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대교육사의 새로운 정립을 위하여
말머리에
올해로 우리는 8.15해방 60주년을 맞습니다. 세상도 많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자신이 자주적인 창조성을 구현해서 변화 발전된 것이 아니라 남의 장단에 놀면서 변화된 것입니다. 그렇게 변하다보니 지금은 민족교육이란 말조차 진부한 것이 되고 대통령이나 정부의 교육정책 책임자까지도 교육을 기업으로 보고 이를 외세에 개방한다고 야단입니다.
본질적으로 교육이란 인류문화의 발상 때부터 민족단위로 이루어져 왔고 그것은 선대가 창조한 문화를 후대가 이어가면서 새로이 창조해나가는 역사적 과정이며, 문화가 민족의 특색을 표현하듯이 교육 또한 민족마다 고유한 방식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라는 실용주의의 새로운 변종으로 나타난 세계화라는 것이 교육을 민족문화와 단절시키고 교육의 기업화를 내세워 마침내 우리 교육을 과히 시장바닥으로 내 놓고 이윤추구라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으로 포장하여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수탈대상으로 놓이게 되었습니다.
교육현장에서 직접 교육을 맡고 계시는 여러 선생님들에게 교육의 본질문제로서의 민족교육을 외면하고 교육을 기업화하는 과정의 그 본질은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우리 남조선 교육의 현대사가 어떻게 본질로부터 굴곡되어 왔는가를, 제가 이 사회에서 자라고 또 초등, 중등, 고등의 교육현장에서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장 교육자들이 남조선 교육의 현대사를 새로이 정립하는 데 참고하고 거기에 일조가 되었으면 합니다.
1. 8.15해방과 건국준비위원회의 새나라 교육
미제와 그 앞잡이들은 우리민족의 8.15해방을 미국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에게 전승함으로써 얻어진 것, 다시 말해서 미국의 시혜로 얻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남조선의 각급 교육정책에서 그 뼈대로 하여 왔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민족의 일제와의 피나는 투쟁, 승리의 투쟁은 없는 것으로 되고, 일제의 모든 교육정책을 뒤엎고 새로이 새나라 교육으로서의 8.15시기 초에 있었던 민족교육의 태동은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되고 맙니다.
우리교육의 현대사는 바로 8.15해방과 더불어 고동쳤던 민족자주의 교육에서부터 시초에 두고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기초에는 첫째로, 우리민족은 현대병기로 장비하고 잘 훈련된 20만의 일제의 조선군과 100만의 관동군 그리고 40만의 괴뢰 만주국의 군대인 위만군과의 피어린 싸움으로 일제를 타승하고 이북 전역의 일제 통치기관을 엎어버리고 인민정권을 세운 이북의 8.15해방과, 일제가 항복을 대비하여 통치권을 스스로 남조선 인민들에 내 놓았고, 이를 접수하여 전 남조선 전역에 걸쳐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이를 통하여 인민대표자를 뽑아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우리민족의 위대한 8.15의 승리를 내던져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민족의 위대한 승리를 내던져버리고 어떻게 8.15 일제 식민지 해방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군은 일본군과 이들의 지배기관에 있는 일본 관리들의 항복을 받고 이들을 무장해제한다는 국제적으로 인정된 명분을 가지고 진주하는 군대로서의 미 주둔군을, 미제 패권주의자의 우두머리인 트루만과 그의 하수인인 맥아더는 점령군으로 돌변시켜 남조선을 점령하고 군정을 선포했습니다.
그들이 점령하여 가장 먼저 한 일이 인민들이 민족자결권을 발동하여 선포한 국가와 그 통치기관인 각급 인민위원회의 파괴였습니다. 이는 강자에게만 논리가 있고 약자의 말은 없다는 제국주의자들의 약육강식의 표현, 즉 패권주의의 논리일 뿐이며, 전후의 혼란한 틈을 노려 조국의 이남 땅을 군사력으로 강탈한 침략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미제는 남조선 전역에 군정을 펴고 일제 식민지시대에 동족을 배신하여 일제의 군국주의 침략정책을 동포들에게 반역적으로 강제하고 일제의 살인, 방화, 약탈 등에서는 왜놈보다 더 악질적으로 설쳤던 일제의 주구들을 불러 모아 미제의 점령정책을 펴 나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제의 주구가 다시 미제의 주구로 변신하여 일제 식민지시대에서 누렸던 기득권을 고스라니 그대로 물러 받게 해주고 이들을 미제가 세운 예속정권의 주체로 만들어주고서 지금까지 그 체제를 이어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교육도 8.15해방을 맞이하여 건준 교육부에서 초야에 묻혀 있던 조선어(한글)학자들을 찾아 초빙하여 9월부터 시작되는 개학을 앞두고 교사들에게 「조선어철자법통일안」을 강습시켰습니다. 배우는 선생님들이나 가르치는 한글학자들이나 모두 열기에 넘쳐 있었습니다.
일제 식민지시대에서 황국신민교육에 앞잡이로 설친 자들은 모두 쥐구멍을 찾아 도망쳤지만 미제의 점령 포고령으로 다시 살아나 그대로 군정청의 문교부관리로 등장하여 이번에는 친미, 숭미, 공미의 식민지 노예교육의 현장에서 설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들 중 오천석은 존 듀이의 실용주의 교육을 그대로 베껴 ‘새교육’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일제의 군국주의교육 사상에서 미제의 세계 패권의 이론적 지주인 실용주의교육 사상으로 재빨리 변신하여 미제의 침략을 개척(-프론티어)이라는 이름으로 찬미하는 이론을 펼쳤습니다. 이를 위하여 제국주의적 침략사상과 자본주의적 수탈착취사상을 창업정신과 개척정신으로 치장하고, 일신의 출세를 위하여 남에게 굴종하고 또는 남에게 군림하는 출세의 야망으로 충만한 자본주의적 사대주의적 인간을 양성한다는 이론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새교육’의 이론은 그 후 우리사회의 사범대학에서 필수과목으로 되었고 이남 사회의 교육지침으로 되었으며 그 후 이남 사회에서 내온 여러 교육이론들은 모두 이들의 아종, 변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미제의 철학은 철학, 이념, 이상이라는 것을 모조리 무시하는 무철학적 철학이고 오직 이윤을 추구해서 나서는 기업정신, 지배영역을 넓히는 개척정신을 말하는 실용주의일 뿐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민족의 후대를 창조하기 위한 교육은 진부한 것으로 되고, 이해에 밝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인간, 나라나 겨레는 진부한 것으로 보고 미국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다보는 숭미정신을 가지는 인간으로 되도록 하는 것이 세계인으로 만드는 교육이라 하고 오직 이것만이 이 땅에 남게 된 것입니다.
2. 8.15 직후의 민족교육에 대한 인민들의 열망
우리민족만큼 후대 교육에 관심이 많은 민족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국가적으로는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우리민족은 자주적인 민족으로서 과학지식을 개발하고 문명의 이기를 발명하여 일찍이 청동기문화를 비롯하였고, 고구려의 철기문화는 고구려를 강성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경당(扃堂)제도로 국민개병과 교육의 의무로 문화와 국방을 함께 전수했으며 국민이 모두 기본적인 무예를 습득하여 도적들이 나라를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백제의 태학제도는 과학기술문명을 열어 삼국 여러 나라와 중국 일본으로까지 문화를 전수하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 신분에 관계없이 교육이 국가적으로 고루 보급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일제는 우리민족에게 우민정책으로 중등교육기관조차 좁혀놓아 부유층만 받을 수 있도록 하고, 고등교육기관은 식민지정책에 필요한 부문만 두어 식민지통치를 위한 고급관료를 양성하고 친일부유층의 지위를 담보하기 위한 것으로 제한해두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나라에 그들의 최고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경성제국대학에는 법문학부만 두고 사립교육기관으로서의 전문학교는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두었으나 그들의 식민지통치의 하수인으로서의 지식인으로서 법관, 문인 등을 양성하였으며, 연희전문학교에는 자연과학교육을 위한 수물학과, 화학과, 생물학과, 천문기상학과를 두었으나 자연과학연구를 위한 학자를 양성하는 것은 아니고 그들의 식민지통치를 위한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일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교육정책이긴 하지만 조금이라도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식을 조금은 자유로운 일본에 보내어 고등교육을 받도록 했습니다. 특히 조선여성의 자녀교육에 대한 노력은 어느 민족보다 강해서 밤잠을 자지 않고 길쌈을 하여 자녀의 학자를 마련하는 일에 헌신적이었습니다.
이처럼 일제의 혹독한 우민정책으로 교육시설의 부족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마을마다 교육에 관심을 둔 선비나 일찍 개명한 인사들이 야학을 열어 자라나는 가난한 후대들에게 글을 익히고 셈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제가 패망하고 식민지상황에서 벗어나는 8.15해방을 맞이하게 되자 곳곳에서 중등교육기관으로서 중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었습니다. 일제가 우리민족을 수탈하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식량창고, 고치창고, 무명창고 등을 임시로 학교시설로 고쳐서 향학열에 불타는 학생들을 모집하여 학교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해방되자마자 면마다 적어도 중학교(3년제) 하나는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르치는 교사도 초등학교 교사 중에서 실력이 있는 교사들이 나섰고, 강의록으로 독학한 야학교 선생들도 나섰습니다. 이들은 모두 민족교육의 본질을 몸으로 받아 안고 있는 교사들이었습니다. 다시는 식민지 노예로 살지 말자는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는 사람들이었고 거의 모두가 일제 식민지를 반대하여 투쟁한 경력이 있거나 그 해방투쟁에 협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선교육자협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다시는 망국민이 되지 말자는 뜻을 가지고 민족자주정신을 고취하는 교육을 주창했습니다.
3. 자생적 민족교육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
미제는 군정을 실시하여 교육을 일제 식민지교육에서 저들 미제의 식민지교육으로 전환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학생들은 일제 식민지를 반대하여 일어선 광주학생운동을 비롯하여 반제투쟁에서 단련된 선대 청년학생들의 빛나는 운동을 이어받아 미제의 식민지교육정책에 정면으로 맞받아 나섰습니다. 그것의 최초로 나타난 것이 이른바 “국대안(國立大學校設置案)반대투쟁”이었습니다.
미군정의 교육정책이 일제 식민지시대에 일제에 붙어 친일교육을 하고 일제의 침략정책을 고취하던 배족적인 친일교육자들을 등용하여 미제 식민지교육정책을 펼쳐나가자 애국적인 교육자들과 청년학생들이 이런 친일교육자들을 배척하는 등 미군정의 교육정책을 반대해 나섰습니다.
민족교육자들이 민족자주적 교육을 주창하고 학생들이 이를 받아들였으며, 미제가 일제를 청산하지 않고 공립ㆍ관립학교에서 친일반역자를 교단에 내세워 그들의 식민지교육의 기초를 다져나가자 학생들은 이들을 규탄 배척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미제는 그들의 주구로 만들어놓은 친일 교사들이 학생들과 지역 민중으로부터 배척당하자 장래의 그들 식민지정책에 위기를 느껴 그들의 식민지 주구교육자의 양성과 그들 제국주의 문화의 전파를 위한 하수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고등교육을 틀어쥐려고 이른바 ‘국립대학교설치안(약칭 국대안)’을 내어놓고 대학을 완전히 장악하려 했습니다.
미제의 식민지교육정책으로 ‘국대안’이 나오자 대부분의 교육자들과 학생들은 반대해 나섰습니다. 이 투쟁은 처음은 대학⋅전문학교에서 일어나더니 전국적으로 퍼져 모든 중등학교가 투쟁에 참가했고 나중에는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동맹휴학에 합세했습니다.
미군정은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일단 이를 보류하고 수습하기는 했지만 애국적인 학생들과 교사들을 그대로 두고서는 식민지교육정책을 밀고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고등교육기관에서 그들의 정책을 반대하는 교사들과 학생들을 폭력배를 동원해서 추방했습니다.
그리고 지방에 일어나고 있는 민족교육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이른바 “사립학교설치 기준령”이라는 법령을 만들어 중등학교와 대학 등 교육기관의 인가조건을 어렵게 만들었고, 교사자격제도를 정하여 교사가 되는 길을 어렵게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사들, 일제 식민지시대에서도 지방에서 우리 청소년에게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던 애국적 교사들이 관제 교사자격에 걸려 추방당했습니다.
이리하여 명색은 해방이지만 일제 식민지시대에서 황국신민교육에 앞장섰던 민족반역의 교육을 하던 자들이 미제의 식민지교육을 위하여 다시 교단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들은 군, 도, 군정청 문교부의 장학사, 장학관, 편수관이 되어 우리 청년들을 친미, 숭미, 공미의 줏대 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데 그 역할을 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4. 교육모리배로 전환되는 사립학교
공립학교는 문교부와 도 교육당국자들에 의하여 이미 장악되어 있었으나 사립학교는 ‘사립학교 설립기준령’이라는 것으로 옭아매게 되었는데, 사립학교는 이 ‘기준령’에 의하여 재단을 구성하여야 했습니다.
고등교육기관으로 일제 때부터 사립학교로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혜화전문학교 등이 있었고, 이들은 8.15해방 후 각각 연희대학교, 고려대학교, 동국대학교라는 대학으로 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인 이시영이 귀국하여 1920년대에 중국 망명지에서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정신을 계승한다면서 신흥체육대학이 새로 설립했습니다(한양대학교의 전신). 대구에는 경주의 대지주이며 민족운동가인 최식이 설립한 ‘대구문리과대학’, 나중에는 ‘대구대학’이 설립되었습니다.
이들은 대개 원래 종교단체와 경주의 최식을 제외하고는 거의 친일지주가 설립한지라 재단구성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지방에 산재해 있는 사립 중등교육기관으로서의 중학교들이었습니다. 이들 중 어떤 학교는 아예 탄압을 받고 폐교되기도 했고, 당시 고등공민학교로(성인교육기관의 명분을 가지고) 수준을 낮추어 당국이 지목한 교사들을 추방하고 그대로 유지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학교는 재단을 구성하여 ‘설립기준령’에 따라 정식 중학교의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재단의 구성이라는 것이 아주 묘했습니다.
당시 지주들은 정식으로 독립정부가 구성되면 토지개혁이 있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주는 토지를 그대로 소유할 방도로 명목상 육영기관의 재단에 속한 토지로 해서 그 토지의 사실상 소유자로 하려는 지주들의 욕망과, 사립학교를 운영하던 교사들의 설립기준령에 따른 재단인가문제를 해결하려는 욕망이라는 이해관계가 묘하게 일치되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운영을 맡았던 교사들은 친일지주에게 몰려갔습니다. 재단이사장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주의 토지가 학교재단에 속해 있어도 그 지대(소작료)는 지주가 여전히 받아 챙기고 학교는 학부형들이 내는 학생들의 수업료 등 납부금으로 운영한다는 조건을 내어놓았던 것입니다. 지주에게는 토지개혁이 된다면 없어질지도 모르는 토지에 대해 지대를 그냥 받을 수 있는데다가 육영사업가의 명예도 생기게 되는 일이라 흔쾌히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학교운영은 당초의 민족교육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학교당국으로서의 교사는 학교를 운영하기 위하여 기부금도 받고, 정원초과의 보결입학도 시키고 해서 막대한 돈을 벌 수 있어서 학교는 과시 모리의 수단으로 전락되고만 것입니다.
한편 학교에 자기 토지를 명색만으로 기증한 재단구성자로서의 지주 이사장은 학교운영에서 상당한 수입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명색만의 이사장이 아니라 실권자로서의 이사장으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교사 측 운영자와 갈등이 빚어졌고 학교분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규는 결국 돈의 논리에 따라 대개 재단이사장이 이겼고 교사 측 운영자들은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교육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남을 수탈하는 데 이골이 난 친일지주의 학교운영을 통한 치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한 피해는 교사들과 학생들 그리고 학자를 대는 학부모들에게 그대로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교육자나 육영사업가들이 가져야 할 도덕적 덕목이란 전혀 없는 수탈자의 본성을 충분히 발휘하여, 학생모집정원의 몇 배나 되는 학생들을 모집하고 입학금, 기부금을 챙겼고 생계비도 안 되는 봉급으로 교사들을 수탈해서 엄청난 치부를 했습니다.
친일지주로서의 학교운영자가 수탈 치부한 재부는 당시 자금염출의 원천이 거의 없는 사회경제적 정황으로서 사기협잡의 정치판의 정치자금의 유일한 원천으로 되었으며, 친일지주 자신들이나 그들 자식들의 정치적 출세의 담보로 되었던 것입니다. 전쟁 중, 대학생 징집보류제도로 대학생들이 전선에 나가지 않게 되자 농민들은 땅 팔고 소 팔고 해서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게 되어 아무 시설 없는 대학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대학은 모리배들의 소굴로 되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대학 건물을 ‘우골탑’, ‘피골탑’이라는 새로운 말도 만들어 불렀습니다. 이런 것이 전쟁 후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의 물질적 기초의 중요한 원천으로 되었고 이 사회의 사학교육의 보편적 형태로 된 것입니다.
오늘날 이들은 거대한 콘체른을 형성해서 막강한 정치력을 가지고 있어서 법을 만들기도 하고 교육개혁입법을 막기도 해서 그들의 이해관계를 보장하는 물질적 기초로 되고 있습니다.
5. 우리교육의 현대사
우리 현대사는 8.15 일제 식민지해방으로부터 개막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로부터 벗어나는 운동은 바로 나라의 주권을 찾는 일이고 동시에 일제 식민지통치에 의해서 가로 막혀 있던 우리사회의 근대화가 그 질곡에서 벗어나는 일었습니다. 봉건제사회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구조 밑에서 토지의 봉건적 소유관계에 의한 수탈 구조를 가진 사회였습니다. 그러한 봉건국가인 봉건조선은 근대국가로서의 일제의 식민지로 되자 일제는 봉건적 수탈구조를 그대로 온존해 두고 거기에다 근대국가로서의 지배체제를 가진 2중적 지배구조를 가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봉건적 수탈구조를 가지고 봉건적 유제도 고스라니 온존된 근대적 지배체제를 가진 사회로서의 식민지로 된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식민지반봉건사회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은 일제의 식민지상황에서 벗어나고 반봉건적 수탈에서 해방되며 온갖 불평등한 봉건적 유제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혁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이라고 합니다.
바로 8.15민족해방은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시작인 것입니다.
여운형 선생은 우리혁명을 ‘진보적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도 했습니다. 그 ‘진보적민주주의’는 첫째 정치적 평등이고, 둘째 경제적 평등이며, 셋째 사회적 평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교육의 현대사는 이러한 사회혁명에 그 뿌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교육에서는 누구나 교육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 교육이란 민족문화를 계승받고 창조할 수 있는 기능을 기루는 일입니다. 이것을 민족교육이라고 하겠습니다. 민족의 성원은 어느 누구도 민족문화를 계승받을 권리가 있고 창조에 동참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민족문화는 민족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민족교육은 민족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원천입니다.
문화는 민족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창조되고 있으며 그 민족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이 문화는 다른 민족의 문화와 융화되어 인류문화로서의 큰 바다에 어우러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족문화가 없이는 인류문화가 존재할 수 없고 인류문화와 어우러질 때 민족문화는 새로운 창조의 계기를 맞을 수 있고 더욱 빛나는 것으로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민족교육이 위협 당하고 있습니다. 민족교육을 내던지고 이윤의 논리 속에 세계화라면서 천박한 제국주의 식민지 문화가 마구 들어오고 있으며, 교육을 상업주의의 잣대로 재단되고 있습니다.
기초과학의 토대가 없는 과학기술은 남이 만들어 놓은 기계나 계기를 조종하고 읽는 것밖에 할 수 없습니다. 세계화 바람에 우리사회에서 기초과학의 대중적 기반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기초과학의 지식 없이 새로운 기술을 창조할 수 없고 따라서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자립적 민족경제의 토대 위에서 민족문화의 자주적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민족교육은 민족의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집니다. 자기가 사는 국토를 잘 알아야 나라에 대한 애착이 생기고 자원을 이용하는 지혜도 생깁니다. 나라마다 국토가 달리 있고 거기에 있는 자원도 다릅니다. 그래서 그 땅에서 나오는 문화도 다릅니다. 다른 나라와 경제를 교류하더라도 자기 것을 잘 알아야 남의 것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삶 속의 교육이기에 삶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 후대교육을 함께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육을 중앙에 집중한다는 것은 교육의 획일을 도모하고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이루는 데에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폐단은 지난 군부독재체제에서 싫도록 보아 왔습니다.
민족교육은 교육을 후대를 위한 가장 값진 것으로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교육을 담당하는 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 주게 됩니다. 교권은 어느 누구도 도전받을 수 없는 교육자가 가지는 신성한 권리입니다. 교육자가 존경을 받는 것은 그 사회가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표징으로 됩니다.
6. 우리교육의 현대사를 바로 정립하기 위하여
우리교육의 현장은 교육이라는 본질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교육은 그 사회의 집단적인 사회적 활동입니다. 사회적 활동으로서의 교육이 그 본질을 떠나 있다는 사실은 바로 그 사회의 사회적 성격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현장교육은 바로 우리사회의 사회적 성격에서 근원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사회의 사회적 성격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사회는 남북이 하나의 겨레로서 하나의 나라로 살아야 할 나라가 외세에 의해 인위적으로 분단되어 살고 게다가 이남 사회는 미제의 군대가 사실상 점령하고 있고 미제의 이해관계를 잘 반영하도록 하는 예속정권에 의해서 미제의 지배하에 있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 상황, 즉 신식민지상황에 있으며, 자본의 논리가 철저하게 관통되고 있는 자본주의사회이기는 하지만 그 자본의 주체가 미제를 우두머리로 하는 다국적 초국적 독점자본인 심히 정상적이지 못한 파행적인 자본주의사회입니다. 그래서 우리사회는 분단된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단된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라는 본질로부터 나오는 우리교육현장의 굴곡은, 첫째로 분단된 형제인 이북을 철저히 반대해야 하기에 이북 동포와 함께 만들어온 민족의 역사, 그중에서 특히 항일민족해방운동의 역사를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민족의 자주적인 역사를 깔아뭉개버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민족의 긍지 높은 자주민족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미국의 은혜나 구걸하는 약소민족이라는 완전히 굴곡된 역사관과 민족관을 가지도록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의 군대의 통수권마저 미군에 잡힌 나라가 자주독립국가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제의 독점자본이 세계화 바람을 타고 이윤이 생기는 대학교육을 개방하라고 할 때 예속정권의 교육책임자가 그 개방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임은 명백합니다.
미제의 예속정권의 본질에서 친미 숭미 공미의 사상을 퍼뜨리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우리 이남 땅에 점령군으로 들어와 6.25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중의 한 사람이고, 전쟁 중에 피난민을 마구 기총소사하고 굴다리 밑에 쳐 넣어 집단학살하며, 이북에 들어가서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집단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이북 인민군의 반격을 맞아 30만 대군을 잃어버리고 미쳐버린 다음 이북의 조ㆍ중국경의 이북 쪽에 20~30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폭 100킬로미터의 코발트 방사능지대로 만들려고 했고, 세균전, 화학전으로 숫한 이북동포들을 학살한 민족의 원수인 맥아더를 은인으로까지 만들어 교육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전술이란 태평양전쟁 때와 6.25전쟁 때 자기 휘하의 장병을 포위 속으로 빠져들게 하여 몰죽음을 당하게 하고 제만 살아남아 내빼거나 멀리 떠나 있는 천하의 몹쓸 미련한 장군을 명장으로 치장하는 재주는 숭미 공미의 극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식민지 예속정권의 교육에서 벗어나야 민족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민족은 사회의 각 부문에서 이미 미제의 식민지정책으로 미제와 그 앞잡이들과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민족은 남과 북 모두 미제의 패권주의와 격돌하고 있습니다. 미제가 이 땅에 있는 이상 우리민족의 현대사를 자랑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후대에게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민족 자주적 민족교육을 위하여 미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자 !!!
(2005.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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