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1일 목요일

미군주둔 60년, 우리는 왜 맥아더를 이야기해야 하는가(1)

[이 글은 2005년 9월, 인천 월미도에 있는 이른바 <맥아더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라는 농성시위를 하던 때에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의 홈페이지 측의 요청에 의하여 3번으로 나누어 맥아더의 우리나라에 대한 범죄를 폭로하기 위하여 쓴 글입니다. 그중 첫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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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머리에

주한 미군이 우리나라의 38도선이남 땅에 들어온 지 올해로 꼭 60년이 된다. 국제적으로 인정된 미군의 주둔 명분은 일제 침략군에게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를 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미군은 우리나라의 이남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그들은 그러한 명분을 집어던지고 진주군으로서가 아니라 점령군으로서 들어왔다. 바로 맥아더는 그 점령군을 지휘하는 미국 태평양군의 총사령관이고, 주둔군의 명분을 집어던지고 점령군으로 모습을 바꾸어 조선인민에게 점령군 포고령을 반포한 그 장본인이다.

지금 우리는 일제식민지해방 60년이 지나도록 일제 식민지시대에서 자기 민족을 배신하고 동포들에게 고난을 들씌운 반역자들을 아직까지도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돌아보면서, 우리사회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는 일을 전 민족적으로 벌이고 있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해방된 조국에서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ㆍ민족반역자들의 치 떨리는 죄상을 되돌아보고 그들과 그들 후손들의 현주소를 알아보곤 사람들은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기막힌 일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 대부분이 일제 주구에서 미제의 충실한 주구로 변절하여 계속 일제 식민지시대의 친일주구로서 가졌던 기득권을 고스라니 이어받고 이승만 예속정권의 창건에서부터 역대 예속정권의 핵심적 세력으로 역할을 다했다는 사실이다.

미제는 식민지민중을 직접 통치하는 전전의 식민지통치방식을 바꾸어 식민지 점령지역에서 친미세력을 중심으로 해서 구성한 주민들로 예속정권을 만들어 정치ㆍ군사ㆍ외교ㆍ경제ㆍ문화ㆍ교육 등 각 분야에서 각종 조약과 원조 그리고 고문 등으로 얽어놓고 그들의 식민지통치정책을 구현해나가는 새로운 식민지통치방식을 취했다. 우리는 이것을 신식민지정책이라고 정식화하고 있다.

미제는 우리 땅에서 일제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마치고 38선 이북에 주둔한 소련군과 공동위원회를 열어 남과 북을 통일한 단일 정권인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워서 철군한다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짓밟고, 이남 땅에 단독선거를 실시하고 이러한 신식민지예속정권을 만들었으며, 그 핵심세력이 바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숭미 사대주의자들인데 그것은 바로 일제 식민지시대의 친일파ㆍ민족반역자와 친일 지주들이었다. 이들을 이어온 자들이 바로 지금의 반통일세력을 이루고 있으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예속정권의 정통성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과거청산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온 사회가 이에 대해 주목하고 그 귀추를 주시하고 있다. 또 「우리민족끼리」라는 민족적 이념으로 6.15공동선언을 이행하여 낮은 단계의 연방과 연합을 합친 통일을 위하여 매진하고 있는 6.15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래서 분단 60년을 맞이하여 민족의 자주평화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일이 바로 우리들 앞에 나서고 있다. 그래서 남과 북 그리고 해외의 온 민족이 올해를 「주한미군」철수의 원년으로 해서 힘차게 투쟁을 벌이고 있다.

주한미군철수운동에서 우리들 앞에 가장 먼저 나서는 일로 「주한미군」이 점령군의 모습으로 들어오게 한 최고사령관이고, 6.25전쟁을 일으킨 자들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자들 중의 하나이며, 조국의 이북 땅으로 쳐들어가 몰죽음을 당해 쫓겨나오자 이북 땅에 핵폭탄을 사용해 핵 완충지대를 만들려고 했던 핵전쟁광으로 아직도 인천 월미도 공원에 있는 그 맥아더의 동상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이리하여 이에 대한 철거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이에 대해 수구반동 반통일세력들이 이 운동에 맞서 나오고 있다.

그들은 미제와 미제에 빌붙은 친일교육자가 변절해서 팔자를 고친 친미교육자와 숭미 사대 미디어에 의해 60년을 교화ㆍ세뇌된 친미ㆍ숭미사상이 골수에까지 젖어 아직도 깨나지 못하고 있는 동포들이다. 미제의 이른바 ‘네오콘’ 등 온갖 국제적 모략이 그들 뒤를 받치고 있고 지원을 하고 있다. 어찌 쉽게 민족자주적 입장으로 돌아오겠는가. 우리들은 이들에게도 동포애를 가지고 교양선전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고 이들의 생각을 바로 세우는 것도 민족자주성을 구현하는 투쟁이다.

6.15시대를 맞아 주한미군철수운동이 한창일 때 강정구 교수가 「주한미군」의 부당성과 이를 해설하기 위해 6.25전쟁의 본질을 해설하는 논문을 썼다 해서 당국은 이를 국가보안법으로 걸어 조사를 벌이고 있다. 아직도 국가보안법은 시퍼렇게 눈을 부릅뜨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그 숨을 들이쉬고 있다.

강정구 교수의 논문은 학술적 표현이다. 그런데 이를 걸고 국가보안법으로 조사를 한다고 하니 당국은 시대의 흐름을 아직도 모르는가. 지금은 6.15시대, 남과 북이 서로 내왕하고 통일을 위해 서로 의논하고 이해를 함께 하려고 모대기고 있는 시대이다. 강정구 교수의 논문은 우리민족끼리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루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주한미군」문제를 다루고 이를 위하여 6.25전쟁의 본질에 대한 자기의 학문적 견해를 내었고 이어서 맥아더 동상철거문제를 언급했을 뿐이다.

당국자들은 이제 시대의 흐름을 인식하고 시대의 지진아에서 벗어나 국가보안법을 당장 폐지해야 할 것이다. 민족은 자주통일을 향해 나가는데 이를 가로 막고 국가보안법을 휘두르는 것은 바로 반민족적인 행위로 될 수밖에 없다. 당국은 하루속히 이 반민족적인 탄압을 걷어치우고 자주통일의 길에 함께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이 글은 「주한미군」철수운동의 시초에서 바로 마주 선 맥아더 동상철거문제에 즈음해서 맥아더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그가 과연 우리민족의 은인인가, 침략자의 원흉인가 하는 이야기를 우리는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 맥아더의 아버지와 미서전쟁(米西戰爭)

맥아더는 미국 아칸소 주(州)의 리틀록에서 출생했다. 미국-스페인전쟁(미서전쟁-美西戰爭)에서 무공을 세운 고급장교인 아서 맥아더의 아들로서 1903년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그 후 육군에 근무하여 1930년에 대장으로 승진했다. 군에서는 극동통으로 알려져 있고, 1936년 필리핀군의 고문으로 근무하다가 1937년에 일단 퇴역했다.

대일관계가 긴박하게 되자 1941년 7월에 현역에 복귀하여 미국 극동군사령관으로 필리핀에서 근무하다가 태평양전쟁을 맞았다.

1942년 초 일본군의 공격으로 마닐라를 빼앗기고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 연합군 남서태평양방면사령관으로서 대일작전을 지휘했다.

그 해 가을부터 뉴기니작전을 비롯하여 반격작전을 전개하였는데, 1945년 7월에는 필리핀을 완전히 탈환했고 이어 8월에 일본을 항복시켜 일본점령군최고사령관 및 대평양지역 주둔미군최고사령관으로 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제연합군(UN군)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고 전세를 역전시켜 인민군을 후퇴 시켰다고 하는데 1950년 10월에 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대공세를 맞아 패퇴했다.

맥아더는 이북을 점령하여 군정을 펴고 이북마저 식민지로 하려고 30만의 대병력을 투입하였으나 이들 병력을 몽땅 잃어버리고 마침내 그러한 꿈을 깨도록 만들었다.

이에 분한 나머지 그는 만주폭격과 조ㆍ중 국경 봉쇄를 주장했으며 대만의 국부군을 전쟁에 참가시켜야 한다고 주창했다.

맥아더는 그가 패퇴한 분을 보복하려는 셈인지 조ㆍ중 국경 이남에 핵폭탄을 투하하여 핵 완충지대를 만들어 우리나라를 영원히 핵 참화 속에 두려고 했던 천인공노할 전쟁광의 원흉이다.

이와 같이 6.25전쟁을 핵전쟁으로 비화시키려는 기도는 국제여론을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이를 둘러싸고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이 격화되었으며, 끝내 1951년 4월 사령관의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이상이 아주 짧게 추린 맥아더의 약력이다.

여기에서 맥아더 부자의 집안은 바로 미국 독점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전변되어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의 시작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미제의 침략전쟁과 그 세계패권주의와 더불어 그 생을 다한 자들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먼저 그 아버지인 아서 맥아더가 공훈을 세웠다고 하는 미서전쟁에 대해서 알아보자.

미국은 1850년대에 노예문제로부터 일어난 위기와 남북전쟁, 그 전후의 재건 그리고 대서부로의 개척과 사회개혁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1890년대에 들어서자 산업자본이 고도로 성장하여 독점자본의 형태를 띠게 되었고 선발 유럽 제국주의에 비해 늦기는 했지만 그때부터 해외 자본진출과 이를 위한 식민지쟁탈의 경쟁에 들어서는 제국주의로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1850년대부터 카리브 바다에 있는 쿠바에 설탕산업을 진출시키고 있던 미국 산업자본주의는 제국주의적 독점자본의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하자 당시 쿠바의 지배자인 스페인과 이해관계의 충돌이 벌어져 그것이 날이 갈수록 첨예화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쿠바에 4,000만 내지 5,000만 달러에 이르는 자본을 설탕과 담배공장, 제당공장, 망간과 철광의 광업 등에 투자하고 있었고 미국과 쿠바의 무역은 연간 1억달러에 이르고 있었다. 미국은 쿠바의 내전이 이러한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 크게 손실을 가져오게 되자 쿠바에 자본을 투자했거나 쿠바와의 무역에 종사했던 미국인들은 전쟁의 종식을 강력히 요구했고, 쿠바내전에서의 스페인 지배자들의 야만적인 행위는 미국인들의 인도주의적, 종교적 감정을 크게 자극하기도 했다. 특히 강제수용소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가해진 고통과 죽음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은 컸다.

이상과 같이 미국 독점자본의 이해관계와 야만적이고 잔학한 스페인 지배자들에 대한 도덕적 감정 등이 작용하여 미국의 쿠바에 대한 제국주의적 진출의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쿠바내전에 대한 미국의 군사간섭의 기회가 점차 무르익어갔다.

처음은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1895년 6월 중립선언과 1897년 클리블랜드를 승계한 맥킨리 대통령의 불개입선언으로 개입을 주저해왔지만 신문 등 여론으로 스페인 지배자들의 야만성과 잔학성을 과장해서 선전하고 전쟁개입을 선동했다.

1898년 1월, 수도 아바나에서 쿠바의 혁명세력은 완전한 독립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수락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 미국 정부는 쿠바 내의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불안상태가 계속된다면 강력한 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결의를 보이기 위하여 전함 메인호(Maine) 한 척을 아바나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여 사태가 위기로 치달았다.

게다가 미국주재 스페인 공사가 쿠바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가 쿠바의 한 혁명가의 손에 들어갔다. 그 편지에는 맥킨리 미국대통령을 모욕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이 내용이 1898년 2월 9일자 신문에 보도되어 미ㆍ서 양국 간에 나쁜 감정과 불신을 크게 조장시켜 놓았다.

이런 스페인공사의 편지사건이 있은 지 불과 6일 만에 2월 15일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이던 메인호가 폭발, 침몰하면서 266명의 미 해군수병이 살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메인호의 비극은 미국의 호전가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들의 신문들은 미국이 명예를 지키려면 쿠바사태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즈벨트 같은 제국주의자들은 메인호의 침몰은 명백히 스페인의 음모라고 하면서 스페인을 맹렬히 규탄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의회는 만장일치로 전쟁준비를 위하여 5,000만 달러를 배정했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메인호 폭침은 전쟁 도발자들에 의한 모략이라고 하는 말도 있다. 마치 훗날 베트남 통킹 만의 미 구축함의 피습으로 하노이폭격을 시작해서 베트남전쟁에 미군이 개입하는 계기를 만든 것처럼 미국이나 일본이 잘 쓰는 모략과 똑같은 것이라고 할까.

1895년에 일어난 쿠바의 반란에 즈음해서는 미국이 처음부터 그 반란의 와중(渦中)에 휩쓸려들었다. 이미 많은 의용병이 쿠바인민을 돕기 위해 쿠바로 떠났고, 또한 뉴욕에 본거지를 둔 쿠바인의 혁명단체가 발매한 공채도 잘 팔렸다. 해외진출에 반대한 미국인들조차 쿠바의 해방 자체에는 찬성했고, 쿠바에 재산을 둔 미국인은 물론 그 보호를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과 미국 사이에는 직접 전쟁을 유발할만한 중요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는데, 호전가들은 여론을 일으켜 스페인의 쿠바인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그것이 학대라든지, 압정이라는 식으로 실제보다 확대해서 신문에 보도되어 미국인으로 하여금 스페인에 악감정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의회가 결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불간섭 방침을 견지하였으나, 매킨리는 1896년에 실시되는 대통령선거에 공약으로 쿠바의 독립을 내세웠다.

마침내 1896년 4월 11일 대통령은 대 스페인 개전요청교서를 의회에 보내고, 20일 의회가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양국은 정식으로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미국군은 마닐라 만과 산티아고 등 여러 곳에서 승리를 거두어 전쟁은 불과 수개월 만에 끝났다.

전쟁결과 12월 10일에는 파리조약이 체결되어 쿠바는 독립하기로 하고,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은 미국의 영토로 되었다.

이 전쟁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아버지 아서 맥아더가 고급장교로 참전하여 공훈을 세웠던 것이다. 아서 맥아더는 이 공훈으로 장군별 준장을 달았고 필리핀으로 전근했다. 필리핀 점령군사령부에 근무하다가 1900년에는 소장으로 승진되어 필리핀 제8군사령관 및 군정장관에 임명되었다. 1906년 육군 중장이 되었고, 1909년에 퇴역했다.

이 장군의 아들인 더글러스 맥아더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아 군인다운 풍모를 갖추며 자랐고, 미군의 엘리트 장교 양성기관인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에서 미 육군 장교로서의 세계패권사상을 닦으며 졸업했다.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는 입학지원 자격과 지명권을 미국의 상원ㆍ하원 의원들이 대부분 행사하는 미국군인의 엘리트양성을 위한 학교로서 미국의 세계패권주의의 첨병을 양성하는 선민교육기관이다.

이 학교의 교육으로 선민의식이 충만한 청년이 만들어졌으며, 그들은 출세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오직 별을 얻기 위하여 굴종하고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는 우월감으로 대하는 지배욕으로 가득 찬 특수한 풍모를 가진 인간으로 양성된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아버지시대부터 인연이 맺어진 필리핀에서 대장으로 승진했고, 1936년 필리핀군의 고문으로 근무하다가 1937년에 퇴역했다. 퇴역 후 식민지지배자의 자리에서 향락을 누리다가 대일관계가 긴박해지자 1941년 7월 현역에 복귀하여 미국 극동군사령관으로 필리핀에서 근무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인 태평양전쟁을 맞았다.

이처럼 맥아더의 부자 2대는 미서전쟁과 뗄 수 없는 인연을 기진 인물로서 식민지통치, 그것도 미국식 식민지통치와 식민지 침략전쟁 속에서 식민지 지배방식과 식민지민중의 해방투쟁을 학살 탄압하는 골수의 식민지 군사지배자였다. 그들 부자를 세계패권주의자가 볼 때는 가장 우수한 지배자의 자질과 능력을 가진 자로 보였고, 식민지민중이 볼 때는 가장 잔악한 전쟁광신자요 학살의 원흉으로 보이는 인생을 산 자들이다.

미국은 쿠바를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켰으나 독립시키지 않고, 존 R 브룩(John R Brooke)을 쿠바총독으로 임명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3년 동안 총독군정을 실시하면서 학교를 세우고 공중보건시설을 세우면서 쿠바가 미국에 종속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후에 미국은 1901년에 공화제헌법을 만들어주었지만, 이와 동시에 미국의 내정간섭과 군사기지의 설치를 인정하는 󰡔플래트수정조항󰡕을 덧붙이고 1903년부터 99년간 관타나모 만 등을 조차 받아 미 해군기지를 설치했다.

미국의 총독군정정치가 종결되고 1902년 5월에 팔마를 수반으로 하는 공화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미국이 내정간섭권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비옥한 땅, 사탕산업, 교통수단, 관광시설 들 쿠바의 중추적 경제는 모두 미 독점자본에게 장악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수뢰, 부패, 실정, 무책임의 상징으로 인정되고 있는 고메스에 이어 가르시아, 사야스, 마차도, 바티스타로 그 부패의 전통을 이어오면서 친미예속 부패정권의 표본으로 되고 있으며, 미제는 이 쿠바의 예속정권에 의한 식민지통치의 경험을 살려 제2차세계대전 전후의 신식민지통치방식을 정립했다고 볼 수 있다.



'Unews에 게재 2005. 9. 12.'

댓글 1개:

  1. 북한, 중국, 러시아는 같은 나라입니다......공산국가 입니다...언제나 연합합니다.
    우리나라는 혼자서는 절대로 방어할수 없습니다. 혼자한다는 것은 자멸입니다.
    공산국가는 전세계를 공산화 만들려고 합니다. 미국이 없었다면 벌써 아시아는 공산화 되었습니다.
    공산국가는 한나라씩 한나라씩 잡아 먹을것이고, 그럼 미국. 유럽만 남게 됩니다. 유럽도 한나라씩 잡아 먹히고, 결국 미국도 잡아 먹힙니다.
    미국은 현재 남태평양 경계선에 핵잠수함, 항공모함을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대만, 필리핀, 한국 입니다.

    지금도 작전통제권(작통권)을 환수하라는 대모를 일으키는.....좌파(민주당)이 있습니다. 전라도 국민들은 작통권 환수를 요구 합니다......절대로 그건 안되며, 우리나라가 위험에 빠질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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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통권은 중요한 문제다......만약 작통권이 한국이 가지고 있다면.....육군, 해군, 공군 참모총장이 좌파들이면......북한은 전쟁을 일으 킵니다........좌파장군들은 오히려 미국을 공격하라고 지시 합니다. 어느 지점에 포탄을 쏱아 부어라.....그곳에는 미국이 있습니다.......미국은 배트콩 처럼 한국을 포기하고, 남태평양 경계선을 한국을 제외한 일본으로 선을 그을 것입니다....

    민주당, 북한은 작통권을 환수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민주당의 속샘은 무었인가 모르겠다. 민주당은 북한 앞잡이인가?. 왜북한 이익되게만 할려고 하나요?.....남북이 통일 될때 까지는 미국이 작통권을 꼭 가져야 됩니다....안전을 위해서 입니다...

    좌파의 뜻은 공산주의 입니다......민주주의 반대세력은 공산주의 입니다....미국, 일본, 프랑스 가도 좌파는 공산주의 입니다....보수니, 진보니 그런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사람을 현혹시킬려고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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