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2002년 4월인가, [사람과 사람]이라는 [국제민주연대]의 잡지에 게재한 글입니다. 컴퓨터에 보관한 파일을 정리하다가 눈에 띄어 다시 읽어 보았더니 박정희 유신체제의 반민주 반인권이 가슴 밑에서 분통이 되어 치어 오르기에 여기 블록에 게재합니다.
내 인생의 한 순간
나는 지금 일흔이 된 노인이다. 일흔 노인이라면 지금은 흔하지만 옛날에는 ‘인간칠십 고래희’라는 말이 있을 만큼 오래 산 것이다. 이제는 인생을 마감할 때가 다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지나온 인생길을 되돌아본다. 그러면 그 굽이굽이 지나온 길이 아득하게 떠오른다.
소년시기에 눈앞에서 조국이 분단되는 슬픔을 보고 이를 반대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온 몸을 바쳐 죽어간 동무들의 얼굴도 떠오르고, 그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 한때나마 평화로운 초등학교 교사시절 때 포도 알처럼 빛나는 어린 제자들의 눈동자도 떠오르며, 학문의 길에 들어서 연구논문을 가지고 은사 앞에서 동문과 세미나를 하던 흑판의 판서 소리, 인자한 스승의 온화한 미소, 후대에게 학문을 전수하던 강의실…, 모두 다 평화로운 한 때였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인 칠순의 시기에 든 지금의 나는 갈라진 민족을 아울러 조국을 통일하는 운동의 길에 들어서서 처절하게 반생을 겪은 변혁운동가의 모습이다.
그래서 사형선고도 받았고 무기징역을 두 번이나 살았으며 지금도 몸은 비록 감옥을 벗어나 있지만 그 사슬에 묶여있다. 이처럼 나의 인생은 전반과 후반이 전혀 사는 모습이 다르다.
나의 인생이 이처럼 급변하게 된 원인을 따지자면 나는 혁명가의 집안에서 자라나 나라없는 민족의 서러움을 유년시기부터 뼈저리게 맛보았으며 그로부터 해방된 기쁨은 더욱 컸고 다시 나라가 반동강나서 자주성 없는 겨레의 서러움을 당한 데에도 있지만, 학문연구와 그것을 후대에게 전승하는 교수의 자리에서 어느 날 갑자기 바로 그 날로 쫓겨나게 된 너무나 절박한 순간을 맞은 데로부터 시작된다.
1976년 2월 29일 대학에 출근해서 휴게실에서 차 한잔을 시키고 전화로 그 해 신설된 통계학과 수강신청 준비를 위해 교무과와 협의하고 나서 자리에 와 앉아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학교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는 경북 도경 정보과 형사가 내 앞자리에 앉아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얼굴을 들고서 의아한 눈을 하고서,
“어서 오세요. 차 한잔하시지요.”
“예, 좋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거저 아무 것도 아닌 얘깁니다만.”
“예, 말씀해보시지요.”
“선생님, 이번 교수 재임명의 일 말인데요.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 그 일 말입니까. 교수들도 그런 자극을 받아야 연구도 열심히 하고 교수에도 정성을 들일 거 아닙니까? 허허…”
“그런데 말입니다. 만일, 가상해선데 말입니다. 만일 선생님이 탈락된다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허, 나야 이처럼 열심히 안 삽니까? 전혀 그런 일을 생각해보지 안 해서 할 말이 없네요.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저 가상해서 한번 물어본 것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일어나,
“그럼 선생님, 또 뵙겠습니다.”
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무엇인지 모르게 암시의 그늘이 비치었다. 그래서 눈길을 딴 데로 돌려보았더니 선배교수 한 분과 눈이 마주쳤다.
평소와 같으면 나를 반갑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거나 나를 자기 곁에 오도록 손짓을 하던지 내 곁에 오시던지 하는 분이 오늘은 그답지 않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나는 일어나 그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 그의 곁에 가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지금 밖에 나간 형사가 나에게 좀 이상한 말을 하고 나갔습니다…”
나는 그 형사가 한 말을 그대로 이야기하면서
“선생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선배 교수는 한숨을 내쉬더니,
“그게 가상이 아닙니다.”
나는 할 말을 잊었다. 한참 그대로 앉아 있다가 나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연구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그러자 당시 캐나다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가 휴가를 맞아 한 학기 동안 우리교실에 나오고 있던 동기동문 친구가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 나를 끌어안더니,
“이 사람 용기를 잃지 말게. 나는 며칠 전에 알고 있었지만 참으로 자네에게 말하기가 어려웠네. 모진 바람은 언제나 부는 것은 아닐세. 휴가 받은 셈치고 우선 푹 쉬게나.”
진심으로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함께 대학 문을 나섰다. 그날은 둘이서 술을 흠뻑 취하도록 마셨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내에게 하기 어려운 말을 겨우 전하고 잠자리에 들어 골아 떨어졌다. 아마 그 동안 쌓인 피로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는 일종의 편안함이었을까.
다음날로 나는 배낭을 메고 산으로 들어갔다. 내가 혼자 잘 가던 내 고향 밀양 천황산이다. 정상에 올라 소년 때 여기에 와서 미국 침략자와 그 앞잡이로 들어선 친일역적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 나선 이제 가명조차도 아득히 잊어버린 동지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무덤도 없이 아마 이 산천에서 해방되는 날까지 떠돌고 있을 넋.
그리고 평화롭던 연구생활과 교수생활도 순간순간 사진첩처럼 펼쳐진다. 20년 가까운 그 세월이 펼쳐진다.
그 동안 많은 연구 성과도 올렸고 세계에 우리 민족의 수학 학문이 있음을 알렸다. 참으로 무지한 군사정권의 폭정이다. 상급과 훈장을 바라지도 않았지만 난데없이 추방이라니.
물론 나는 대학에 있으면서도 청년학생들의 민주주의와 조국통일운동에 동정적이었고 이들을 물심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 투쟁이 빗나가는 노선을 잡을 때 아낌없이 충고를 했고 이들이 어려운 일에 빠지면 나의 교수신분의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구해내기도 했다.
이런 것이 모두 ‘국가관 미확립’이란다. 분단된 민족의 지식인의 양심을 법으로 규제해서 감옥에 쳐넣지 못한 그들 독재는 ‘교수재임명’이라는 제도를 내세워 그 폭정의 수단으로 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지리산으로 갔다. 지리산은 해방전사의 어머니이다. 봉건시대에는 봉건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식민지시대에는 외세의 침략에 반대하기 위해 농민은, 민중은 어머니 산을 찾는다. 지리산은 아득히 먼 신라시대부터 압제의 멍에에 서러움을 받은 민중이 찾는 어머니 품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새로운 삶을 다짐했다. 민중의 해방을 위해, 민족의 해방을 위해 이름도 없이 죽어간 겨레의 전사들에게 다짐했다.
민주주의가 없고 자주성이 없는 민족에게는 학문의 자유마저 없다고, 그래서 이제는 편안함의 너울을 벗어 던지고 전사의 전투복으로 갈아 입겠다고, 외세의 앞잡이 군사정권과 침략자의 앞잡이 예속정권과 그리고 조국의 분단과 식민지 착취의 원흉 미국을 몰아내고 자주적 민주주의 정부를 건설하고 민족의 자주적 통일을 위하여 전사로 나서겠다고.
나는 산을 내려왔다. 이제 산을 오를 때의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찬 얼굴은 아니었다. 새로운 다짐으로 미래의 찬란한 이상을 내다보는 평화가 충만한 미소의 얼굴로 바뀌었다.
집에 내려온 바로 그 이튿날 예쁜 소녀가 이재문 동지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이 동지한테서 연락이 왔다. 이 동지는 나와 함께 청년학생들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원호했던 동지이다.
독재정권은 이 동지를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사건’으로 많은 현상을 걸어놓고 수배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아지트에서 만났다. 그리고 박정희 군사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연합정권을 세워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쟁하기로 서로 맹세했다.
그리고 나는 비록 대학에 다시 교수생활로 복귀는 되었으나 학문연구가 본업은 아니었고 그것은 생활의 수단으로 되었으며, 민주주의 운동과 자주적 통일운동이 나의 본업으로 자리잡은 직업적 변혁운동가로 변신했다.
그로 인해서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죽음의 바로 일보 전에 서기도 했고 독재정권시기의 이른바 ‘좌익수’라는 딱지를 달고 죄수들이 말하는 이른바 ‘꼽징역’을 살았다.
언제 햇빛을 볼지 모르는 무기징역을,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리고 지금도 사슬에 감겨 산다.
어떤 사람은 인생에서 변화의 순간을 우연적인 것으로 맞는다. 그러나 나는 독재자가 만들어주어서 맞았다. 그래서 변신했다. 그러나 그 변신은 내 인생에서 영광의 변신이다. 식민지 예속 사회에서, 분단된 민족에서 민중해방,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의 인생만큼 더 영광스러운 인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白首靑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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