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1일 목요일

미군주둔 60년, 우리는 왜 맥아더를 이야기해야 하는가(3)


[이 글은 2005년 9월, 인천 월미도에 있는 이른바 <맥아더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라는 농성시위를 하던 때에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의 홈페이지 측의 요청에 의하여 3번으로 나누어 맥아더의 우리나라에 대한 범죄를 폭로하기 위하여 쓴 글입니다. 그중 셋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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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비전투 민간인을 300만 명을 학살한 맥아더

맥아더는 6.25전쟁에서 우리민족에게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재난을 들씌웠다. 전쟁에서 전투원끼리의 살상도 교전 이외의 살상은 전쟁범죄에 들어간다. 맥아더는 6.25전쟁에서 피난하는 민간인을 폭격과 기총소사로 마구 학살하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도시와 촌락, 농사 등 생업활동을 하고 있는 민간인을 아무런 경고도 없이 마구 죽이게 했다. 그의 지휘 하의 전투원은 도시를 점령하거나 촌락을 지나치다가 아무런 경고도 없이 사격을 가하고 주민을 끌어내다가 마구 죽이는 인간백정이었다.

그의 군정 하에서 조국의 분단을 반대하고 군정의 폭압을 반대하여 궐기한 제주도의 4.3항쟁에 대해서 그가 지휘하는 남조선의 군정경찰, 국방경비대, 그리고 국군으로 하여금 제주도를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만들었고, 당시 30만 제주도민에서 5만의 주민을 학살했다. 이것은 6.25전쟁 전의 일이다.

전쟁 중 지리산 등 조국의 산악에서 미제와 이승만 예속정권의 학살탄압을 반대하여 싸우는 유격대 토벌(이승만 군경은 이를 일제가 말하듯이 공비토벌이라 했다. 하기야 이승만 군경의 지휘자들은 대부분이 일제에 빌붙어서 동족을 탄압 학살하던 민족반역자들이었다.)에서 일제가 말하는 삼광정책(殺光, 奪光, 燒光의 三光으로 살아있는 것은 모조리 없앤다는 토벌방식, 일제가 중국의 동북지역을 위시하여 조ㆍ중 민간인의 학살초토화정책)과 중국의 장개석군이 말하는 건벽청야(建壁淸野) 그리고 미군이 장기로 하는 초토화 작전으로 수십만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미군이 38선을 넘어 벌인 민간인 학살은 미제의 군인이 얼마나 야수적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 실례로 황해도 신천학살은 대표적이다.

미군이 신천으로 쳐들어가 점령한 52일 동안, 신천군에서 남녀노소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해 신천군 전체 인구 14만 2,786명 가운데 3만 5,383명을 살해했다. 특히 신천군 궁흥면 만궁리에서는 주민의 87%, 온천면 운봉리에서는 66%, 신천면 양장리에서는 남자 전원을 학살했다.

미군의 이런 학살은 복조선 도처에서 일어났다.

미군은 이북에 또 무차별 공중폭격으로 엄청난 수의 민간인을 살상했다.

당시 인구 30만의 평양에 43만 발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이북 땅 전역에 1평방킬로미터당 18개의 폭탄을 퍼부었다. 1950년 6.25전쟁 이후 1953년 4월말까지 미군은 26만발의 중대형 폭탄, 2억발의 탄환, 약 40만 발의 로켓탄, 약 150만발의 네이팜탄을 쏟아 부었다. 이것은 태평양전쟁 중에 미국이 사용한 총폭탄 총량보다 더 많은 양이다. 이런 초토화 작전과 융단폭격으로 조선반도는 폐허로 변했고, 특히 이북은 완전히 '원시상태'로 되돌아갔다.

예컨대 당시 이북의 주요 산업지대였던 원산은 종전 후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며 말짱한 건물은 한 채도 없었고 공장들도 땅에 파묻혀버렸다. 이러한 상황은 이북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이북만이 아니었다. 이남도 이북 인민군의 점령지대였을 때 미군의 폭격은 이북의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6.25전쟁으로 하여금 우리민족은 약 100-150만의 전투원과 약 300-400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살상당하고 모든 산업과 전국토의 대부분이 파괴당했다. 이런 파괴를 지휘한 미제와 그 작전을 지휘한 당시 유엔군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의 전쟁수행방식이 얼마나 야수적이었고 범죄적이었는지 알 수 있도록 해준다.

맥아더는 일제의 전쟁범죄자를 감싸 안았다. 그 중에서도 백번을 죽여도 조ㆍ중인민의 한이 풀릴 수 없는 중북 동북 하르빈에 있던 일본군 세균무기제조와 실험부대인 일본 천황의 직속 제731부대의 부대장인 이시이를 보호하고 미군의 세균전을 위해 그들의 경험을 축적하여 6.25전쟁에서 사용하도록 했다.

세균무기는 실제 맥아더가 총사령관에서 추방된 이후에 실전에 사용되었지만 그 실험과 준비는 맥아더의 지휘 하에서 시작된 것이다.

벌레만도 못한 반인륜적인 살인의사 이시이가 미군의 보호아래 1951년 겨울, 극비리에 직접 조선반도의 세균작전현장을 다녀갔다. 이 인간쓰레기가 돌아간 뒤 이북과 중국의 동북지역에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엄동설한인데도 파리ㆍ모기가 산채로 발견되었다. 그 이후부터 주민들은 콜레라에 감염되고 페스트에 걸려 수 십 명씩 죽기도 했다.

미군의 이 세균전은 오키나와 기지에 있는 B29폭격기에 무수한 파리, 벼룩, 거미, 빈대, 모기, 이, 귀뚜라미 등의 해충이 가득 찬 세균무기를 실었는데, 거기에는 콜레라, 페스트, 장티푸스, 재귀열병 등 가장 지독한 전염병균이 무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세균무기를 사용한 세균전은 평안남도 안주군 발남리에서 실시되었는데 페스트환자가 발생했고 36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각지에서 숫한 인명을 살상했다.

미국은 이북의 후방에 대해서 화학전도 강행하여 숫한 민간인을 살상했다.

1951년 5월 6일 B29 3기는 남포시 근교의 삼화리, 후포리, 축돈리, 용정리, 용수리 일대에 가스탄을 투하하여 379명을 살상했다. 1951년 8월 1일에는 황해도의 연성리와 원철리에, 1952년 1월 9일에는 원산북방의 학성리에도 가스탄을 투하했다.

맥아더는 패퇴하는 전국을 만회하기 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감했다.

언제나 미군이 하는 것처럼 엄청난 화력을 써서 초토화 작전으로 제압하고 상륙을 감행했다. 맥아더는 300여척의 함선과 약 1,000여대의 비행기, 5만 여명의 방대한 무력을 동원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다.

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6시에 개시하여 2시간 만에 월미도를 점령했다고 하는데 이와 달리 말하는 쪽도 있다. 월미도를 수비하고 있던 인민군이 3일간을 버티었기 때문에 경인지역의 인민군 주력이 후퇴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

작전지휘관은 패퇴를 해도 대개 작전상 후퇴라고 강변한다. 물론 전쟁을 하다보면 작전상 후퇴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 후퇴가 작전상 후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패퇴라고 할 수 있는가는 그 후퇴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확보했는가, 못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쟁 초기 맥아더가 지휘한 미군의 낙동강으로의 후퇴는 패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초기의 국군은 공황상태로 무너지고 이를 밀어주기 위해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을 전선에 보내고 딘 소장이 지휘하던 미 제24사단도 전선으로 투입했으나 대전작전에서 전멸되고 말았다. 이로 인한 미군의 후퇴는 작전상 후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반해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인민군이 작전상 후퇴를 했는데 이 후퇴는 대부분의 병력을 유지하면서 후퇴했고, 미군의 이북 전진에 대한 반격을 위해 부대를 재배치하기 위하여 후퇴한 것이며, 이 결과 인민군의 겨울공세 때 이북에 들어온 미군과 국방군 30만 명을 포위 섬멸한 작전의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후퇴가 그야말로 작전상 후퇴라고 할 수 있는 승리의 후퇴라고 할 수 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후, 이북으로 확대될 육상전이 제3차 세계전쟁을 불러올 위험을 우려하고 있는 세계평화애호인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침을 감행하여 38선을 넘어 진격했다. 그의 휘하에 있는 미군은 이북에 들어가 살인, 강간, 방화, 파괴 등 온갖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그들의 52일간의 이북점령으로 이북 땅을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바꾸어 놓았지만 이북 동포들은 이 침략군에 반대하고 인민군의 작전을 도와 미군을 몰아냈다.

인민군의 후퇴는 새로운 거대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후퇴했는데, 그것은 전진해 들어온 미군의 그 후방을 차단하는 거대한 포위망으로 전변시켜 다가온 이북 겨울의 혹한을 자연적 무기로 하여 미군과 국방군을 섬멸시켜버렸다. 맥아더는 수많은 병력을 잃고 후퇴했다. 맥아더의 이 후퇴는 완전무결한 패퇴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를 1.4후퇴라고 부른다.

6.25전쟁에서 맥아더의 용병은 미제가 자랑하는 명장의 용병은 아니다. 그의 용병은 이 전쟁에서 두 번이나 패퇴한 패장(敗將)의 용병이었고, 물량에만 의지해서 사람과 물건을 가리지 않고 마구 파괴하는 폭장(暴將)의 용병이었으며 옥수수파이프나 입에 물고 겉멋만 부리고 속은 텅 빈 용열한 용장(庸將)의 거드름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용장이 생각해 내는 일이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마구 많이 죽이는 일이다.

그는 이북에 쳐들어가 그가 보기에는 이북 전체가 곧 그의 손아귀에 들듯 했다. 그런 생각이 남가일몽처럼 다 망했던 것이다. 다 잡았다고 생각했던 인민군의 주력이 고스라니 남아 그대로 나타났고, 게다가 그가 보기에는 소총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손에 폭탄만 쥐고 있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중국인민지원군이 나타나, 강력한 화력과 기동력 그리고 넘쳐나는 물량을 갖춘 이때까지 한 번도 패퇴한 적이 없는 천하무적의 미합중국의 군사를 쥐새끼 몰 듯 포위망에 몰아넣더니 마구 쳐 죽이고 무장해제를 시켜버리는 꼴을 보고 용장(庸將)으로서의 심술이 발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원자폭탄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6. 우리에게 핵 참화를 불러오려 한 맥아더


조ㆍ중국경의 산악지대까지 후퇴하여 태세를 고쳐 세운 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은 함께 이북의 험준한 산악지대까지 깊숙이 들어온 미국군을 포위 격파 패주시키고 12월 5일 평양을 탈환하고 51년 1월 5일에는 서울을 재점령했으며 3월 14일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경장부대였고 그 대부분은 중국 동북지방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청년들이어서 인민군과 바로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문화권의 형제 같은 동포여서 하나의 군대로 작전을 할 수 있을뿐더러 혼합해서 전투대열을 조직할 수도 있었다.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은 드럼과 피리를 불면서 산을 내려와 미군에게 반격을 가했고 이북의 엄혹한 동장군이 또한 무기로 되어 미군은 소탕당하여 패주하고 말았다.

압록강까지 다다랐던 미군과 국방군은 그만 쫓겨 내려와 11월 25일부터 28일까지의 청천강전투(평양 서북 100킬로미터 정도)에서 미군은 섬멸을 당했다. 이 청천강의 전투로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이루어놓은 전공은 그만 삭치고 말았다.

11월 28일 맥아더는 통합참모본부에 지급전보를 치고 「총병력 20만의 적군이 국련군과 대치하고 있다. 결과 우리는 전혀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고 있다.」는 비명이었다.

이 연락을 받고 트루만은 「소련과 드디어 핵 대결의 때는 왔다.」고 11월 30일 기자에게 말했다. 「핵무기도 포함해선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를 포함한다. 핵무기의 사용은 늘 검토하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맥아더와 트루만은 핵전쟁에 대해서 항상 죽이 맞아 있었다.

그래서 맥아더가 조ㆍ중 국경에 30개에서 50개의 원폭을 투하해서 코발트방사능오염지대를 만들어 만주로부터 물자와 병력이 북조선에 유입하는 것을 막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통합참모본부는 원폭사용반대를 표명했다. 그것은 국내외의 여론의 우려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 세계에는 반전의 목소리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캐나다도 영국도 한목소리로 원자폭탄의 투하는 필연적으로 전쟁을 확대시킬 수 있다면서 핵무기사용을 강력히 반대했다. 캐나다의 외상 피어슨은 속히 화평교섭에 들 것을 주장했다. 영국의회에서는 노동당소속 하원의원 100명이 애틀리 수상에게 서한을 보내어 핵무기 사용을 반대하고 미 정부에 항의할 것을 요청했다.

영국수상은 12월 4일 워싱턴에 도착하여 8일까지 연나흘 동안 트루만과 회담하고 트루만으로부터 영국정부의 사전 동의 없이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언질을 받으려고 매달렸다.

그들은 중국과 전면전쟁이 되고 마침내 소련과의 핵전쟁, 제3차 세계전쟁으로 발전되어 유럽 전체가 핵전쟁에 휘말려들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미국 내에서도 핵무기사용에 강력히 반대하는 기운이 높아졌다.

원자력위원회와 통합참모본부는 「조선반도에서는 이제 원폭투하에 적절한 목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핵무기사용을 반대했다. 당시 동부의 명문 컬럼비아대학교 총장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도 핵무기사용을 반대했다. 하지만 이자는 대통령에 당선 되더니, 12월 하순 태평양을 항행하는 순양함 헬레나에서 각료회의를 열고 조기정전을 위해 핵무기 사용도 불사한다고 표명했다. 그 석상 통합참모의장 아더 라드포드(Arthur Radford)제독은 핵무기에 의한 대량보복을 주장했다. 이와 같이 미국의 지배자들은 늘 핵무기사용을 생각해왔고 그 후로도 늘 핵 공갈로 일관해왔다.

결국 트루만은 4월 11일 맥아더를 해임하고 핵무기 사용을 걷어치우고 말았다.

이 이후부터 미국 내의 여론은 전쟁을 가능한 한 빨리 종결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국가목표로 되었다.


끝으로

이상 우리가 알아본 맥아더는 별 볼일 없는 장군이다. 미국이나 숭미 친미 공미의 미국숭배자들이 외대는 것처럼 용장(勇將)도 아니고 지장(智將)도 아니며 덕장(德將)이나 인장(仁將)은 더구나 아니다. 그가 지휘하고 치러낸 전쟁이나 전투를 보면 위에서 해설한 바와 같이 패장(敗將)이고 용장(庸將)이고 폭장(暴將)이기도 하다.

그러면 왜 이런 자를 미제와 미제를 숭모하는 자들이 그처럼 맥아더를 숭배하고 그를 은인으로까지 해서 받드는가.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8.15해방으로 민족의 배신자로서 배족의 죄업을 영원히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친일파ㆍ민족반역자들이 맥아더의 포고문으로 그들이 저지른 배족의 업(業)에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고, 분단의 원흉 이승만이 일으킨 전쟁으로 멸망의 문턱으로까지 들어선 그들의 생명을 지켜준 그야말로 은인이기 때문이다.

과연 친일 배족세력과 그들의 자손으로 보아서는 생명의 은인이고 구원의 하느님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배신한 동포들에게까지 은인이라고 우기는 것은 검은 것을 희다고 하고 흰 것은 검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그들이 배신한 동포들에게까지 그렇게 인식되도록 하는 길은 올바른 교육으로는 불가능할 것이고 고급한 심리적 사술에 의한 세뇌로밖에는 없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 제국주의의 세계 제패라는 패권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미국이 자랑하는 미디어의 기능에 의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맥아더가 겪어온 전쟁의 지휘에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장수는 용감하고 정의롭고 지혜롭고 인덕이 갖춘 사람이라는 점은 어디에고 찾아 볼 수 없다.

필리핀전투에서 85,000이나 되는 자기 병력을 그 좁은 바탄반도로 몰아넣어 보급로를 스스로 차단당하여 장졸들에게 고난을 들씌우다가 10분의 1도 안되는 6,000 남짓한 적의 공격을 받자 도망 가버리는 장수, 인천상륙작전을 하고서 적이 보이지 않자 적이 없다고 판단하고 잘 나간다고 적의 포위망인 줄 모르고 들어갔다가 몽땅 당하고 마는 장수, 적 지역의 인민을 마구 살상하도록 만드는 장수, 자기 윗사람에게 버릇없는 짓을 예사로 해버리는 예절 없는 장수를 어찌 명장이라 할 수 있겠는가.

미제의 미디어는 이런 장수까지도 명장까지는 아닐지라도 인기 있는 정군으로 만드는 재주는 과연 돈을 줄만큼 가치(?) 있다고 보겠다.

이제 우리는 「주한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어야 하는 투쟁을 전개할 때가 왔다. 이 운동에서 제일 먼저 전개해야 할 일이 「주한미군」이 우리를 지켜주는 고마운 존재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자주성을 짓밟고 우리민족의 살길을 여는 통일의 방해꾼임을 인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친미 숭미 공미의 반통일세력은 「주한미군」을 지지하고 그들을 은인으로까지 받들고 있다. 그 전형으로 맥아더를 들고 있다. 그들은 맥아더를 은인으로, 명장으로 그리고 덕장으로까지 모시고 이를 인민들에게 더욱 깊이 인식시키려고 발광을 하고 있다.

결코 맥아더는 명장일 수 없다. 민족의 배신자에게는 은인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민족에게는 전쟁의 참화를 들씌우고 핵 참화까지 들씌우려고까지 한 민족의 원수이고 세계평화의 파괴자일 뿐이다.

이런 용장(庸將), 패장 그리고 학살의 폭장(暴將)의 동상을 세워두고 우리민족의 자존심을 지킬 수 없다.

'Unews에 게재 2005.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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