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4일 목요일

국가로서 「대한민국」의 정통성

_____ 5.10단독선거(1948년)에서 제3회 국련총회(같은 해 12월)에 이르기까지


이 논문은 「씨알의힘사」 주최로 1986년 8월 3일, 도쿄(동경)에서 개최된 「몽양 여운형 선생 탄생백주년, 순의40년을 기념하는 강연회」에서 저자 매코매크 교수가 일본어로 강연한 것을 수록한 것이다. 텍스트는 잡지『씨알의 힘』제9호로부터 전재한 것이다.



1.

조선의 분단은 “종전”의 해, 1945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단이 화해 불가능할 만큼 틀어져버리게 된 것은 1948년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해가 미ㆍ소의 냉전이 조선민족의 내부적 항쟁으로 변전된 해이고, 그 과정의 일환으로서 국련이 조선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조선이 일제의 굴레로부터 해방되어서 3년째가 되는 이 해에 들어서자 문제는 점점 더 깊이 착잡해지고 회담으로써 해결할 가능성이 적어졌고 동시에 조선의 국토에서 전쟁의 검은 그늘이 엿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48년이라는 해는 조선으로서는 비극적인 해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문제와 관련해서 국련이 스스로의 원칙을 짓밟아버린 해였다는 점에서 세계로서도 비극적인 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냉전에 대해서 초연해야 할 국련이 미ㆍ소의 대립에 휘말려, 특히 조선문제를 둘러싼 2국간의 분쟁에 관여하게 되고부터 국련은 물러날 수 없는 궁지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로부터 2년 후에는 분명히 세계평화를 위해 만든 국제기관이 인류사상에서 희유할 만큼 비참한 조선전쟁의 당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국련이라는 국제기관이 이와 같은 행동을 한 일은 전무후무, 조선 이외에는 없습니다. 국련은 그 때문에 권위를 실추당하고 조선의 민족주의는 커더란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자신의 정부만이 조선반도 전역을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정통정부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1948년 12월,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국련총회의 결의문(195-III)에 있다는 것으로 일반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결의를 낸 국련이 조선문제에 관여할 권한이 있었던가, 그리고 관여 방법이 정당했던가, 「대한민국」이 정통정부라고 주장하는 그 「정통성」이 역사의 비판을 감당해낼 수 있는가 어떤가라는 것이겠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자료를 입수할 수 있기에 그 의문점을 해명하는 데 불편을 느낄 일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지금 내가 거주하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측의 자료 중에서 조선문제의 본질을 밝히는 데 만족할 만한 재미있는 사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에 근거해서 쓴 것이 나의 저서『Cold War, Hot War ____ An Australian perspective on the Korean War, Hale and Iremonger Pry Ltd., Sydney. 1983』입니다.

2.

조선문제가 미국의 동의(動議)로 국련에 들어간 것은 1947년 9월입니다. 법적으로 본다면 조선문제가 국련으로 이관되기에는 2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첫째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상회의(미ㆍ소ㆍ영)의 조선문제에 대한 결정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파기함으로써 비로소 조선문제를 국련으로 이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둘째는 국련 헌장의 제107조에서 「전후처리에 관한 분쟁」은 국련 안으로 가지고 가는 일을 금지하고 있는데, 조선문제야 말로 바로 일제의 패퇴로부터 생긴 전후처리문제이기 때문에 조선문제에 대해서 국련이 관여한다는 것은 바로 국련 헌장을 명백히 위반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문제가 안보이사회가 아니라 총회의 의제로 상정되었다는 사실은, 물론 안보리에서 소련의 거부권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작전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정당한 방식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고, 조선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더구나 조선민족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이 분명한 문제를 토론하는 데 어느 누구 한 사람의 조선사람도 국련총회에 초청되어 발언이 허용된 사실이 없었습니다.

1948년 이후부터 당하는 조선민족의 고통과 비극은 그 근본 시작부터가 조선문제에 대해 국련이 관여하는 데에 있다고 말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태가 여운형선생의 죽음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는 것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몽양 여운형선생이 흉탄에 쓰러진 것은 1947년 7월 19일이었고, 여운형 선생이 없어지면 선생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던 좌우합작위원회가 유명무실하게 되고 결국 해산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10월 6일), 좌우합작의 성공에 희망을 걸고 있던 제2차 미ㆍ소공동위원회도 할 일을 잃고 만 격이 되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10월 18일). 이어서 11월 4일, 국련총회(제2차) 정치위원회에서 「국련임시조선위원단」*(UNTCOK)의 설치를 요구하는 미국 안이 소련의 반대를 물리치고 가결하기에 이르렀고 뒤이어 조선의 비극적인 운명이 결정되어버렸다고 하겠습니다.

* UNTCOK는 「국련임시조선위원」라고도, 「국련임시조선위원」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
다. 본문에서는 저자는 전자를 썼지만 여기에서는 후자를 썼다.


3.

아무튼 조선문제에 대한 국련의 관여는 다음의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① 국련의 관여는 조선에 병력을 주둔하고 있는 2개국 중 한 나라만의 제안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한 나라는 이를 반대하고 있었다는 사실.

② 38도선 이남에 군정을 실시하고 있는 미국은 이미 거기에 강력한 반공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고, 국련의 관여가 미국의 기득권을 위협할 염려는 전혀 없었다는 사실.(1)

③ 대저 국련은 평화로운 세계질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고 특히 대국의 권리뿐만이 아니라 소국의 권리도 보호됨으로써 정의의 지배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전세계의 기대를 부여받아야 할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 국련이 미국의 지배 밑에 들어가 미국의 국익을 옹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략되고 말았다는 사실.

1945년 당시, 세계의 경제, 군사, 정치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감히 이에 도전할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국련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적어도 총회에서 투표는 미국의 뜻대로 조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무국 직원의 3분의 1 이상은 미국인이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2) 국련총회에 가지고 온 조선문제가 미국이 바라는 대로 요리되는 것은 물론이고, 앞서 말한 「국련임시조선위원단」을 두고 보더라도 그 인선이 당시 국련의 미국 대표인 존 포스터 덜레스의 개인적인 선호(preference)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것은 지금에야 두루 알고 있는 사실로 되어있습니다.(3) 동 위원단은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국(대만), 엘살바도르, 인도, 필리핀, 프랑스, 시리아의 8개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자주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어서 미국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나라는 인도와 시리아 2개국뿐이었습니다.

이 위원단이 조선에 도착한 것은 1947년이 저물어가는 때였습니다. 서울에 도착하자 곧 그들이 발견한 일은 위원단의 활동이 숙사와 사무실부터 비롯해서 이동이나 통신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미군정청에 의존되어야 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과 일제시대부터 토지귀족이었던 김성수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민주당의 세력은 미 군정청의 전면적 지원 밑에서 남에서 실질적인 권력으로 장악하고 있고, 게다가 그런 권력이 폭력과 협박이라는 수단을 통해 행사되고 있다는 것,(4) 그리고 이미 구축되어 있는 냉전구조로부터 배제된 중도 내지 좌파세력은 철저히 박해를 받고 있고 폭력으로 비합법화되어 투옥, 고문, 죽음, 도망 등으로 침묵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5)

위원단은 처음부터 조선전토에 국련의 위탁사항을 전혀 실행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국련이 나선다는 것만으로 둘로 분단된 나라의 모순이 일거에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 등은 처음부터 빤히 알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미국이 조선문제를 국련에 들여온 것은 소련과 같은 격으로 놓인 입장에서는 해결할 수 없고, 국련이라는 장소가 자기의 입장을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하는 토의로써 조선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공정권 이외의 것을 자기 나라가 점령하고 있는 남쪽의 지역에 인정할 작정이 전혀 없는 그들의 결의를 생각한다면, 당시 미국의 강대한 힘과 국련의 힘으로 조선의 모순을 해결하리라고 생각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그래서 국련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떠맡은 것이었습니다.



4.

앞에 말한 바와 같이 국련임시조선위원단은 미국의 선호에 따라 그 구성원을 용의주도하게 선발했지만 미국의 기대에 반해 동위원단은 남쪽만의 단독선거에는 반대했고, 그에 대한 「감시」를 도맡을 이유도 없다는 태도를 명백히 했습니다. 위원단의 단장은 인도의 K. P. S. 메논이었는데, 그는 “남쪽에 수립될는지 모르는 단독분리정권은 적어도 국련총회(제2차)의 결의에 근거를 가진 합법적인 전국정부(네슈널 가버멘트)는 될 수 없다.”라는 것이 위원단의 일치된 의견이라고 발표했습니다.(6)

이 말은, 조선의 여러 지도자들과 이야기를 한 결과 위원단의 태반이 자유로운 선거가 실시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서방의 일원으로 당연히 미국의 노선을 추종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짓궂게도 그 오스트레일리아가 미국에 대해 반대파의 선두에 섰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표의 잭슨 대령은 1948년 1월 29일, 서울에서 본국정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미국의 군정청은 친미우익을 지지하고 있고 그 이외는 공산주의자거나 적어도 그와 가까운 자로 취급하고 있다. 우리들이 인터뷰를 한 많은 지도자들은 우익이 경찰의 배경을 얻어 사태를 완전히 조정하고 있어서 자유로운 선거 따위는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 사실과 가까울 것이다."

그보다 이전, 즉 1947년 11월 11일, 주일 오스트레일리아 사절단 쇼우 씨는 본국정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실권이 잔인한 경찰의 손에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한국의 감옥은 지금 일본 통치시대보다 더 정치범으로 넘쳐나고 있다. 극우단체에 의한 정적에 대한 고문, 살육은 일상다반사로 행해지고 있고 이와 같은 불법행위는 널리 공인되고 있다. 미군의 G-2는 좌익을 억압하는 데만 열심이고 그들의 한국인 앞잡이들이 어떤 수단을 취하건 단속할 생각은 없다."



5.

미국이 조선문제에 대해 국련이 관여하도록 강력하게 추진한 것은 이승만 친미단독정권에게 정통성의 이미지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 마디 말로 끝낼 수 있지만, 그러한 목적에 따라 설치된 국련임시조선위원단의 역할이 미국의 대한정책을 옹호하고 미국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조선을 위해서도 세계를 위해서도 비극적인 것이었습니다. 소련은 위원단이 북에 들어와 국련소총회의 지령에 근거해서 활동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만, 미국의 공산주의 박멸운동에 소련과 북조선이 협력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국련은 분단의 해소라고 하는 조선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불가능하도록 하는 역할을 떠맡게 된 것입니다.

1948년 2월 5일, 서울에 있던 임시조선위원단은 소련이 38도선 이북에서 위원단이 활동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상황 가운데서도, 역시 남쪽만의 선거 실시를 용인하고 단독정권수립하는 데에 손을 빌려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지시해주도록 국련소총회에 요청함과 동시에, 사태를 설명하기 위하여 단장인 메논을 소총회에 파견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국련의 미국 대표단과 함께 전 직원은 소총회가 남쪽만의 단독정권수립에 찬성하는 결정을 내리도록 각 대표에 대해 직접적인 압력을 포합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도록 명령했습니다.(9)

이러한 미국의 압력은 마침 소총회가 열리고 있었던 2월 중순에 체코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서 공산정권이 수립된 사실로 보다 쉽게 효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체코에서 공산주의가 이겼다면 조선에서는 절대로 이기지 못하도록 손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10)

국련임시조선위원단에 대해 남쪽만의 단독선거 실시를 인정하도록 하고 또 그것을 감시하도록 요청하는 미국의 제안을 표결한 것은 1948년 2월 26일이었습니다. 소련권의 보이콧 속에서 강행된 이 표결의 결과는 찬성 34, 반대 2, 기권 11이었는데, 반대의 2표가 미국의 동맹국이고 더구나 위원단의 구성원인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였다는 것, 기권 11표 가운데는 전통적으로 미국의 외교정책에 추종해왔던 라틴아메리카의 3개국(컬럼비아, 파나마, 베네수엘라)와 북구 3개국(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기억해둘만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소총회가 이 결의안이 채택한다는 것은 조선을 영구히 분단할 뿐 아니라 장차 세계평화를 크게 위협할지도 모르는 잘못된 방책이라는 것을 내심으로는 겁을 내고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단독선거에 대해서 일관되게 반대해왔던 위원단의 단장 메논 씨가 돌연히 태도를 바꾸어 소총회에서 찬성표를 던진 사실에 대해서 한 마디 해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K. P. S. 메논 씨는 그 후에 쓴 자서전 가운데, 조선임시위원단 단장을 맡았을 그때가 외교관으로서 재임했던 전 기간을 통해 “머리 속에 있는 이성(理性)이 자기의 심장에게 완패 당한 유일한 사례였다.”고 술회하고 있는데, 메논 씨의 심장을 꽉 잡은 여성은 바로 한국의 유명한 여류시인 마리안 모(毛允淑)이었습니다.(11)

정경모(鄭敬謨) 씨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메논과 모 사이의 「우정관계」는 자연발생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이승만이 생각한 술책에 모윤숙이 동의한 결과였던 것 같은데, 아무튼 메논 씨 자신의 고백으로부터 보더라도 단독선거를 반대했던 그가 돌연히 찬성 쪽으로 돌아버린 것은 모윤숙의 애원과 설득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조선민족으로서는 참으로 불행했던 이런 에피소드는 어떻게 사소한 우연에 의해 한 민족의 역사의 방향이 결정되는가를 아주 적절한 예로써 제공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6.

앞서 말한바와 같이, 2월 26일의 표결에 근거해서 국련소총회는 서울에 주재하고 있는 임시조선위원단에게 남쪽만의 단독선거의 실시를 진행시켰고, 또 이를 「감시」하도록 지령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그것으로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지령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는 의연히 단독선거에는 반대였고 남북 각각의 대표가 동의할 때까지는 최종적 결론은 보류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3월 11일, 단독선거의 가부를 두고 임시조선위원단으로서의 표결이 현지 서울에서 실행되었습니다. 이 표결에서 프랑스와 시리아는 기권을 했습니다. 결국 중국(대만), 엘살바도르, 필리핀, 거기에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인도의 6개국이 어떤 태도를 나타내는가에 따라 조선의 운명이 걸려 있게 된 것입니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2개국은 반대입니다. 대만, 필리핀, 엘살바도르 3개국은 미국이 제안한 것은 어떤 것이든 찬성하는 나라입니다. 문제는 인도가 어떻게 나오는가라는 것입니다. 만일 인도가 반대표를 던진다면 지령은 소총회로 반려되고, 적어도 「국련이 승인하고 감시했다」는 명분을 치켜든 단독선거는 불가능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미국은 단독선거를 강행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되었더라면 전쟁은 없었을는지도 모르고 「국련군」이 조선전쟁에 출동하는 일은 물론 없었을 것입니다. 남북통일의 문제가 오늘날과 같이 곤란한 상황으로 빠지고 마는 일도 없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인도를 대표하는 메논은 소총회의 지령에 따르는 데 찬성표를 던져서 단독선거는 4 대 2의 다수결로써 결정된 것입니다.(12) 메논의 이 투표가 그의 비극적인 여성관계로부터 생긴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메논 자신은 공무에 대한 이처럼 명백한 배임행위를 변호하면서 자서전 안에 “그것은 아무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역사가로서 본 바로는 그의 행위의 중대함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더구나 그 결과는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편 모윤숙 쪽은 아마 메논과의 관계로부터라고 하겠는데 국련에서 한국대표를 맡고, 국회의원, 예술원 회원, 펜크럽 한국본부 회장을 역임하는 등 화려한 생애를 보냈으며, 그녀가 자서전 풍으로 쓴 「잊지 못할 메논 위원장과 나의 우정」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우리들의 우정은 미묘한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만일 나와 메논 위원장 사이의 우정이 없었더라면 남쪽만의 단독선거는 없었을는지도 모르며,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오늘의 한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13)

창건 당시에 대한민국의 이러한 반영웅적(反英雄的)인 이야기와 그 불행한 유산은 오늘까지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7.

그런데, 단독선거를 감시한다는 감시위원단의 결정은 이상 본 바와 같이 아슬아슬한 차를 가지고 다수결로써 결정되었지만 그것은 또한 엄중한 조건이 붙은 것이었습니다. 그 조건이란, 「언론과 집회에 관한 민주주의적인 권리가 완전히 보장된 분위기 속에서만」 위원단은 감시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었습니다.(14)

그때에 이르러서도 오스트레일리아의 예상은 잭슨 씨의 말을 빌리면 “단독선거는 극우파를 제외한 모든 정당으로부터 보이콧 당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15) 임시조선위원단의 최종 표결이 있었던 당일, 이승만을 제외한 남쪽의 가장 저명한 지도자들은 북조선의 김일성에 대해서 민족문제를 토의할 남북회담의 개최를 제안했습니다.(16) 위원단 안의 반대파는 사태가 단독선거로 기울은 이 최종단계에 이르러서도 남북회담 개최를 환영하고 조선의 분단을 영구화하지 않을 해결책을 계속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는 단독선거의 강행은, “현명함이 결여됨과 아울러 동시에 제2차 국련총회의 결의를 짓밟는 것이고, 첫째로 남쪽에서 공평한 선거가 실시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라는 의견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캐나다 대표 바터슨)(17) 이에 대해 미 군정청의 하지 중장은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이와 같은 의견은 “소련에 대한 유화(宥和-appeasement)를 나타내는 것이며”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가열한 냉전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무지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면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18) 특히 캐나다 대표에 대해서는 “소련과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일에서 나는 그 사람처럼 열심인 사나이는 과거 수개월 사이에 만난 일이 없다.”라고 하는 비난마저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한편 오스트레일리아 대표단의 잭슨 씨는 3월 13일자로 다음과 같은 보고문을 제출하고 단독선거에 대해 반대를 표명했습니다.

"본 위원단 분과위의 인터뷰에 응해준 24명의 조선의 정치지도자 중 북측이 협력을 거부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단독선거라도 어쩔 수 없다고 진술한 사람은 9명. 나머지의 11명은 반대이고 4명은 의견을 보류했다. 이 24명의 대다수는 우파에 속한 사람들인데 그것은 좌파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우리들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들 사람들은 서면으로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는 취지의 의견을 표명해왔다. 요컨대 우파 정당 가운데 가장 무게를 가진 김구의 한국독립당, 중도좌파의 모든 온건파, 게다가 좌편향의 극좌 그룹은 예외없이 남쪽만의 단독선거에는 반대하고 있다."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의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압력은 바로 강경 일변도였습니다. 캠벨러의 오스트레일리아정부는 국련의 지원없이도 미국은 이래저래 단독선거를 강행할 것으로 생각하고 단독선거에 그 이상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선거가 독립국가의 국회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국련이 남북을 포함한 전 조선의 문제를 해결하는 모색과정에서 협의대상으로 될 수 있는 자문기관을 만들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확하게 해두었습니다.(21) 메논 자신이 선거는 단순히 자문기관을 도입하기 위한 것이고 결코 단독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고, 이것이 2월 13일의 임시조선위원회에서 전원일치로 된 사실임을 명백히 해두고 있습니다.



8.

그러나 이러한 제한조항 따위는 미국이 개의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해서 반대 측에 선 나라는 미국의 하는 짓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가를 통감했다고 하더라도 맞바로 미국을 비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군정청은 위원단의 염려를 달래기 위하여 「그저 그런 정도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보이기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3,140명의 정치범을 석방하고 그들에게 선거권을 준 것은 그 중 하나였습니다.(23)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위원단은 위원단의 시찰반이 4월 5일부터 10일간에 걸쳐 실행한 6일간의 조사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습니다.

"시찰반은 극좌파 그룹과는 접촉이 이루지지는 못했으나 인터뷰에 응한 다른 저명인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선거를 반대한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들의 염려는 남쪽만의 단독선거가 남북의 분단을 고정시킬 것이고 그러한 선거에는 협력하지 않는다는 것이 의론의 초점이었다."

조선위원단이 부닥친 국련선거에 대한 이와 같은 원칙적 반대는 미 군정청에 의한 개혁이나 보장으로는 ____ 그것이 어떠한 모양으로건 ____ 반론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선거를 약 2주일 앞에 둔 4월 28일, 국련조선위원단은 남쪽의 정치적분위기는 「그저 그런 정도의 자유로웠고」 따라서 선거에 대한 감시의 역할을 맡는다.」는 결의를 5 대 3으로 가결했습니다. 이 결의가 이루어진 바로 그때 제주도에서는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4. 3인민봉기가 한창때였고 로버츠 중장이 이끄는 한ㆍ미군의 무참하기 이를 데 없는 살육이 전개되고 있었다는 것도 덧붙여 두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 당시의 조선의 분위기가 「그저 그런 정도의 자유로웠다.」(2 reasonable degree atmosphere)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튼 반대표를 던진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의 대표는 이 단계에 이르러서도 아직 체념하지 않고 치연작전을 벌여 여운형 선생의 생전의 동지였던 김규식을 방문하여 북측의 지도자와 회담하기위하여 평양을 찾을 수 있도록 작용을 했습니다.



9.

선거는 5월 10일, 좌파와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우파 민족주의 진영의 보이콧 속에서 강행되었습니다. 이 선거에 관해서는 적어도 3가지 점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첫째는, 국련에 의한 이른바 「감시」라는 것은 실제로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거 때의 분위기는 대체로 「자유로운 것」이라고 일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조선위원단 자체가 이 선거가 「국민정부」(national government)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첫째의 점, 즉 「감시」는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 ___ 미군의 점령지역, 즉 현재의 한국은 10만 평방킬로미터의 면적을 가지고 당시 2,000만의 인구를 안고 있었습니다. 조선위원단은 각국의 대표와 사무원을 포함해서 총원 30명을 넘은 일이 없었고, 이 인원으로 전국에 걸친 일반선거를 감시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1935년에 실행된 자르지방의 국민투표에는 1,000명, 같은 해의 니카라과의 선거에는 775명의 중립인 감시원이 동원된 사실을 상기한다면 1948년의 한국에서 실시한 선거의 「감시」가 어떤 것이었다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26) 게다가 당시의 국련 사무총장 리이가 말한 바와 같이 감시반이 이동하기 위한 교통수단은 전면적으로 미군에 의존하고 있었고 미 군정청이 보이고 싶지 않은 곳에 감시반이 나갈 수가 없음은 명백합니다.(27) 사실상, 국련임시조선위원단의 감시반은 미 군정청이 지정한 겨우 몇 군데를 잠시잠간 얼굴을 내민 것뿐이고, 그렇게 얼굴을 내민 투표소는 전체의 2%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감시」라고 말할 것이 못됩니다.

둘째의 점은, 「자유로운 분위기」 가운데 선거가 실시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___ 한국의 경찰 발표조차도 3월 하순부터 선거가 실시된 5월 10일까지 589명이 살해되고, 10,000명 이상이 검속되었습니다.(28) 조선위원단의 보고는 한국 측의 부당행위라고 보아야 할 수많은 사건을 열거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독자적인 조사는 실행하지 않았습니다.(29) 투표소는 경찰 또는 예비대에 의하여 포위되어 있고 선거를 관리하는 임무는 특히 그것을 위해 미군에 의해 조직된 준경찰조직인 향보단(鄕保團)이 가세하고 있었습니다.(30) 오스트레일리아정부는 이와 같은 선거로는 「만족한다는 뜻을 도저히 나타낼 도리가 없고 경찰의 압력을 나타내는 수많은 증거를 발견했다.」고 발표했습니다.(31)

셋째의 점은, 단독선거가 정권수립을 위한 것이었는가라는 점에 대해서 ___ 국련조선위원단의 구성원 중 어느 누구도 이 선거에 의해 국회가 구성되고 남쪽만의 단독정권이 생겨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이것은 조선반도의 1구역 내의 지방선거로 생각하고 있었고 이 선거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은 단지 자문기관이고, 그 이상의 것은 아니라고 하는 점에서 전원이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32)

선거를 합법적이었다는 사실을 승인하라는 미국의 압력이 가해지는 속에서 위원단의 토의는 7주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만, 그러나 결론에 이르지를 못했습니다.(33) 그러던 중 시리아의 대표가 팔레스티나문제로 위원단에서 물러나고(5월말), 오스트레일리아 대표가 병으로 입원하는 일이 있어서(6월 24일)(34), 6월 25일에 위원단은 이른바 ‘말썽꾼이 없을 때 일 친다’고 “이 선거는 동위원단이 출입가능한 조선의 부분에서 선거민의 적법한 자유의사의 표현이었다.”라는 결의를 가결했던 것입니다.(35)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그리고 인도의 정부는 각각 개별적으로 이 선거 결과로 생겨난 서울의 정부는 1947년, 제2차 국련총회 결의문(112-II)이 생각하는 전 조선의 「국민정부」(national government)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을 미국정부에 대해서 명백히 밝혔습니다.(36) 국련임시조선위원단은 그 후 뉴욕으로 철수하여 다시 20회에 걸친 토의를 거듭했습니다만 위원단이 감시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견해 차이를 끝까지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37)



10.

그러나 조선위원단은 자신들이 「감시」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승만과 미국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선거에 당선된 「의원」들은 서울에 「국회」를 설치하고, 다시 「국회」가 「헌법」을 제정한 다음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이것은 그해 7월부터 8월에 걸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즈음 이승만은 얼굴 두껍게도 자기는 국련조선위원단의 결정에 근거해서 행동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물론 사실이 아니고 위원단의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이 이가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행세하는 일에 동의해준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8월 12일, 5.10선거로 성립된 기구는 이것을 일국의 국회로 인정하고 그로부터 생겨난 정부는 제2차 국련총회 결의문이 요구한 전 조선의 「국민정부」로 승인할 것을 선언했습니다.(38)

그러나 일이 여기까지 이르러서도 캠벨러의 오스트레일리아정부는 이러한 미국의 주장에 동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8월 15일(1948년)에 거행된 「대한민국」의 건국선언의 식전에 국련조선위원단의 자국대표(A. B. 제이미슨)의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39)

미국은 사방팔방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반대를 넘어가려고 국련에서 맹렬한 로비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파리에서 제3차 국련총회에서 그 후의 조선의 운명으로서는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결의안이 얄궂게도 오스트레일리아 대표(J. 프림솔)에 의해 제안되었습니다. 이 결의문은 그 자신과 미국, 대만의 대표 3자에 의하여 기초된 것입니다.(40)

이 결의안은 그 후 12월 12일에 채택되었는데(195-III), 그러나 이것은 선거결과로 남북을 통한 국민정부가 수립되었다는 따위를 승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바는 「임시위원단이 감시할 수 있었던 조선반도의 부분에서 유효하게 관리하고 통괄할 수 있는 합법정권이 수립되었다」는 것, 그리고 「조선에서 이러한 종류의 정권으로서는 이것이 유일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41) 국련총회의 이 결의문을 근거로 해서 “「대한민국」이 국련에 의하여 부여된 정통성의 이유로 한반도 전역을 지배해야 할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되고 있는데, 아무리 번잡한 말로 씌어 있다 하더라도 이 결의문은 그러한 사실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때까지 보아온 바와 같이 오스트레일리아는 미국의 대조선정책에 반대해왔던 중심적인 나라였지만 이상과 같은 번잡한 표현으로 말한 국련총회에 대한 결의문의 제안자가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대표였다는 것은 짓궂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반대의 중심이었던 나라가 지지 쪽으로 돌아버린 것은 미국으로서는 정말 기분좋은 일임에 틀림없겠습니다. 1948년 당시, 동서 어느 진영에건 속하도록 두 초대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압력은 지극히 컸으며 동서를 불문하고 힘있는 것을 섬기는 사대주의는 공통이었고 유독 오스트레일리아만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국련총회의 마당에서 사회주의 여러 나라가 전개했던 여러 가지 의론도 압도적으로 찬성 받은 국련임시조선위원단이 실제로 제출한 보고서의 내용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는 것도 한 마디 덧붙여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토론에 상정되지도 않았고 무시되기만 했습니다. 북조선의 대표를 국련에 초청하여 그들의 의견을 청취해야 한다는 제안도 미국과 그 지지그룹에 의하여 전면적으로 거부되었습니다.

조선민족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이 제3차 국련총회의 결의문은 이상과 같이 격렬하게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 채택에서 투표는 이른바 사령관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병졸들에 의하여 결행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11.

1948년의 이 결의문은 그 2년 후인 1950년에는 미국이 국련의 사무총장 트리구브 리이의 적극적 지지를 얻어 다른 나라들을 움직여 국련의 「기치」를 쳐들고 조선전쟁에 참전하는 법적 근거로 되었습니다.(42) 조선민족에게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참화를 가져온 이 전쟁이 「침략자에 대한 국련의 경찰행동」이라고 선전되고 있는 것은 국련 자체의 권위와 역사를 보더라도 비극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1965년 6월에 채결된 한ㆍ일기본조약은 그 제3조에서 「대한민국이 국련총회 결의문 195-III에서 명백히 나타내고 있는 대로 조선에 있는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라는 것이 확인된다.」라고 씌어 있어서, 허구의 위에다 또 허구를 쌓아올리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일본이 북조선과 적대하는 한편 한ㆍ일유착의 관계를 심화시킴으로써 남북의 대립을 부채질하고 조선의 통일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도 「국련총회 결의 195-III」가 그 애당초의 원인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며, 국련이라는 조직이 조선민족에게 가져다준 불행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지금에 와서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48년이라는 해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국가의 자립, 국련에서 정의와 평등이라고 하는 이념이 서서히 포기되고 있었고 그 대신 미국에 대해 무조건적 지지해주는 노선이 채용되기 시작한 해였습니다.(43) 오스트레일리아는 초대국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의 전쟁의 발생과 분단의 고정화라고 하는 그 뒤에 되어가는 결과에 중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나라, 그리고 그밖에 많은 나라가 국제문제를 생각할 때 정상적인 법의 규범과 도의의 감각을 회복하고, 「보호자」로 행세하는 초대국의 생각대로 추종할 것이 아니라 개개의 나라 각각의 주장과 이익이 관철되도록 하지 않으면 냉전체제와 냉전사고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문제의 해결은 냉전적 사고와 냉전적 대결의 해소와 불가분리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2가지 문제는 동시적으로 해결될 수밖에는 없고, 이렇 해서 조선문제가 해결될 때 국련은 1945년 창립당시의 원래의 이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민주노동당 양주시당부 간부 연수회 강연 초


안 재 구

2008. 11. 22



1. 나는 무엇인가.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갈 때 문득 내가 무엇인가, 그리고 삶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납니다. 부모를 잘 만나서 먹고 사는 데 걱정이 없고 삶이 힘들지 않은 사람들은 그 삶을 즐기느라고 이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별로 없겠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일해서 자기 삶을 스스로 영위할 때가 되면 이런 생각을 안 해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특히 요즘과 같이 삶이 고되고 세상이 어지러워질수록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삶에 대한 문제가 더욱 절실해질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혼자 하늘에서 뚝 떨어졌거나 땅에서 불쑥 솟아난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생명을 이어받아 부모와 형제자매로 구성된 가족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받아 자라고 일가친척들의 도움과 우애로 외롭지 않게 살게 되며, 이웃 사람들과 유무상통하면서 서로 친교를 하는 가운데서 배우고 자라 성인이 되며, 그래서 장차 또 하나의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창조하고 인생을 살면서 역사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가족공동체 안에서 부모로부터 생명을 이어받아 태어났고, 사회라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 안에서 사람의 삶을 배우고 일하며 더욱 나은 삶을 영위해나가기 위한 물질적 정신적 재화를 생산하며 창조하고, 이들 재화를 삶의 수단으로 해서 살아나갑니다.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그 안에서 재화를 생산하고 소비하여 삶을 영위하며 그 삶의 방식과 슬기를 더욱 발전시키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들의 집단을 사회라고 합니다.

사람은 부모로부터 육체적 생명을 이어받아 가족공동체 안에서 그 구성원의 사랑을 받고 자랍니다. 그리고 더 넓은 사회라는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자질을 배워서 스스로 생산하는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도록 성장하여, 마침내 한 사람의 온전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집단으로서의 사회는 처음부터 지금과 같이 나라라는 민족공동체와 같은 완전한 집단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은 가족공동체라는 혈연적 집단에서 출발했고, 더욱 큰 규모의 생산을 위하여 혈연적 관계를 가진 여러 개의 가족공동체의 연합으로 씨족공동체로 발전했으며, 더욱 큰 규모의 집단적 노동이 필요한 농업생산으로 발전하자 거기에 걸맞게 가까운 씨족공동체들이 연합하여 더욱 큰 규모의 사회로서의 부족공동체로 발전했습니다. 부족공동체의 사회에서 농업생산의 규모가 터 잡게 되고 발전됨으로써 부족을 넘는 더욱 더 큰 규모의 공동체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로써 더욱 많은 잉여생산물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욱 많은 잉여생산물을 위하여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고 이를 위하여 다른 부족공동체를 습격하고 그 생구를 노예로 삼고 또 한편 공동체의 규범을 어긴 죄인과 더불어 노동생상에서 소외되고 오직 착취만 당하는 노예계급이 발생했으며, 노예계급을 지배하여 더욱 많은 잉여생산물을 차지하는 노예주와 그 지배체제에 속하는 신관, 관리와 귀족, 제왕 등의 지배자계급들로 구성된 인류최초의 계급사회인 노예제사회가 나타났습니다.

노예제사회는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강제수단으로 법률제도와 이를 집행하고 옹호하는 무력을 가진 권력이 생겨났습니다. 그 법률에 따라 왕, 관료, 제관, 장군 등 지배계층구조가 생겨났으며, 착취제도가 법률적으로 보장되고 합리화되는 역사상 최초의 국가가 발생한 것입니다.

국가는 그 통치권이 미치는 영역이 확정되며, 핏줄이 같고,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삶의 형식과 슬기, 즉 문화의 공동성을 가진 인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같은 핏줄, 같은 말, 같은 땅이라는 공통성으로부터 민족이라는 공고한 집단의 구성체로서의 민족공동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우리민족은 대동강 연안의 비옥한 농경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최초의 민족국가로서 생겨났으며 그 이름을 조선이라 했습니다. 최초의 민족수장으로 단군왕검이 있었으며, 다른 민족과 구별하여 아사달, 배달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 영역이 둘레가 7천리, 남으로는 반도 전체와 북으로는 할아빈 일대까지, 동으로는 산해관 너머 지금의 북경지역까지, 서로는 연해주까지 이르는 광대하고 강성한 고대국가로 발전하였습니다. 사회는 노동을 착취하는 지배계급과 노동을 수탈당하는 피지배계급으로 나누어진 최초의 계급사회인 노예제사회였으며, 문화는 청동기문화로 그 비파형 동검은 우리민족의 최초의 표징으로 되었습니다. 신지문자로 찬란한 문화를 이루었고, 강력한 기마군대로 주변 여러 나라를 복속시켜 동북아시아의 강성한 나라로 번영했습니다.

우리들은 바로 이 단군조선의 핏줄을 이어받아 찬란한 문화전통을 창조하면서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민족국가의 자랑스러운 성원인 것입니다.


2. 찬란한 문화로 이어온 민족의 성원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의 해답은 인간의 삶의 본질, 삶의 목적과 의의, 생활의 보람과 가치, 참된 삶을 누리기 위한 방도로부터 나옵니다. 이러한 문제는 세계와 인간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한 견해와 관점으로부터 나옵니다. 이를 인생관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관은 본질적인 것으로 철학의 문제로 되겠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해명함으로써 철학의 본래 사명을 다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와 관점 그리고 입장, 즉 인생관은 시대가 바꿔짐에 따라 변화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자주의식과 창조적 능력의 발전정도, 사회제도의 성격,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조류들과 도덕, 생활양식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대와 중세에는 주로 종교가 사람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에 따라 그 시대의 인생관에서는 일반적으로 종교적 색채가 강했던 것입니다. 혹독한 억압과 고통 속에서 올바른 철학의 영향을 받을 수 없었던 당시의 민중은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 것으로 스스로를 달랬던 것입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돈으로 계산되고 사람의 인격마저 돈에 의하여 평가되는 개인주의적 인생관이 지배적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자본주의의 첨단인 미국이 퍼뜨린 세계관으로 실용주의(‘인간에 유용한 것만 가치가 있다는 것’이라고 하는 사상조류)와 물질만능주의가 있고, 이러한 삶을 위해 애쓰다가 실패한 패배주의자들이 빠지고 마는 실존주의(인간은 홀로 고독한 존재이며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허무주의철학), 쾌락주의(살아있을 때가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철학)도 있습니다.

인생은 오직 한번만 살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오직 한번 사는 ‘일생’을 보람되게 살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이 가지는 너무나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요구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생을 살기 위하여 먼저 우리 자신, 즉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3. 사람의 본질적 속성

사물은 그것이 그것이게끔 규정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본질적 속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본질적 속성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자주성입니다. 자주성은 ‘세계의 주인으로 그리고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의 사회적 속성’입니다. 사람은 자기 주변의 세계에 있는 그대로 따르지 않고, 도구를 만들어 개조 변혁함으로써 다른 생명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더욱 고등한 생명체로서의 사람으로 되는 것입니다.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세계를 개조 변혁하는 자주성은 세계에 대한 주인으로서 세계에서의 사람의 지위를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주성을 쟁취하는 사람의 활동은 크게 자연에 대한 투쟁(노동), 사회에 대한 투쟁(민족적ㆍ계급적 억압과 예속을 비롯한 온갖 사회적 구속과 예속을 없애기 위한 변혁과 건설의 투쟁), 그리고 인간의 의식에 남아 있는 비자주적인 사상을 일소하기 위한 사상투쟁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구속과 압박을 거부하고 이 세 가지(자연ㆍ사회ㆍ인간 자신)의 자주성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서는 것은 자주성을 생명으로 하는 참된 사람의 본성입니다.

둘째, 창조성입니다. 창조성은 ‘자주적 요구에 맞게 목적의식적으로 세계를 개조하고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입니다.

‘인간이 창조성을 가졌다.’는 것은 ‘창조적 능력(지혜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성은 세계에 작용하는 인간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셋째, 의식성입니다. 의식성은 ‘세계와 자기 자신을 파악하고 이를 개조 변혁하기 위한 모든 활동을 규제하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입니다.

의식의 내용에는 지식과 사상의식이 있는데, 지식이 주위세계에 대한 합법칙성을 아는 것이라면 사상의식은 자기의 이해와 요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사상을 자기의 철학으로 가졌느냐’ 에 따라 사람은 이렇게도 움직이게 하고 저렇게도 움직이게 합니다.

사상의식 중에서도 자주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노동자와 민중의 철학인 자주적인 사상의식은 사람을 각성시키고 그래서 더욱 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결정적 요인인 것입니다.


4. 인간의 속성은 천성적인 것인가, 사회적인가.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이 인간을 주위세계와 근본적으로 구별 짓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하여,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인간의 속성은 천성적인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나라 속담에 ‘자식은 겉을 낳지 속은 못 낳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식의 육체는 낳지만 그가 지니게 될 지식ㆍ인품ㆍ사상 같은 사회적 속성은 낳지 못한다.’ 는 뜻입니다.

인간의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은 자연이 인간에게 준 생물적 속성이 아니라 사회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발전되어온 사회적 속성입니다. 사회적인 교육과 실천을 통하여 자주적인 사상의식과 창조적인 능력이 배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와 완전히 단절된 인간은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할 수 있고 사회적 속성을 가질 수 있는 생물학적 바탕 즉 발달된 육체구조를 가진 유일한 존재입니다. 고도로 발달된 뇌수, 보행기관에서 해방되어 노동의 기관으로 바뀐 손, 언어를 소통할 수 있는 후두구조와 같이 인간의 육체기관은 다른 생명물질이 가질 수 없는 사유의 기능과 의사교환의 기능, 노동의 기능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육체기관은 인간의 속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물질적ㆍ생물학적 기초일 뿐입니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본질적 속성은 그 형성에서부터 사회적 산물이며 그 내용과 수준이 역사적으로 변화ㆍ발전하는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떳떳한 사회적 존재로 살며 발전하려면 사회적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생명, 즉 사회ㆍ정치적 생명을 가지고 사회생활, 사회적 실천에 적극 참여하여야 합니다. 자주성을 위한 투쟁에 적극 참여하는 길에서만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은 더욱 강화ㆍ증대될 수 있습니다.

인간을 ‘고독한 개체’ 로 묘사하면서 집단 속에 들어가면 인간개성이 ‘말살’되고 ‘평균화’된다고 하며 인간들에게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 것을 역설하는 온갖 부르주아사상(특히 실존주의에 이런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이 노리는 것은, 사람들을 민족ㆍ민중이라는 집단과 그것이 처해진 현실에 등을 돌리고 무위도식하는 속물로, 사회도 민족도 모르고 오직 개인의 생물학적 생명만을 위해 사는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려는 것이며, 지금 한창 고양되고 있는 자주ㆍ민주ㆍ통일과 노동해방을 통한 새 사회 건설투쟁을 어떻게 하든지 막아 보려는 데에 그 속셈이 있는 것입니다.

본질적 속성으로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헌신성을 가집니다. 사람들의 가장 작은 공동체로서 가족공동체에서는 부부ㆍ부모ㆍ형제자매 사이의 자기희생적인 헌신성이 있습니다. 사회적 관계로부터 생겨나는 모든 공동체에서도 그 공동체의 이상이 잘 구현되려면 공동체의 성원이 그 공동체의 이상실현을 위한 헌신성이 담보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공동체에 대한 자기헌신성으로부터 발현하는 정서를 우리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헌신적인 정서로서의 사랑으로 그 공동체의 공고한 단결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대한 헌신성의 정서로서의 사랑은 아주 강렬해서 주어서 기쁘고 보람을 느끼는 정서로서, 특히 가족이나 앞으로 창조될 가족공동체의 주체로서의 남녀 사이에서는 매우 강렬하게 발현됩니다. 한편 특히 민족공동체는 그 흥망성쇠의 운명이 성원의 운명과 함께하는 운명공동체로서 그 성원의 강렬한 생명력으로서의 애국심을 발현시켜 줍니다.

사회혁명ㆍ민족혁명이라는 운동의 전위조직이라는 공동체의 성원들 사이에는 동지애라는 가장 의식적이고 가장 강렬한 자기헌신의 정서가 발현됩니다. 동지애는 자기의 혁명이상이 동지의 혁명투쟁으로 담보되고 자기의 혁명투쟁이 동지의 혁명이상을 담보시켜주는 데에서 발현되는 것이며, 그 정서가 사상의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서로 생명을 주고받는 가장 숭고한 사랑으로까지 발현되고 있음을 우리는 혁명투쟁의 역사에서 봅니다.


5.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의 높이와 질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그래서 인간다운 가치를 발휘하는 삶, 즉 인간다운 삶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에 맞는 삶, 그것을 더욱 증대시키고 빛내어 가는 삶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민족의 민중으로서, 노동자로서 살아가는데서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삶은 어떤 삶이라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앞서 인간을 둘러싼 모든 예속과 착취, 억압과 압박에 맞서 그것을 우리의 요구대로 지배ㆍ개조하는 것이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삶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을 옥죄는 억압ㆍ예속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너무나 많습니다. 많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을 말하자면 아마 이런 것들이겠습니다.

장시간의 힘든 노동, 직장에서의 비인간적인 대우, 사회의 싸늘한 냉대, 넉넉하지는 못한 생활, 충분한 휴식과 문화생활을 누리기 어려운 시간적ㆍ경제적 제약.

더 나아가서는, 정치적으로는 무권리, 정치는 노동자와는 무관하게 몇몇 정치꾼들이 차지, 사회는 점점 물질만능ㆍ극단적 개인주의, 나 자신도 점점 그렇게 변해 가는 것 같고.

이런 상황을 벗어나고자 조금만 투쟁에 나서면 국가보안법입네 집시법입네 해서 잡아가두고 해고시키고.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어디서 비롯되었습니까? 이 모든 것들은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민중이 생산수단과 국가주권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생산수단과 국가주권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구경꾼으로 그저 일하는 기계로 전락하게 만든 이 사회 때문에.

생산수단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힘들게 열심히 일하지만 생산물은 내 것이 아니고 사장의 것, 노동자는 그저 몇 푼 월급만 받으면 ‘땡’(노동의 소외). 국가주권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의 압도적 다수가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이건만 우리를 위한 정치는 없고, 가진 자, 있는 자를 위한 정치만 있을 뿐 말할 기회도 말할 통로도 없기 때문에. (사회의 소외)

그래서 그저 술이나 한 잔 걸치고 노래방에 가서 고함이나 치며 스트레스나 해소하고, 아니면 한쪽 구석에서 볼멘소리로 중얼거릴 뿐.

이래서는 안 됩니다. 과감히 나서야 합니다. 생산수단의 주인으로 국가주권의 주인으로 당당히 나서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이남사회의 본질은, 아직도 미국에 예속되고 지배받고 있는 분단된 식민지자본주의사회입니다.

미국의 부당한 간섭을 끝장내고 우리 힘으로 조국을 통일하며 노동자와 민중이 주인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투쟁으로 떨쳐 일어서야 합니다.

이 길이야 말로 이 시대, 이 땅에 태어난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게 사는 길이 될 것입니다.

착취가 있고 억압이 있으며 노예 같은 예속이 있는데, 이를 쳐부수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는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놔두고 어디에서 인간다운 삶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에게는 육체적 생명 외에 자주성이라는 사회정치적인 생명이 또 하나 있습니다. 육체적 생명은 끝나면 그냥 분해되고 없어지고 말지만, 자주적인 삶의 사회정치적 생명은 오히려 육체적 생명보다 더 중요하고 보람 있고 길이길이 후대에게서 부활되는 영생하는 생명이라 하겠습니다. 자주성은 인간이 인간다운 잣대이기 때문에 자주성이 없으면 인간이되 이미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물려준 찬란한 물질적ㆍ정신적 재부를 자양분삼아 우리가 다른 생명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생명체, 즉 인간으로 자라온 민족공동체에 우리는 우리 후손들에게 또 다른 물질적ㆍ정신적 재부를 많이 남겨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돈이나 물질 자체가 아니라 인간중심의, 인간을 위한 새 사회건설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예속과 억압당하는 민족과 민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 이 길만이 이 시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인간답고 보람차며 가치 있는 삶을 살며 빛내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육체적으로는 안락하지 않아도, 또 설사 그 길에서 쓰러질지라도 우리의 사회정치적 생명은 우리조국, 우리민중과 함께 영원히 살아 숨 쉬며 후손들의 소중한 재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인생의 의미와 보람을 보는 것입니다.

(2008. 1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