다. 이곳에 수비군을 집결시키면 마닐라는 일본군에게 내어주더라도 정작 중요한 마닐라 만은 연합군의 지배하에 놓이는 것이다.

마닐라 만의 입구에 있는 코레히도르 섬에는 강력한 요새가 있었다. 그리고 그 섬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은 꼭 바탄반도를 거쳐야 한다. 이를 맥아더는 ‘적은 병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병마개는 우리에게 있거든’ 하고 적절하게 비유했다.
과연 이 전술이 들어맞아 일본군은 바탄반도 점령을 위해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되도록 많은 수의 병력이 무사히 바탄반도에 들어와야 한다고 보고 맥아더는 바탄반도로 후퇴하라고 재촉했다.

27일에는 마닐라가 무방비도시로 선언되었고, 1월 1일에는 남부 루손군의 마지막 부대가 안전지대로 빠져나와 바탄반도로 들어왔다.

1월 2일에 일본군은 무방비 상태의 마닐라를 점령했고, 1월 6일까지는 미군과 필리핀군이 모두 바탄 반도로 후퇴했다. 남아있던 B-17은 모두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하였고, 아시아 함대는 자바로 들어갔다.

바탄반도 안에는 미군과 필리핀 군대를 합해서 총 85,000의 병력을 집결시켰는데 병력 수로 보아서는 일본군보다 약 10배나 우세했다. 너무 많은 병력이 좁은 곳에 집결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일본군은 적은 병력으로 포위하기 쉽고, 모두 적의 공격을 피해 후퇴한 상황이라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열성적으로 저항한 자들은 현지인 필리핀군뿐이었다.

1월 10일부터 공격을 시작한 일본군에 대항해서 필리핀군 부대는 자기 땅을 지키려는 일념을 가지고 싸웠으나 미군은 전투를 서로 미루기만 하고 꽁무니를 뺄 뿐이었다. 26일까지 필리핀군은 일본군의 맹렬한 공격을 이겨냈다. 그 후 보급이 떨어진 상태이지만 그들은 영웅적으로 방어진을 펴고 2개월이 넘도록 버티었다. 그러나 맥아더와 미군은 10배도 넘는 병력을 가지고도 일본군과 싸워 상황을 타개할 생각은 않고 코레히도르 섬을 포기하고 이미 바탄반도를 오래전에 탈출하고 말았다.

일본군이 병력을 자바공격을 위하여 빼고 6,000의 부대로 공격하는 데에도 맥아더는 85,000이나 되는 병력을 좁은 곳으로 후퇴시켜 놓았기 때문에 오히려 많은 병력이 적은 병력에게 역으로 포위되는 꼴이 되었다. 맥아더는 결과적으로 자신이 말했던 병의 마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군에게 주고 만 격이 되고 말았다. 그는 많은 병력을 남겨두고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지휘관이 없는 병력은 오합지졸이 되고 만다. 도망을 못 간 미군은 허둥대다가 일본군의 포로로 되었고, 그 14,000의 포로는 「죽음의 행군」이라고 일컫는 일본군의 학대행군으로 반수 이상은 행군 중에 쓰러져 죽었다. 그 많은 부하를 이 꼴로 만든 장군을 과연 누가 명장이라 할 수 있겠는가.

머리에 엘리트의식으로 가득한 웨스트포인트 출신의 맥아더는 오직 출세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래서 세 불리하면 출세를 위하여 내빼고 식민지민중을 탄압하고 지배자로서 위엄만 부리는, 행세만 하는 장군일 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줄행랑을 친 맥아더는 1942년 3월 남서태평양전역 연합군사령관직을 맡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로 복귀했다.

그는 뉴기니에서 공격개시를 명령하여 1943년 1월 파푸아진군을 시켰고 미 태평양군은 영웅적 전투로 일본군을 몰아냈다. 미군은 1943~44년의 일련의 전투로 중남부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장악하고 필리핀으로 진군했다.

맥아더에 의해서 필리핀에 투입된 미군은 이 우매한 장군에 의해 발이 묶여 1945년의 7개월을 루손 섬의 진흙바닥에서 뒹굴도록 만들었다. 그가 인식하는 태평양전쟁은 그가 쫓겨난 필리핀이 미 식민지로 복귀하는 일 뿐이었고 거기에서 지배자로 되는 것으로만 보았을까.

그는 1944년 12월 육군 원수로 승진되고, 4개월 후 태평양지역의 미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서야 잠을 깼는지 비로소 사이판으로, 이오시마로, 오키나와로 올라오게 되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조선의 북부에서 조선인민혁명군과 북부 조선인민의 전민항쟁으로 조선해방의 최후결전을 하고 있을 때, 그는 북위 38도선과는 수천 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진 루손 섬에서 그리고 오키나와 섬에서 진구렁에서 죽탕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게 무조건항복을 했다.

이로써 우리 조선은 일제식민지통치로부터 해방되었다. 조선에 있는 일제의 모든 통치기관과 군대는 연합군에게 항복을 하게 되었고 북위 38도선 이남은 미군에게, 이북은 소련군에게 항복하고 무장해제하도록 얄타회담에서 결정되어 있었다.
전후 미국은 단연 다른 제국주의 열강을 제치고 최강의 제국주의로 되었다. 아직 일천하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동맹은 자기나라의 전후복구문제 이외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 소련이 원자폭탄을 가지고 있는 막대한 국력을 가진 미국의 주장에 대해 어찌 맞설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전후처리의 당면적인 문제는 미국의 의도대로 되는 수밖에 없었다.

38선문제도 그 무렵 우리나라에서 아직 수 천리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군대를 가진 나라가 바로 가까이 있는 나라에 대해 38선으로 경계를 삼아 주둔한다는 것은 분명히 도무지 이치에 당치 않는 처사이다. 미국은 당시 국력으로 이 비합리를 관철시키려고 했고 소련은 일본에 투하한 미국의 원자폭탄에 얼어 있었는지 그 비합리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수락하기만 했다.

이처럼 조선의 38선 분단은 미국의 억지주장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은 지금까지 60년 넘는 분단의 시초로 된 것이다.


3. 미군의 남조선강점과 맥아더

미제와 숭미 사대주의자 그리고 미제의 식민지통치의 교육정책을 충실히 받아들인 대부분의 이남 사람들은 조선의 8.15 일제 식민지해방을 연합군의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특히 이남은 미군의 점령을 미군의 승리에 의한 당연한 이치로 알고 그 자체를 해방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승의 영광 위에 빛나는 장군이 맥아더이고, 그래서 맥아더는 영웅이고 우리 이남사람에게는 일본을 내쫓은 해방의 은인으로 비치는 것이다.

이는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을 비롯해서 이남 땅의 역대정권에 의해 교육, 문화, 언론 등으로 조성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거짓된 환상이다. 사람들이 이 환상에서 깨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 환상 속에서 우리들 민중이 깨나기 위해서 맥아더를 이야기해야 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1945년 8월 15일이 되기 전에 이미 우리나라의 북부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결전과 전민항쟁으로 우리민족의 손으로 일제 통치기관을 파괴하고 식민지통치로부터 우리민족 스스로 해방되었고 각 지방에서 주권기관이 자연스레 터전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남은 사정이 좀 달랐다.

당시 조선총독인 아베 노부유끼는 이제 패망 후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받기 위해 시정권을 조선인의 대표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이를 위하여 부하인 정무총감 엔도를 시켜 처음은 송진우에게 교섭을 했지만 송진우는 친일신문인 동아일보 사장을 했던 자인지라 자신이 나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거절했다.

그러자 하는 수 없이 엔도는 조선 사람들에게 당시 이남에서 가장 존경을 받고 있던 독립혁명투사인 여운형을 만나 시정권 이양을 교섭했다. 여운형은, 정치범과 경제범으로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전원석방과 치안과 시정을 조선인에게 맡기고 간섭하지 말 것 그리고 가을추수까지 3개월의 식량배급의 확보, 이 3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이의 수락을 조건으로 이양받기로 했다.

여운형은 이미 일제의 최후의 날이 올 것을 예상하고 일제와 최후결전을 위한 준비로 지하비밀단체인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있었고 그 조직망은 전국적으로 망라되어 있었다.
여운형은 이 단체의 조직과 각 지방의 일제에게 절개를 팔지 않은 애국인사들로 하여금 「조선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를 조직하여 일제통치기관을 접수하고 치안대를 조직하여 치안을 확보하고 시정을 원활히 했으며 인민들의 후생을 담당했고, 당시 해방된 조국으로 물밀듯 들어오는 귀환동포의 원호를 원활히 했다.

그러는 한편 식민지해방 이후 일어나는 문제를 권위 있게 처결하기 위하여 나라의 주권기관을 건설해야 했다. 이를 위하여 각급 지방인민대표자를 선출하고 그 대표자회는 각급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 대표자를 보내어 1945년 9월 6일 서울 경기여고 강당에 회집하여 중앙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정강정책을 채택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그 이틀 후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에 들어왔다.

미군은 그 전날 7일에 전국 방방곡곡 조선 사람이 있을 만 한 곳에 비행기를 띄워 전단을 뿌렸다.

거기에는 미군이 일제의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를 하는 단순한 주둔군이 아니라 조선의 이남 땅을 점령하고 군정을 펴는 점령군임을 밝히고 있다. 그 포고문은 미합중국 태평양군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정말로 어처구니없었으나 소련도 어쩌지 못하는 원자폭탄을 가진 미군인지라 이에 항의할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더구나 그 포고문에는 일제 통치의 원상대로 일제관리가 그냥 복무하고 조선 사람들은 거기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래도 조선 사람들은 원수의 적은 우리 편이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일본의 적인 미국은 우리 편으로 생각했는지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다는 말을 듣고 미군주둔을 환영하려고 인천부두에 몰려갔는데 부두의 경비를 서고 있는 자들은 일본군이었다. 이 일본군은 질서를 잡는다면서 조선 사람들에게 실탄을 쏘아 여러 사람의 사상자를 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일제로부터 조선이 해방되는 사실을 말한 어떤 문건에서도 미군이 조선에 일제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하여 진주한다고 했지 점령하여 군정을 편다는 말은 없었다. 이에 대해서 북조선에 주둔한 소련군은 주둔군사령부라고 했지 점령군이라는 말도 군정청이라는 말도 없었다.

참으로 나라에 힘이 없으면 이런 꼴을 당해도 그냥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맥아더는 그의 부하인 하지를 점령군사령관으로 했고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라는 정식 이름을 달고 점령군으로서 군정을 폈다.

이와 같이 맥아더는 논리적 사고를 전혀 무시한, 그래서 바로 폭력의 논리, 따라서 깡패의 논리를 가지고 자기 자신의 지배욕과 미제의 패권주의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폭력의 무법자임을 스스로 나타내었다.


4. 6.25전쟁과 맥아더

6.25전쟁을 두고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가지고 사람들의 사상을 재단한다. 그 재단방식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승만 정권과 그 전통을 이어받은 역대 군사정권 그리고 민간정권이라 하는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이 선 이후 줄곧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2분법논리, 미군정이 들어와서 시작된 OX문제식 해답으로 하는 사상검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6.25전쟁을 남침이라고 하면 영락없이 국가보안법에 걸린다. 남침도 되고 북침도 된다고 하면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해서 취직도 안 되고 그래서 먹고 살기가 말이 아니다.

이렇게 길들여져 왔으므로 설사 그것이 틀리더라도 그릇되게 주입되면 그것이 바른 것으로 인식되어 머릿속에 콱 박히게 된다.

사실 6.25전쟁은 그 시작의 시점을 잡는 데 따라 북침도 되고 남침도 되는 것 같다. 당시 그처럼 38도선 상에서 일상다반사로 충돌이 있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발생된 그 시대의 상황을 분석해서 누가 전쟁을 도발했는가, 전쟁에서 이익을 보는 쪽이 누구이며 손해를 보는 쪽이 누구인가를 분석해서 어느 쪽이 어떻다는 정도의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맥아더의 6.25전쟁에서 역할을 알기만 하면 되므로 전쟁이 발생된 그 시대의 상황을 분석해보기로 하고 결론은 내리지 않기로 한다.

당초 미국은 남조선에 일제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하여 주둔한 미군을 점령군으로 탈바꿈하여 들어온 이상, 철수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더구나 일제의 항복과 무장해제 이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철수한다는 의사는 조금만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1947년 3월에 트루만이 의회에서 발표한 독트린을 보아서 명백히 알 수 있다. 미국의 대 소련 포위망 구축을 내용으로 하는 그 독트린에서 조선반도의 역할이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미ㆍ소공동위원회 사업을 파탄 냈으며, 전후문제를 취급하지 않는다는 국제연합의 헌장을 짓밟고 전후처리문제의 하나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한 조선 문제를 국제연합에 가지고 가서 남조선단독선거를 실시하고 남조선에 그들의 예속정권으로서 이승만 정권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를 반대하고 분단을 받아들지 않는 모든 세력들이 협상을 벌여 전 조선적인 대표자를 선출하여 비록 북조선에만 그 권위가 통하지만 명분상으로는 전 조선적인 정권으로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조국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기회 있을 때마다 북진통일을 부르짖고 북조선의 공화국은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통일하자고 호소했다.

이승만 정권은 남조선의 통일세력을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살인적으로 탄압하여 다스렸고 남조선 인민들은 줄기차게 자주통일을 위해 투쟁해왔다.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투쟁했으나 일부 세력은 무너졌지만 다른 일부세력은 2년 후 5.30총선거에 크게 진출하여 다음 2년 후에 있을 대통령선거에 이승만 정권은 무너지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바로 미제의 대조선반도정책의 실패로 귀결되고 미제는 조선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제는 전후복구에 의해 일시적으로 상승되던 경제가 하강을 맞고 있어서 경제회복의 기회를 만들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를 위해 지구 상 어디든 분쟁이 조성되어 군수산업의 경기를 되찾아서 경제회복을 도모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조선반도에서의 분쟁이다.

조선반도의 전쟁은 당시 38도선 상에서 항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충돌을 그 규모를 키우면 되는 것이다.

2년 후 권좌에서 쫓겨나게 될 이승만은 전쟁을 일으키는데 혈안이 되어 도쿄에 있는 극동군사령부로 날아가서 맥아더를 만났고, 워싱턴의 당시 트루만 대통령의 고문이고 나중에 국무성 장관으로 된 존 포스트 덜레스, 이들 3자의 연락이 빈번해지더니 덜레스가 1950년 6월 19일 남조선을 방문하고 국회에 연설하며 38선을 시찰하는 등 돌아가다가 1주일 만에 전쟁이 일어났다.

그래서 6.25전쟁은 이승만과 맥아더 그리고 덜레스 3사람의 작품으로 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맥아더는 호전가의 기질을 여지없이 발휘했다.

맥아더는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있는 미군을 즉시 동원하여 우리민족 내부문제에 무력으로 간섭하여 전쟁을 확대시켰다. 그는 스스로 조선에 날아와 공황상태로 허물어가는 국군을 그의 휘하군대로 받쳐 주고 이승만 정권의 명맥을 이어주었다. 이승만에게는 정말로 은인이었지만 북진통일을 부르짖는 분단의 원흉을 살려줌으로써 우리민족의 통일을 적극적으로 방해한 자주통일의 방해자로 되었다.


'Unews에 게재 2005. 9. 12.'

미군주둔 60년, 우리는 왜 맥아더를 이야기해야 하는가(1)

[이 글은 2005년 9월, 인천 월미도에 있는 이른바 <맥아더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라는 농성시위를 하던 때에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의 홈페이지 측의 요청에 의하여 3번으로 나누어 맥아더의 우리나라에 대한 범죄를 폭로하기 위하여 쓴 글입니다. 그중 첫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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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머리에

주한 미군이 우리나라의 38도선이남 땅에 들어온 지 올해로 꼭 60년이 된다. 국제적으로 인정된 미군의 주둔 명분은 일제 침략군에게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를 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미군은 우리나라의 이남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그들은 그러한 명분을 집어던지고 진주군으로서가 아니라 점령군으로서 들어왔다. 바로 맥아더는 그 점령군을 지휘하는 미국 태평양군의 총사령관이고, 주둔군의 명분을 집어던지고 점령군으로 모습을 바꾸어 조선인민에게 점령군 포고령을 반포한 그 장본인이다.

지금 우리는 일제식민지해방 60년이 지나도록 일제 식민지시대에서 자기 민족을 배신하고 동포들에게 고난을 들씌운 반역자들을 아직까지도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돌아보면서, 우리사회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는 일을 전 민족적으로 벌이고 있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해방된 조국에서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ㆍ민족반역자들의 치 떨리는 죄상을 되돌아보고 그들과 그들 후손들의 현주소를 알아보곤 사람들은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기막힌 일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 대부분이 일제 주구에서 미제의 충실한 주구로 변절하여 계속 일제 식민지시대의 친일주구로서 가졌던 기득권을 고스라니 이어받고 이승만 예속정권의 창건에서부터 역대 예속정권의 핵심적 세력으로 역할을 다했다는 사실이다.

미제는 식민지민중을 직접 통치하는 전전의 식민지통치방식을 바꾸어 식민지 점령지역에서 친미세력을 중심으로 해서 구성한 주민들로 예속정권을 만들어 정치ㆍ군사ㆍ외교ㆍ경제ㆍ문화ㆍ교육 등 각 분야에서 각종 조약과 원조 그리고 고문 등으로 얽어놓고 그들의 식민지통치정책을 구현해나가는 새로운 식민지통치방식을 취했다. 우리는 이것을 신식민지정책이라고 정식화하고 있다.

미제는 우리 땅에서 일제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마치고 38선 이북에 주둔한 소련군과 공동위원회를 열어 남과 북을 통일한 단일 정권인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워서 철군한다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짓밟고, 이남 땅에 단독선거를 실시하고 이러한 신식민지예속정권을 만들었으며, 그 핵심세력이 바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숭미 사대주의자들인데 그것은 바로 일제 식민지시대의 친일파ㆍ민족반역자와 친일 지주들이었다. 이들을 이어온 자들이 바로 지금의 반통일세력을 이루고 있으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예속정권의 정통성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과거청산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온 사회가 이에 대해 주목하고 그 귀추를 주시하고 있다. 또 「우리민족끼리」라는 민족적 이념으로 6.15공동선언을 이행하여 낮은 단계의 연방과 연합을 합친 통일을 위하여 매진하고 있는 6.15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래서 분단 60년을 맞이하여 민족의 자주평화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일이 바로 우리들 앞에 나서고 있다. 그래서 남과 북 그리고 해외의 온 민족이 올해를 「주한미군」철수의 원년으로 해서 힘차게 투쟁을 벌이고 있다.

주한미군철수운동에서 우리들 앞에 가장 먼저 나서는 일로 「주한미군」이 점령군의 모습으로 들어오게 한 최고사령관이고, 6.25전쟁을 일으킨 자들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자들 중의 하나이며, 조국의 이북 땅으로 쳐들어가 몰죽음을 당해 쫓겨나오자 이북 땅에 핵폭탄을 사용해 핵 완충지대를 만들려고 했던 핵전쟁광으로 아직도 인천 월미도 공원에 있는 그 맥아더의 동상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이리하여 이에 대한 철거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이에 대해 수구반동 반통일세력들이 이 운동에 맞서 나오고 있다.

그들은 미제와 미제에 빌붙은 친일교육자가 변절해서 팔자를 고친 친미교육자와 숭미 사대 미디어에 의해 60년을 교화ㆍ세뇌된 친미ㆍ숭미사상이 골수에까지 젖어 아직도 깨나지 못하고 있는 동포들이다. 미제의 이른바 ‘네오콘’ 등 온갖 국제적 모략이 그들 뒤를 받치고 있고 지원을 하고 있다. 어찌 쉽게 민족자주적 입장으로 돌아오겠는가. 우리들은 이들에게도 동포애를 가지고 교양선전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고 이들의 생각을 바로 세우는 것도 민족자주성을 구현하는 투쟁이다.

6.15시대를 맞아 주한미군철수운동이 한창일 때 강정구 교수가 「주한미군」의 부당성과 이를 해설하기 위해 6.25전쟁의 본질을 해설하는 논문을 썼다 해서 당국은 이를 국가보안법으로 걸어 조사를 벌이고 있다. 아직도 국가보안법은 시퍼렇게 눈을 부릅뜨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그 숨을 들이쉬고 있다.

강정구 교수의 논문은 학술적 표현이다. 그런데 이를 걸고 국가보안법으로 조사를 한다고 하니 당국은 시대의 흐름을 아직도 모르는가. 지금은 6.15시대, 남과 북이 서로 내왕하고 통일을 위해 서로 의논하고 이해를 함께 하려고 모대기고 있는 시대이다. 강정구 교수의 논문은 우리민족끼리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루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주한미군」문제를 다루고 이를 위하여 6.25전쟁의 본질에 대한 자기의 학문적 견해를 내었고 이어서 맥아더 동상철거문제를 언급했을 뿐이다.

당국자들은 이제 시대의 흐름을 인식하고 시대의 지진아에서 벗어나 국가보안법을 당장 폐지해야 할 것이다. 민족은 자주통일을 향해 나가는데 이를 가로 막고 국가보안법을 휘두르는 것은 바로 반민족적인 행위로 될 수밖에 없다. 당국은 하루속히 이 반민족적인 탄압을 걷어치우고 자주통일의 길에 함께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이 글은 「주한미군」철수운동의 시초에서 바로 마주 선 맥아더 동상철거문제에 즈음해서 맥아더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그가 과연 우리민족의 은인인가, 침략자의 원흉인가 하는 이야기를 우리는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 맥아더의 아버지와 미서전쟁(米西戰爭)

맥아더는 미국 아칸소 주(州)의 리틀록에서 출생했다. 미국-스페인전쟁(미서전쟁-美西戰爭)에서 무공을 세운 고급장교인 아서 맥아더의 아들로서 1903년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그 후 육군에 근무하여 1930년에 대장으로 승진했다. 군에서는 극동통으로 알려져 있고, 1936년 필리핀군의 고문으로 근무하다가 1937년에 일단 퇴역했다.

대일관계가 긴박하게 되자 1941년 7월에 현역에 복귀하여 미국 극동군사령관으로 필리핀에서 근무하다가 태평양전쟁을 맞았다.

1942년 초 일본군의 공격으로 마닐라를 빼앗기고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 연합군 남서태평양방면사령관으로서 대일작전을 지휘했다.

그 해 가을부터 뉴기니작전을 비롯하여 반격작전을 전개하였는데, 1945년 7월에는 필리핀을 완전히 탈환했고 이어 8월에 일본을 항복시켜 일본점령군최고사령관 및 대평양지역 주둔미군최고사령관으로 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제연합군(UN군)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고 전세를 역전시켜 인민군을 후퇴 시켰다고 하는데 1950년 10월에 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대공세를 맞아 패퇴했다.

맥아더는 이북을 점령하여 군정을 펴고 이북마저 식민지로 하려고 30만의 대병력을 투입하였으나 이들 병력을 몽땅 잃어버리고 마침내 그러한 꿈을 깨도록 만들었다.

이에 분한 나머지 그는 만주폭격과 조ㆍ중 국경 봉쇄를 주장했으며 대만의 국부군을 전쟁에 참가시켜야 한다고 주창했다.

맥아더는 그가 패퇴한 분을 보복하려는 셈인지 조ㆍ중 국경 이남에 핵폭탄을 투하하여 핵 완충지대를 만들어 우리나라를 영원히 핵 참화 속에 두려고 했던 천인공노할 전쟁광의 원흉이다.

이와 같이 6.25전쟁을 핵전쟁으로 비화시키려는 기도는 국제여론을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이를 둘러싸고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이 격화되었으며, 끝내 1951년 4월 사령관의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이상이 아주 짧게 추린 맥아더의 약력이다.

여기에서 맥아더 부자의 집안은 바로 미국 독점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전변되어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의 시작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미제의 침략전쟁과 그 세계패권주의와 더불어 그 생을 다한 자들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먼저 그 아버지인 아서 맥아더가 공훈을 세웠다고 하는 미서전쟁에 대해서 알아보자.

미국은 1850년대에 노예문제로부터 일어난 위기와 남북전쟁, 그 전후의 재건 그리고 대서부로의 개척과 사회개혁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1890년대에 들어서자 산업자본이 고도로 성장하여 독점자본의 형태를 띠게 되었고 선발 유럽 제국주의에 비해 늦기는 했지만 그때부터 해외 자본진출과 이를 위한 식민지쟁탈의 경쟁에 들어서는 제국주의로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1850년대부터 카리브 바다에 있는 쿠바에 설탕산업을 진출시키고 있던 미국 산업자본주의는 제국주의적 독점자본의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하자 당시 쿠바의 지배자인 스페인과 이해관계의 충돌이 벌어져 그것이 날이 갈수록 첨예화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쿠바에 4,000만 내지 5,000만 달러에 이르는 자본을 설탕과 담배공장, 제당공장, 망간과 철광의 광업 등에 투자하고 있었고 미국과 쿠바의 무역은 연간 1억달러에 이르고 있었다. 미국은 쿠바의 내전이 이러한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 크게 손실을 가져오게 되자 쿠바에 자본을 투자했거나 쿠바와의 무역에 종사했던 미국인들은 전쟁의 종식을 강력히 요구했고, 쿠바내전에서의 스페인 지배자들의 야만적인 행위는 미국인들의 인도주의적, 종교적 감정을 크게 자극하기도 했다. 특히 강제수용소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가해진 고통과 죽음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은 컸다.

이상과 같이 미국 독점자본의 이해관계와 야만적이고 잔학한 스페인 지배자들에 대한 도덕적 감정 등이 작용하여 미국의 쿠바에 대한 제국주의적 진출의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쿠바내전에 대한 미국의 군사간섭의 기회가 점차 무르익어갔다.

처음은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1895년 6월 중립선언과 1897년 클리블랜드를 승계한 맥킨리 대통령의 불개입선언으로 개입을 주저해왔지만 신문 등 여론으로 스페인 지배자들의 야만성과 잔학성을 과장해서 선전하고 전쟁개입을 선동했다.

1898년 1월, 수도 아바나에서 쿠바의 혁명세력은 완전한 독립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수락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 미국 정부는 쿠바 내의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불안상태가 계속된다면 강력한 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결의를 보이기 위하여 전함 메인호(Maine) 한 척을 아바나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여 사태가 위기로 치달았다.

게다가 미국주재 스페인 공사가 쿠바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가 쿠바의 한 혁명가의 손에 들어갔다. 그 편지에는 맥킨리 미국대통령을 모욕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이 내용이 1898년 2월 9일자 신문에 보도되어 미ㆍ서 양국 간에 나쁜 감정과 불신을 크게 조장시켜 놓았다.

이런 스페인공사의 편지사건이 있은 지 불과 6일 만에 2월 15일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이던 메인호가 폭발, 침몰하면서 266명의 미 해군수병이 살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메인호의 비극은 미국의 호전가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들의 신문들은 미국이 명예를 지키려면 쿠바사태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즈벨트 같은 제국주의자들은 메인호의 침몰은 명백히 스페인의 음모라고 하면서 스페인을 맹렬히 규탄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의회는 만장일치로 전쟁준비를 위하여 5,000만 달러를 배정했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메인호 폭침은 전쟁 도발자들에 의한 모략이라고 하는 말도 있다. 마치 훗날 베트남 통킹 만의 미 구축함의 피습으로 하노이폭격을 시작해서 베트남전쟁에 미군이 개입하는 계기를 만든 것처럼 미국이나 일본이 잘 쓰는 모략과 똑같은 것이라고 할까.

1895년에 일어난 쿠바의 반란에 즈음해서는 미국이 처음부터 그 반란의 와중(渦中)에 휩쓸려들었다. 이미 많은 의용병이 쿠바인민을 돕기 위해 쿠바로 떠났고, 또한 뉴욕에 본거지를 둔 쿠바인의 혁명단체가 발매한 공채도 잘 팔렸다. 해외진출에 반대한 미국인들조차 쿠바의 해방 자체에는 찬성했고, 쿠바에 재산을 둔 미국인은 물론 그 보호를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과 미국 사이에는 직접 전쟁을 유발할만한 중요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는데, 호전가들은 여론을 일으켜 스페인의 쿠바인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그것이 학대라든지, 압정이라는 식으로 실제보다 확대해서 신문에 보도되어 미국인으로 하여금 스페인에 악감정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의회가 결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불간섭 방침을 견지하였으나, 매킨리는 1896년에 실시되는 대통령선거에 공약으로 쿠바의 독립을 내세웠다.

마침내 1896년 4월 11일 대통령은 대 스페인 개전요청교서를 의회에 보내고, 20일 의회가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양국은 정식으로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미국군은 마닐라 만과 산티아고 등 여러 곳에서 승리를 거두어 전쟁은 불과 수개월 만에 끝났다.

전쟁결과 12월 10일에는 파리조약이 체결되어 쿠바는 독립하기로 하고,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은 미국의 영토로 되었다.

이 전쟁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아버지 아서 맥아더가 고급장교로 참전하여 공훈을 세웠던 것이다. 아서 맥아더는 이 공훈으로 장군별 준장을 달았고 필리핀으로 전근했다. 필리핀 점령군사령부에 근무하다가 1900년에는 소장으로 승진되어 필리핀 제8군사령관 및 군정장관에 임명되었다. 1906년 육군 중장이 되었고, 1909년에 퇴역했다.

이 장군의 아들인 더글러스 맥아더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아 군인다운 풍모를 갖추며 자랐고, 미군의 엘리트 장교 양성기관인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에서 미 육군 장교로서의 세계패권사상을 닦으며 졸업했다.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는 입학지원 자격과 지명권을 미국의 상원ㆍ하원 의원들이 대부분 행사하는 미국군인의 엘리트양성을 위한 학교로서 미국의 세계패권주의의 첨병을 양성하는 선민교육기관이다.

이 학교의 교육으로 선민의식이 충만한 청년이 만들어졌으며, 그들은 출세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오직 별을 얻기 위하여 굴종하고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는 우월감으로 대하는 지배욕으로 가득 찬 특수한 풍모를 가진 인간으로 양성된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아버지시대부터 인연이 맺어진 필리핀에서 대장으로 승진했고, 1936년 필리핀군의 고문으로 근무하다가 1937년에 퇴역했다. 퇴역 후 식민지지배자의 자리에서 향락을 누리다가 대일관계가 긴박해지자 1941년 7월 현역에 복귀하여 미국 극동군사령관으로 필리핀에서 근무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인 태평양전쟁을 맞았다.

이처럼 맥아더의 부자 2대는 미서전쟁과 뗄 수 없는 인연을 기진 인물로서 식민지통치, 그것도 미국식 식민지통치와 식민지 침략전쟁 속에서 식민지 지배방식과 식민지민중의 해방투쟁을 학살 탄압하는 골수의 식민지 군사지배자였다. 그들 부자를 세계패권주의자가 볼 때는 가장 우수한 지배자의 자질과 능력을 가진 자로 보였고, 식민지민중이 볼 때는 가장 잔악한 전쟁광신자요 학살의 원흉으로 보이는 인생을 산 자들이다.

미국은 쿠바를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켰으나 독립시키지 않고, 존 R 브룩(John R Brooke)을 쿠바총독으로 임명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3년 동안 총독군정을 실시하면서 학교를 세우고 공중보건시설을 세우면서 쿠바가 미국에 종속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후에 미국은 1901년에 공화제헌법을 만들어주었지만, 이와 동시에 미국의 내정간섭과 군사기지의 설치를 인정하는 󰡔플래트수정조항󰡕을 덧붙이고 1903년부터 99년간 관타나모 만 등을 조차 받아 미 해군기지를 설치했다.

미국의 총독군정정치가 종결되고 1902년 5월에 팔마를 수반으로 하는 공화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미국이 내정간섭권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비옥한 땅, 사탕산업, 교통수단, 관광시설 들 쿠바의 중추적 경제는 모두 미 독점자본에게 장악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수뢰, 부패, 실정, 무책임의 상징으로 인정되고 있는 고메스에 이어 가르시아, 사야스, 마차도, 바티스타로 그 부패의 전통을 이어오면서 친미예속 부패정권의 표본으로 되고 있으며, 미제는 이 쿠바의 예속정권에 의한 식민지통치의 경험을 살려 제2차세계대전 전후의 신식민지통치방식을 정립했다고 볼 수 있다.



'Unews에 게재 2005. 9. 12.'

2009년 5월 18일 월요일

굴곡된 우리 현대사의 시작

[아래 글은 <월간 말> 2009년 6월호에 게재한 글인데 저와 게재한 <월간 말>측 모두 청년학생들의 현대사의 확실한 인식을 위하여 쓴 것입니다. 그리고 게재된 글은 표현이나 의도하는 바에서 이 글과는 다른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월간 말> 편집 측에서 제 원고를 그냥 쓰기가 사정 상 좀 꺼끄러운 점이 있어서 표현을 약간 고쳐 본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그 입장을 충분이 양해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독자도 저와 같은 뜻으로 생각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60년 현대사에서 미제는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이때까지 이남체제에 대한 신식민지적 경영(정치, 군사, 경제, 문화 사회의 모든 경영)의 주체자로서 그들의 예속정권을 통하여 지배・경영해왔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조국의 남부 정권은 미제의 신식민지적 본질이 더욱더 분명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교육은 이러한 우리의 신식민지적 현대사를 은폐하고 완전한 자주독립의 국가로 그 종주국으로서의 미제와 대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가 어려울 때는 언제나 도움을 주는 ‘언클 톰’의 나라로 인식되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미제는 우리 조국의 남부의 60년 현대사를 군사점령상태로 해서 역사의 구비마다 간섭하고 때로는 그들의 주구로 하여금 자주와 민주, 평화와 통일의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가로막아 나섰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남부 단독선거에 의한 이승만 정권의 창출을 비롯해서, 4.19청년학생의 봉기가 민주혁명으로 시동되고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운동으로 나아가자 박정희로 하여금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도록 해서 군사깡패들의 폭력으로 짓밟아버리게 했다.

그들이 내세운 이 박정희도 그의 부하인 김재규에 의해서 사살되었다고 하나 그 죽음의 의문은 안개에 가려져 있다. 아무튼 박정희의 제거는 정치, 군사, 경제에서 미제와 갈등을 빚는 고분고분하지 못한 예속정권에 대한 당연한 결말이기는 하지만 학살과 폭압의 원흉은 제거되었다. 그 후계자로서 전두환이 나서서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 일컫는 몇 달동안의 아주 조그마한 자유, 그 자유가 자주평화통일의 길로 틀림없이 구비 틀 것을 예상해서 광주학살로 짓밟도록 만든 장본인으로서의 미제의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전으로 조선에 북위 38도선 이남의 일본 식민지총독정권과 그 무력으로 조선군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하여 진주한 미군이 점령군으로 돌변하여 미제가 조국의 이남으로 들어온 것이다.

우리는 그 8.15일제해방의 역사적 사실과 우리민족으로서 그 의의를 올바르게 앎으로써 우리 현대사를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이남의 현대사는 미국에 의해 굴곡이 되었건, 가령 미국이 이남 땅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이 8.15민족해방으로부터 씌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도권 교육에서 현대사는 8.15해방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으로 일본식민지정권을 물리치고 약소민족인 우리 민족에게 베푼 것이라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과연 그런 것인가!


8.15민족해방의 의의

우리나라는 19세기 영․정조 시대부터 자본주의의 맹아가 트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의 봉건체제는 이 시대에 이르러 농민과 양반지주 사이의 모순이 격화되고, 농민도 도시빈민과 지주로 양극분화가 이루어졌으며 수공업의 규모가 커져 상업자본이 객주와 전주의 형태로 성장되고 있었다. 이 상업자본은 대규모의 수공업적 생산자본으로 성장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근대사상이 자생적으로 실학사상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미 근대화를 마치고 산업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선 서유럽 열강들이 동부 아시아에 그들의 식민지를 찾아 물밀 듯이 들어왔다. 인도, 베트남, 말레이지어, 중국, 일본으로 밀려들어와 그들 나라를 식민지로 또는 반식민지로 만들었고, 우리나라에는 대원군시대에 포화로 위협을 하고 침략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반항했지만, 1876년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해서 여러 열강들이 이 땅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들의 근대화가 이들 제국주의에 의해서 그 방향이 반식민지로 틀어지게 되었다. 좀 일찍이 근대화를 시작해서 서유럽식의 근대화를 본 딴 일본이 제국주의적 식민지 쟁탈에 동참하여 우리나라에 대한 서유럽의 제국주의의 이해관계를 받아 안고 지난 20세기초부터 나라의 주권을 강탈하여 우리나라를 그들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고 말았다.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무단정책으로 가장 악랄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우리나라는 자주적인 근대화의 길이 막혔고 일제에 의하여 봉건적 토지관계가 그대로 온존된 데다가 온갖 봉건적 유제마저 그대로 껴안고 있는 반봉건사회로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광복운동은 일제를 타도하여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쳐부숴 이 땅에서 몰아내고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에 심어진 일제의 모든 잔재를 청산하는 민족해방운동임과 동시에, 일제가 온존한 봉건적 토지제도와 그에 기반된 온갖 봉건적 유제를 타도하여 새로운 근대적 나라를 건설하는 민주주의운동으로서, 지난 시대의 봉건사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혁명운동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바로 민족해방민주주의운동으로서의 사회혁명인 것이다.


8.15전후의 민족해방투쟁

일제의 대륙침략은 41년 12월에 대평양전쟁으로 확대되고 이 전쟁으로 일제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1945년에 들어서자 일제는 멸망의 마지막 숨결을 모으는 듯 조선에는 그 지독한 유생, 무생의 역량수탈도 그 힘이 현저히 줄어들고 치안력마저 약해졌다. 곳곳에 철도폭파, 징용, 징병, 학병으로부터 그리고 수탈에 저항하다 도망한 자들이 속출하고, 평양의 일본군 연대에서는 대대적인 조선청년의 집단탈영이 이어졌다. 이는 일본의 마지막 모습을 잘 보여준다. 마침내 지리산에서도 이현상 선생이 징병, 학병 도망자, 수탈에 저항하다 도망한 청년들을 모아 무장대를 조직하고 있었고, 함양경찰서를 습격하여 불태우고 무장을 탈취하여 일제와 최후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선의 여러 산악지대에서는 연합군이 상륙하면 일본군의 배후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한 무장대의 준비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1930년대부터 백두산 밀림을 근거지로 하여 일제의 100만 관동군과 조선군 20만, 만주괴뢰군 40만을 상대로 백전백승의 유격전을 벌였던 김일성 장군의 조선인민혁명군이 조국해방의 최후결전을 위하여 백두산 밀영을 근거지로 해서 활동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의 대일선전포고에 앞서 8월 8일 새벽, 김일성 장군의 조선인민혁명군이 두만강가의 당시 웅기군 토리에 있는 일본군의 요새를 격파하여 국내침공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8월 9일 소련의 대일선전포고와 더불어 김일성 장군은 조선인민혁명군에게 항일무장투쟁의 최후공격을 명령했다. 이를 기념해서 웅기군을 「선봉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노도와 같이 국내로 들어왔고, 이미 조직되어 있던 조국광복회 산하의 무장돌격대는 일제의 경찰관서와 통치기관을 접수했으며 조선인민혁명군을 일본군의 퇴로로 인도하여 적을 섬멸시켰으며, 또한 조선인민혁명군은 대일작전에 참가한 소련군대와 연계를 취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조국을 해방시켜나갔다.

한편 이남에서는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소련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이 파죽지세로 밀려오자 일제의 아베 총독을 우두머리로 한 일제 통치배들은 그들의 생명보호를 위해 시정권을 조선인에 넘겨주기로 했다. 처음은 친일신문 「동아일보」 사장을 했던 송진우에게 부탁하였으나 송진우가 감당할 일이 못되는 지라 거절당하고, 하는 수 없이 여운형 선생에게 엔도 정무총감을 보내어 부탁했다.

여운형 선생은, “1. 감옥에 가두고 있는 모든 정치범, 경제범을 석방할 것, 2. 향후 3개월 동안(추수 때까지) 1인 1일 3합의 식량배급을 보장할 것. 3. 조선인이 하는 일에 일체 간섭하지 말 것.” 등 3가지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을 다짐받고 시정권을 받아들였다.

여운형 선생은 1944년 8월부터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에게 마지막 타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건국동맹」의 3불맹세(三不盟誓 - 1. (不名)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2. (不居) 거처를 말하지 않는다. 3. (不文) 글을 남기지 않는다.)로 유명하다.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시키고 있던, 이 조직을 핵심으로 하여 조국의 남부 전역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해방직후의 혼란한 치안을 확보하고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또는 수탈과 탄압에 못 견디어 조국을 떠나게 된 동포들의 귀환을 원호하면서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모두가 하나같이 떨쳐나서도록 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정권기관을 창출하기 위하여 먼저 동・리와 면・군의 지방정권기관으로서의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이들이 각급지방의 대표를 선출하고, 9월 6일 서울 이화고등여학교에 모여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정강」과 「중앙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로써 남과 북은 모두 각급 주권기관을 창출하고 중앙정권기관을 내와서 이제 통일정권을 내오는 일만 남은 것이었다.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첫 단계가 우리민족의 손으로 빛나게 승리한 것이다. 이제 일제의 모든 식민지잔재를 청산하고 남녀, 귀천, 사상, 종교, 정치 등 모든 차별을 철폐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와 같이 미군이 조국의 이남에 들어오기 전에 일제의 총독부가 자기들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 통치권을 넘겼고, 이북은 바로 총대로 일제 통치기관을 짓부숴버렸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8월 15일에는 이미 우리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고, 이때 미국은 저 멀리 오키나와에서, 그리고 필리핀의 루손 섬에서 정글의 진창에서 허덕이고 있지 않았던가!


일제의 식민지에서 미제의 식민지로 된 이남 땅

일제의 항복을 받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하기 위해 상륙할 것으로 알고 있는 미군이 상륙을 앞두고 일본군과 총독부에게 미군이 상륙할 때 일본군이 무장하여 경비하고 질서를 지키도록 할 것과 미군의 허락이 있을 때까지 부서를 지킬 것을 명령했다.

9월 7일, 미군은 인천에 상륙했다. 순진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적의 적은 우리 편’이라는 단순한 형식논리로 수많은 사람들이 인천부두로 전승국 미군을 환영하러 나갔다. 일본군은 철모르고 환영하러 나온 군중에게 총질을 해서 수많은 우리 청년들을 죽이고 상했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이날 또 미군은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이남 전역에 비행기로 전단을 살포하고 군정을 실시한다고 했으며 군사강점을 선포했다. 그리고 일제의 모든 통치기관은 그대로 온존한다고 했고, 각급 관리들은 직장을 지킬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미군은 총독부에 군정청을 두고 조선의 북위 38도선 이남의 권위는 군정청에 있다고 했으며, 다른 어떤 것도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따라서 「조선인민공화국」은 인정하지 않으며 「중앙인민위원회」와 각급 「인민위원회」는 해체하라고 명령했다. 미군은 지프차에 기관총을 달고 와 각급 「인민위원회」와 「치안대」의 간판을 뜯고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분통이 터진 열혈청년들은 도처에서 저항하다가 총에 맞아죽고 부상을 입었다. 그중에서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곳은 전라남도 화순광산의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미군과 그 앞잡이 경찰에게 다이나마이트로 대항했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진압당하고 말았다. 총대 없는 정권이란 정말로 맥없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했다.

미군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관인 「총독부」관리와 친일지주, 친미종교인, 친일관리,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끌어 모아 「군정청」을 설치했다.

한편, 38도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대륙침공의 첨병부대인 일본군 나남사단 등 모든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이북의 모든 행정권을 이북의 북조선인민위원회에게 이양했다.

이북의 모든 행정권을 이양 받은 김일성 장군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일제의 모든 법령과 통치제도를 타파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실시해나갔다. 그 첫째가 9할이 가까운 농민의 봉건적 착취의 기초였던 봉건적 토지제도의 청산이었다. 즉 모든 토지를 밭갈이하는 농민에게 무상분배하는 토지개혁이었다. 이로써 이북은 한날한시에 지주가 몽땅 소멸되고 말았다. 다음은 8시간제 노동을 기본으로 하는 민주적인 노동법을 선포했다. 그리고 일제가 가지고 있는 공장, 은행, 선박, 교통기관 등 중요산업기관을 국유화했다. 이것은 노동자가 바로 공장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남녀평등권법령을 공포했다. 수 천 년을 봉건적 억압 속에서 살아온 여성들에게 남자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가지게 되었고, 산후 산전의 유급휴가를 받게 되는 등 여성으로서의 신성한 권리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북은 항일투쟁시기에 내걸었던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강령을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정강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20개 정강으로 이루어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해나갔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과 「미소공동위원회」

이남 땅에 미군이 들어오게 된 명분은 미・소 양국의 협정에 의하여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그들을 무장해제하는 것이었다. 미・소 양군은 이 과업을 마치고 적당한 권위를 인정받는 정권을 창출하여 거기에다 권력을 넘겨주고 철수해야 마땅할 것이다.

38선을 경계로 미・소 양군이 일본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결정한 얄타회담에서 합의한 내용에 따라 1945년 12월에 전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영・소 3개국의 외상이 모스크바에 모여 회담을 하고 「조선문제」에 대한 결정을 발표했다. 즉 “미・소 양군은 「미・소공동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선인민의 정당・사회단체의 대표자들과 협의하여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수립을 위한 정강을 결정하고, 이를 미・영・소・중 4개국의 정부의 승인을 받아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고 4개국은 최장 5개년을 신탁통치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신탁통치’란 것은 국제연합 헌정에서의 ‘신탁통치’는 아니고, 러시아어의 원본에는 ‘후견’이라는 말로 되어 있다고 한다. 미제는 이를 모략적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의미를 사상해버리고 그냥 ‘신탁통치’라는 기분 나쁜 보도로 만들어 처음부터 딴지를 걸었다. 이 보도를 보고 우리들은 모두 격분을 했으나 그 내용이 일제의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 한 후 양군이 돌아가기 위해서 하는 정당한 조치임을 알게 되자, 친일파 민족반역자와 미제의 점령 밑에서 출세하려는 친미 숭미 사대주의자들을 제외하고, 절대다수의 민중들은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미제와 이른바 「상해임시정부」에서 분파로 분탕만 일으키다가 미국으로 들어가 독립운동자금이라면서 「임시정부」를 팔아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서 안락한 생활을 하다가 조국이 해방이 되자 미제의 충실한 주구로 된 이승만과 이자가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끌어 모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폭력집단들은 「미・소공동위원회」사업을 백방으로 방해해 나섰다.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5월에 협의대상의 정당・사회단체들에 친일파의 단체까지 넣자고 하는 미국 측의 주장 때문에 무기휴회로 들어가고 말았다.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절대다수의 농민들이 토지개혁으로 제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게 되리라고 고대하던 일이 허사로 돌아갔고, 때마침 모리배들이 미제의 묵인 아래 쌀을 일본으로 대량 밀수출한 결과로 생긴 도시민중의 쌀 소동과 맞물려 10월달에 대구지방 일대에서 항쟁이 터졌다. 사람들은 이를 ‘10월인민항쟁’ 또는 ‘10월폭동’이라고 한다.

하늘도 일제 해방을 축하해주는 듯 전쟁 중 내내 가물어 흉년이었던 것이 해방의 1945년은 대풍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6년 봄부터 시장에 쌀 공급이 줄어들어 쌀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도시민은 그들의 임금으로 식량을 사댈 수가 없었다. 월급쟁이들이 한 달 월급을 몽땅 털어도 쌀 한 말 사기가 어려웠다. 쌀값이 이처럼 뛰어오르자 물가는 쌀값에 미치지는 못해도 덩달아 오를 수밖에 없었다. 6월초에 당국에서 물가지수란 것을 발표했는데 3월말 기준이라고 하면서 1945년 8월 15일을 100으로 할 때 524라고 했다. 불과 반년 남짓 한 기간에 5배나 오른 셈이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쌀 배급을 도시에 실시하려 했지만 쌀은 이미 물 건너 일본으로 가고 만 것이다. 창고에 있던 총독부가 공출로 빼앗아놓은 얼마 남지 않은 묵은 쌀을 털어 일단 서울에 1인 1일 1합의 배급을 해보았지만 며칠이 안 되어 그것도 바닥나고 말았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자 사정은 더 악화했다.

초여름에 보리 수확 철을 맞고 식량 사정이 좀 풀리는가 했더니 도시민의 식량 해결의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미군정 당국이 이른바 군정관리에게 그 해결 방안을 강구하도록 했는데 그 방안으로 꺼낸 것이 일제 총독부가 만든 이른바「식량공출령」이라는 묵은 법률이었다.

군정청은 그들의 졸개 행정기관을 통해 농민에게 보리 공출을 할당하고 공출을 독려했지만 농민의 반발은 격렬했다. 농민조합은 이를 즉각 반대했고 농민들은 조직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군정은 미군이 지휘하는 경찰을 동원해서 강제공출에 나섰다. 미군이 지프차를 타고 뒤따라오고 군정경찰을 앞세워 마을에 들어가 집집마다 뒤지고 빼앗았다. 도처에서 실력행사가 일어났다. 많은 농민들이 붙잡혀 유치장으로 끌려갔고 실력행사 와중에 사상자도 났다.

이리하여「신한공사」가 만들어져서 토지개혁이라는 희망도 사라진데다가 공출까지 당해야 하는 농민은 군정과 이제 영영 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공출소동에 동원된 군정경찰의 모진 탄압으로 경찰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나빠졌다. 이렇게 빼앗은 보리로 배급을 주려고 했지만 그것으로 식량문제 해결에는 새발에 피였다.

쌀소동으로 세상이 한참 뒤숭숭할 때 이승만 박사는 한 말씀했다.

“한국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쌀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될 것을 왜 쌀만 먹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말이 나돌자 사람들은 말했다.

“정말 천황씨 같은 양반이네. 쌀 살 돈도 없는데 고기를 사 먹을 돈은 어디 있는데? 어이구 참, 미국에서 살았다고 고기만 아는가 봐. 그런 사람에게 나라를 맡겼다가는 우리들 다 굶겨 죽이겠다.”

당시 물가는, 왜놈들이 망할 무렵 그들이 앞으로 필경 조선에서 쫓겨날 것을 염두에 두고 그때 쓸 요량으로 많은 조선은행권을 찍어둔 것을 군정청이 차지하여 그들의 군정 비용으로 시중에 아무런 제한 없이 유통시켜서 일어난 것이다.


신식민지체제의 기반구축

미제는 조선민중의 끈질긴 저항을 폭력적 탄압만으로는 군정을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마침내 미제는 「미・소공동위원회」를 다시 열어 일단 민중의 저항을 달래보려고 했다.

미제의 점령군 사령관 하지는 북조선 주둔군 사령관에게 「미・소공동위원회」재개를 제안하고 그 서한을 공개하여 저항을 달래보려고 했다. 거기에는, 먼저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 정부와 민주단체와 더불어 후견안(여기에서는 신탁이라는 말이 없다)을 작성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지는 신탁의 의미를 정하기 전에 임시정부를 먼저 수립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조선민중의 저항에 당황한 미제는 경찰에게 일제히 무기휴대를 금하고 대신 방망이를 가지게 했다. 경찰복장도 일제 경찰의 검은 복장을 없애고 엷은 카키색 미 군복에다 아프리카 식민지 서양 사람들이 쓰던 민간 헬멧으로 바꾸었다. 폭동을 진압한다면서 마구잡이로 잡아간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지시하고 급히 미국으로부터 밀가루와 우유, 설탕, 과자를 엄청나게 대량으로 들여와서 배급이라고 주었다.

뿐만 아니라 미제는 원면을 헐값으로 들여오고 그들이 군수잉여물자로 광목, 낙하산감, 심지어 모기장감의 직물을 마구 들여와 우리 민족경제의 바탕으로 되어 있던 면직, 견직, 마직 공업을 결딴내었고, 화학비료를 무제한으로 들여와 화학비료의 득실을 모르는 우리 농민으로 하여금 마구 뿌리도록 만들어 토지를 산성화시켜 농업생산의 기초를 파괴했다. 민족경제를 그 기반으로부터 파괴하여 경제를 완전히 미제에 예속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미제위 이런 물자의 선심은 결코 그처럼 고마운 원조나 시혜가 아니었다. 남조선 군정이 미제의 금융자본으로부터 대조선차관 2,500만 달러를 빌려다가 태평양방면에 있는 미국의 전쟁잉여물자를 사서 들여온 것이다. 이 차관은 미군이 철수할 때는 그 빚이 조선정부에 이양되고 25개년 기간으로 1951년부터 연리 2.63퍼센트로 매년 분할상환 한다는 것이다.

미제는 알토란같은 쌀을 모리배로 하여금 일본에 갖다 팔도록 해서 떼돈을 벌게 하여 장차 미제의 식민지 경제에서 그들의 주구가 되는 매판자본까지 키웠고, 쌀을 달라는 아우성이 폭동으로 번지자 귀한 외환을 빚내어 과자부스러기나 사다가 안겨서 달래는 한편, 자립적 민족경제의 기반까지 파괴하는 일석이조의 사기를 치는 것이었다. 미국놈의 원조가 바로 그렇고 차관이 바로 그렇지 않는가.

특히 미군정은 2월 21일 일제가 조선농민으로부터 강탈해간「동양척식주식회사(약칭 동척)」의 땅을 일본의 소유로 규정하여 적산이라는 이유를 들어 미군정의 소유로 하고「신한공사」라는 것을 만들었다.「신한공사」는 조선정부와 독립된 기관으로서 사장은 미군 장교로 임명하고 조선정부는 어떠한 권한도 없다고 했다. 공사에 관계된 범죄는 미군의 군사재판이 담당한다고 발표했다. 미군정이 말하는 조선정부란 그때 3상회의 결정으로 수립될「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독립이 된 후에도 그 땅을 미국의 재산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강도가 탈취한 것을 보다 힘센 새로운 강도가 빼앗아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제 것으로 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해 농민들은 결사적인 반대투쟁을 조직하고 저항했지만 총칼을 가진 미국 놈들에게 속수무책이었다.

실제로 미군정은 3월 11일에「신한공사」의 법률을 제정 공포하고 왜놈들이 강탈해간 조선 사람의 땅을 제 것으로 차지하고 그 땅에서 소작료를 받았다. 미군정은 소작인들에게 군사재판으로 위협했고 그해 가을부터 약 3할의 소작료를 강탈했던 것이다.

해방군의 너울을 쓰고 들어온 미제는 이때부터 침략의 의도가 노골화되어 갔다. 미제는 일제가 조선에서 차지하고 있던 모든 중요산업과 일인의 개인재산까지 전부를 점령군이 점유한 재산으로 결정하고「적산관리부」를 만들어 차지했다. 이로써 미제는 조선의 대부분의 부동산, 동산을 차지한 것이다.

또 미제는 남조선을 문화적으로도 식민지화하려는 기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해방 후 경성대학과 각 전문학교는 거기에 있는 조선인 교수들의 열성적인 활동으로 교수를 새로이 초빙하고 학생자치회와 더불어 자치경영하고 있었다. 미군정이 학원을 간섭하기 전에는 참으로 학문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었다. 미군정과 군정 관리는 이것이 못마땅했고 자유주의적인 교수와 사회주의 경제학을 연구하는 교수들의 새나라 건설의 자주적인 일군을 양성하는 일이 특히 눈에 가시처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되자 학문의 자유에 대해서 가장 열렬한 도상록 교수와 사회주의 경제학자로 일제 때부터 탄압을 무릅쓰고 연구에 전심해서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낸 것으로 유명한 백남운 교수를 본보기로 해서 일차적으로 파면했다. 그것은 앞으로 식민지 교육정책으로 내놓을 이른바 「국대안」을 위한 전주곡이었고 다른 교수들에 대한 위협이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이르는 「국대안」이란 6월 19일에 발표한 이른바 「국립서울종합대학안」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미군정이 학교 경영권을 가지고 군정에서 관제로 이사회를 조직하여 대학의 경영을 맡긴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것은 또한 서울에 있는 일제 총독부의 관립 도립전문학교와 수원에 있는 농업전문학교를 한데 통합한다는 것이다.

6월 19일 이른바 「국대안」이라는 것이 나오자 전국의 학원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제일 먼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전에서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어 서울대학을 비롯해 「국대안」에 들어갈 전문학교들이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연이어 다른 학교들도 동정 휴학을 선포했다. 나중에는 중학교도 이에 동조해서 군정청의 민족교육을 무시한 교육정책을 비난하고 진보적인 교수와 교사의 해임을 반대하며 즉각 복직시킬 것을 주장해 동맹휴학으로 나섰다.

미군정의 교육당국은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자 국립서울대학교의 총장은 조선인으로 한다고 무마해 나왔지만 이미 그들의 식민지교육정책의 마각이 드러난지라 믿을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동맹휴학의 열풍은 지방으로까지 번져나갔다.

미군정은 한편으로 회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탄압을 강화했다.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교수, 교사를 다른 구실을 붙여 학교에서 축출했고 학생들은 학원에서 퇴학시켜 추방했다.

당시 사회는 일제로부터 막 해방이 되어서 일제의 우민정책으로 대학이나 중학교의 교사로 임명할 수 있는 정식 자격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중학교 교사 중에서 실력이 있고 자발적으로 학문을 꾸준히 연구해온 학자들이 대학의 교단을 담당했다. 여기에 곁달아 수단 좋은 사람들도 줄을 달아 대학으로 올라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중학교도 마찬가지로 공인된 정식교사가 아주 적었다. 갑자기 불어난 중학교 교원의 수요를 감당할 수가 도저히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교원 중에서 일부 실력 있는 자들이 중학교 교원으로 올라왔다. 여기에서도 여러 가지 경로로 줄을 달아 초등학교 교원도 못할 자들이 들어와 학생들에게 배척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일제 때부터 왜놈들 밑에서 식민지 노예교육의 첨병으로 복무했던 군정의 문교관리들은 노예교육정책의 실행과 거기에서 얻은 모략적 책략에 이골이 난자들이라 이러한 해방 직후의 불가피한 상황을 이용했다. 그들은 대학과 중학교의 교원의 자격문제를 정리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진보적인 대학교원과 중학교 교원 중 앞으로 교육의 식민지적 지배에 방해될 교원들을 정리하려는 했다. 그들을 무자격이라는 핑계를 걸고 학원에서 추방하는 일을 벌였다. 대신에 실력도 없고 줄을 타고 중학교에 대학교에 교원으로 올라온 자들은 온갖 위조졸업장을 만들고 자격증을 위조해서 그것을 근거로 교원의 자격증을 남발하여 미제의 군정교육정책, 즉 식민지교육의 첨병으로 나서게 했고, 실력은 있지만 위조졸업장을 만들거나 자격증을 위조해서 학생들을 속일 수 없는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교원들은 학원에서 대거 추방당하는 어처구니없는 꼴을 당했다.

유신정권시대에 교수재임명을 빙자해서 학생들의 통일운동 민주화운동에 동정적인 교수들을 추방하는 방법의 원조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학생들이 따르고 실력이 있는 대학 교원과 중학교 교원들은 일시에 직업을 잃고 방황하게 되자 여기에 조국의 북부에서 구원의 손길이 뻗쳐왔다. 많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이때 북으로 넘어갔다. 거기에서 그들은 자기의 능력에 따라 일할 곳을 얻어 나라의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지금 북 공화국의 강성한 과학기술과 화려한 문화예술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에 그들은 크게 이바지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미제의 신식민지적 기반을 구축하는 한편, 이로 인하여 일어나는 저항을 우선 조금이라도 누그러지도록 하기 위하여 1947년 5월에 미제의 사령관 하지는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요청했고 소련을 이를 받아들여 재개되었다. 소련 측은 대폭 양보하여 협의대상자의 수를 정당・사회단체의 회원 수에 비례하여 정하기로 제안하여 이를 합의하고 결정을 보았다.

이러한 결정이 발표되자 하룻밤 사이에 425개의 유령, 협잡단체가 생겨 협의대상자의 신청을 해왔고 그 회원 수는 전체 남북인구의 근 2배에 달하는 5,600만 명이나 되었다.

소련 측은 마지막으로 협의대상자의 수를 남북 동수로 하자고 주장했으나 미국 측은 인구수의 비례로 하자고 하여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소련 대표들은 이북으로 돌아가서 조선문제는 조선인민의 자결권에 맡기고 양군은 1947년 연말까지 동시에 철수하자고 제안했다.


분단, 남조선단독선거와 단독정부

모스크바 3상회결정으로 이루어진 「미․소공동위원회」를 파탄내고만 미제는 조선문제를 국제연합으로 넘겼다. 그리하여 국제연합은 미제의 의사대로 그를 따르는 회원국의 수적 우세를 이용하여 국제연합 감시 하에 총선거를 한다는 미제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미제는 국제연합을 만들 때 대서양헌장이라는 국제연합 헌장에 전후문제에 관계되는 사항은 국제연합에서 취급하지 않고 이해당사자 간에 해결하도록 되어있다. 조선문제는 전후문제에 관계되는 것으로, 그래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취급했던 것이다. 소련은 그에 따라 조선문제의 해결책으로 ‘조선문제는 조선인민의 자결권에 맡기고 미소 양군은 1947년 12월 말까지 동시 철수’를 제안해두고 있었다. 미제는 이러한 소련의 제안을 묵살하고 조선문제를 국제연합 헌장마저 짓밟고 국제연합에 넘겼던 것이다.

그러는 한편 이남 땅에서는 대대적인 탄압으로 민주인사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고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 「학련」 그리고 깡패들을 동원하여 민주인사들의 가옥과 살림을 쳐부수고 사람들을 마구 팼다. 그래서 이남 땅을 완전히 공포분위기로 만들고 민중들을 「향보단」이라는 조직으로 몰아넣어 부정선거를 준비해나갔다.

미국의 제안에 따라 국제연합 감시 하의 총선거를 결의한 국제연합은 「조선위원단」을 조직하여 들어왔으나 이북 측의 거부로 이북에는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다시 국제연합에 총회시기도 아닌 때에 급히 국제연합 헌정에도 없는 「소총회」라면서 소집해서 선거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제안하고 이를 결의하여 이남 땅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총선거를 한 것이 이른바 5.10선거라는 것이다.

이남 민중은 이를 반대하여 총궐기해서 투쟁을 전개했다.

1948년 2월 7일에 이남 땅 전역에서 총파업투쟁이 벌어졌고 농민들은 경찰관서를 습격해서 무장을 탈취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곳곳에 야산대가 조직되고 밤이면 산마루에 봉화가 올랐고 ‘단독선거 반대’의 함성이 울렸다.

제주도에서는 4월 3일 전 섬에 총궐기가 있었다. 무장을 들고 그 동안 도민을 탄압해온 경찰관서를 점령하고 서북청년단을 까부쉈다. 이것이 ‘제주도 4.3인민항쟁’이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제주도는 미군 군정청 행정이 들어가지 못했다. 제주도에서는 남조선단독선거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1948년 5월 10일, 이른바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나 곳곳에서 저항을 받았고 투표를 못한 곳도 있었지만 대리투표, 무더기표 등 부정선거로 얼룩진 선거였고 무장경찰이 마을을 다니면서 투표장으로 몰고 가는 선거였지만, 이른바 국제연합 선거감시단은 평화적이고 순조로운 선거라고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국회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그 결과는 이남 「국회의원」 198명 중 그 성분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는 노동자와 농민의 대표자는 한 사람도 없다.
이들이 헌법을 만들었고 「대한민국」이라는 정부를 만들었는데 이는 지주, 자본가, 친일관리들이 정부임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이것이 미제에 의하여 만들어낸 분단된 예속정권의 실상이라 할 수 있다.

이리하여 8.15 일제로부터 해방의 의의였던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완수는 이남에서는 미제에 의하여 완전히 좌절되었고 그들이 세운 예속정권인 이승만 정권에 의하여 학살되고 말았다.

이남의 민중 앞에는 새로이 미제 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새로운 민족해방운동과 그 예속정권의 파쇼폭압에서 벗어나는 민주주의운동이 과업으로 주어지게 된 것이다.


역사의 새로운 시작, 통일운동

미제의 식민지 통치는 제2차세계대전 이전의 주권을 완전히 찬탈하는 식민지 통치가 아니라, 주권은 그들이 세워놓은 예속정권에게 주어 식민지를 통치하도록 하고 각종 협정과 조약으로 종주국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하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제도이다. 이를 전전의 식민지제도와 구별해서 신식민지제도라고 한다.

이남 땅에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운동이 격화해지는 가운데 이북에서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으로 하여금 조국이 분단의 위기에 처한 상황을 반대하고 민족자주역량을 하나로 모으기 위하여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개최를 제안했다. 이에 대해 이남의 정당・사회단체 중 「한국민주당」과 이승만 일파 등 지극히 소수만 제외하고 모스크바3상회결정을 반대하던 김구 선생까지도 지지하는 등 거의 모든 민중들이 지지하고 대표자를 선정했고 이들이 이북 평양으로 모여들었다.

1948년 4월 30일에는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지도자들의 협의회가 진행되었다. 회의에서는 「남북조선 제 정당・사회단체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여 미・소양군 철수안을 절대 지지하며 양군이 철거한 후의 완전한 질서를 담보하며 외국군대 철수 후에는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고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남조선단선에 의하여 조작되는 단독정부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성명했다.

남북연석회의 참가자들은 서로 정견과 신앙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구국방안과 통일방침을 일치하게 결의하고 회의에서 채택된 결정을 실현하기 위하여 한결같이 떨쳐나설 것을 호소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1948년 5월 10일 남조선 단독선거가 결행되자 1948년 6월 29일 「남북조선 제 정당・사회단체들의 지도자협의회」를 소집하여 지체없이 전조선적인 통일적 중앙정부를 세우는 방침을 결정을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 방침은 모든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전체 인민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지도자협의회는 남조선에서 강압적으로 실시된 단독선거의 무효를 선언한 다음 전조선적인 선거를 실시하며 이에 기초하여 최고인민회의를 창설하고 중앙정부를 세울 것을 결정했다.

남북조선 전지역에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는 1948년 8월 25일에 진행되었다.

이북에서는 일반적인 평등적, 직접적 비밀투표에 의하여 선거가 진행되었는데 유권자의 99.97%가 참가하여 98.49%의 찬성투표로서 212명의 대의원을 선출했다.

이남에서는 군정경찰과 우익깡패들의 방해책동을 고려하여 비밀리에 선거자들의 서명을 받는 방법으로 인민대표들을 선출하고, 선출된 인민대표들이 이북 해주에서 모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을 선거하기로 했다.

군정경찰과 이남의 우익정치깡패들의 폭력적 탄압을 무릅쓰고 서명투표가 진행되었다. 이 탄압은 정말로 격심했다. 8월 20일 하루 동안 이남에서 1,370명이 붙잡혔고 선거의 전 기간 동안 수만 명이 체포 투옥되었으며 수 천 명이 살상되었다.

미제와 군정경찰 그리고 폭력배들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이남 민중은 통일의 열망을 가지고 선거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전체 유권자의 77.52%에 해당하는 673만 여명이 선거에 참가하여 1,080명의 대표를 선출했다.

이 대표자들이 이북지역인 해주에 들어가서 8월 21-26일 사이에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여기서 비밀투표에 의하여 이남인구 5만 명에 1명 비례로 360명의 최고인민회의대의원을 선거했다.

이러한 남북총선거에 기초하여 1948년 9월 2일 평양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가 소집되었고 회의에는 남북조선에서 선거된 572명의 대의원들이 참가했다.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했다. 회의에서 김일성 장군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으로, 국가수반으로 추대되었으며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선포했다.

이와 같이 해서 이남은 이북의 대표자들이 한 사람도 없는 친일지주와 자본가들 그리고 친일관료 출신들로 이루어진 명실 공히 반동가리 정부인 셈이고, 이북은 그래도 이남 출신의 대의원으로서 전체 대의원수의 63%를 차지하고 거기에는 노동자, 농민, 교육자, 소시민 등도 자기 계급계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참가한 전체 민족의 정부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명분은 정당하지만 실지 현실로는 그 정부의 권력은 이북에서만 실행가능한 정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그 후 이남의 「민주주의민족전선」과 합동한 「조국통일민족전선」의 이름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가지로 통일방안을 제의하고 인사들을 보내어왔지만 미제와 이승만 정권은 이를 일축하고 북진통일만 부르짖었고, 통일을 위해 넘어온 인사들은 감옥에 처넣거나 살해하고 말았던 것이다.


반미구국운동의 전개와 6.25 전쟁

미제는 이승만 정권을 세움으로써 우리민족을 분단 시켰고 이 분단을 반대하여 투쟁하는 민중들은 유격대를 조직하여 대항해 나섰다. 한라산의 유격대, 지리산, 태백산, 운문산-신불산 유격대를 비롯하여 높은 산에는 모두 유격대가 조직되어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미제는 이승만 군대를 정예화 시키고 과거 악명 떨친 일본군의 삼광(三光)적전과 중국 장개석 군대의 건벽청야(建壁淸野)작전에다, 미제가 인디안을 몰살했던 작전까지 동원하여 유격대와 산간민중을 잔인하게 토벌했다. 여기에다 투쟁의 지도부인 남노당 지도부의 배신적 간첩행위로 유격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민중들은 굴하지 않았다. 2년후 1950년 5월 31일에 총선거가 있었다. 민중은 거기에 무소속 후보에게 표를 던져 이승만의 지지자는 3분의 1에도 못 미치게 되었다. 당시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거하는 간선제였으므로 2년 후에는 이승만이 끝나게 된 것이다.

당황한 미제와 이승만은 살 길을 찾았으나 그 길은 전쟁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침 미제는 전후 호경기가 끝나고 불황에 빠져 허덕이고 있던 중이라 그들도 불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38선에서 항시 충돌이 있었으며 그것은 전투가 대대전투규모로 더러 연대전투규모로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이 충돌이 더 규모가 커지면 바로 전면전쟁으로 되는 것이다.

1950년 6월에 들어서자 늘 있던 충돌의 규모가 예사롭지 않았고, 소련・중국의 포위망 구축을 제안했던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 날아오고, 워싱턴, 토오쿄오, 서울이 서로 오고가며 한참 바쁘더니 마침내 1950년 6월 25일에 38선에서 전면전쟁으로 발전된 것이 6.25전쟁인 것이다. 이리하여 이승만은 살아났다.

이승만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미제의 비호 아래에 그를 반대하는 세력을 모조리 공산당으로 몰아 학살을 했다. 이미 사상전향을 한 「보도연맹」 회원까지 쓸어 넣어서 산골짜기에, 바다에, 광산 폐광에 죽여 처넣었다. 약 30만 명이나 되는 대학살이었다고 한다. 이런 대학살은 우리 역사에는 물론 없었고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물다.

그리고는 공포정치를 폈다. 그의 공포정치의 하수인으로 극히 유명한 자들로 특무대장 김창룡, 백골부대장 김종원, 헌병사령관 원용덕이 있었다. 이승만의 주장에 반대하는 자들은 모조리 공산주의자로 몰아 감옥에 처넣고 죽였다. 이승만은 헌법도 협잡 날치기로 개정하여 간선제을 직선제로 고치고 나중에는 종신 출마제로 뜯어고쳤다.

사회는 실업자로 넘쳐났고, 무슨 토지개혁이라면서 지주에게는 지가증권을 주어 그것으로 자본가로 변신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농민에게는 분배받은 토지의 농지세라고 하면서 거두어들였다. 이러한 토지개혁은 농업경영을 영세화시켰고 그 결과 엄청난 절량농민을 발생시켜 살길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도시는 판자촌과 사창굴로 화하고 말았다.

전쟁을 부추겨 동족상잔을 일으켰던 미제는 얼마 안 되는 구호물자를 풀어 나누어주고 후안무치하게도 그들이 무슨 구호의 천사인 양 했다. 이들로부터 구호물자와 원조물자를 받아 이를 판 돈으로 대충자금이라 하여 예속정권의 유지비용으로 썼고 미제의 식민지 통치자금으로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승만 정권의 사회는 일제 해방의 의의인 민족해방 민주주의혁명을 완전히 봉쇄해버린 봉건적 토지소유가 그대로 온존된 사회이였고, 그 정권은 미제의 신식민지 예속정권으로서 군사통수권마저 갖다 바친 예속정권이다. 그 사회는 일제 식민지체제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식민지반봉건사회였던 것이다.


끝으로

일단 이야기를 여기에서 마무리하고 이승만 정권의 창출과 나라의 분단, 우리 현대사로서의 미제의 신식미지체제의 정착과정을 이야기함으로써 이남 사회의 현대사의 시작을 대강 그려보았다.

분단으로 시작된 우리의 현대사는 필연적으로 통일의 현대사도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의 현대사, 굴곡되고 식민지통치로 오욕에 찬 역사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해방운동으로서의 긍지도 함께 가질 수 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수탈과 압제의 세상에서 가장 보람 있는 삶은 그에 반대해서 투쟁하는 삶이고, 그런 삶에서 얻은 만신창이로 당한 상처마저도, 때로는 죽음마저도 그보다 더한 영광은 없는 것이다.


(2009년 5월 2일)

(월간 말 2009년 6월호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