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2일 금요일
지식인과 변혁운동
지식인과 변혁운동
1.
여러 선생님.
저도 대학 교단에서 추방되어 학문이 박탈되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한때 대학 강사로서 고생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고통을 어느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그냥 같은 입장의 선생님들을 만난다는 것보다 혈육을 함께 한 형제를 만난다는 느낌이 듭니다.
나는 소년시절 어린 나의 눈앞에서 조국이 분단되는 엄청난 비통을 겪고 이를 반대하여 혁명조직에 들어 손에 무기를 들고 투쟁하는 조직생활을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연락선이 파괴되는 바람에 조직에서 이탈되어 집에 돌아왔고, 살기 위하여 생의 방향을 바꾸어 학문의 길에 들어 대학에서 학문에 열중하였습니다. 마침 좋은 은사를 만나 당시에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학문의 길잡이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과거, 드러나면 죽거나 감옥에 들어가는 과거를 안고, 그 공포를 잊기 위해서도 학문에 더욱 감싸여 젊은 한 시절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박사도 되고 교수도 되었으며 교실의 주임교수로 학자로서의 최고의 영예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많은 논문을 내고 교실의 잡지(학술논문집)를 발행하여 그것으로 나와 나의 교실이 세계 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2.
제가 변혁운동에 다시 뛰어든 것은 4.19학생봉기 이후부터였습니다.
10 년 넘도록 이승만 정권 밑에서 공포에 떨며 살았고, 때때로 함께 투쟁했던, 조국의 어느 산야에서 피지도 못하고 산화한 어린 봉오리 소년 동지들에게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죄스러워 밤새 술타령으로 지새는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 내가 우리들의 어린 후배가 그 포학하기 그지없는 이승만 정권을 때려눕히는 것을 보고 정신이 버쩍 들었던 것입니다.
나는 우리도 일어나면 그 이승만과 같은 독재자도 때려눕히고 미국 놈도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있다는 자신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변혁운동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몫을 찾아 투쟁의 대열에 나섰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나에게는 운동이 주된 사업이었고 학문은 이를 위한 한 방도로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학문에 대해서 절대 소홀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럴수록 논문도 열심히 쓰고 강의도 열성을 다했습니다.
나는 이때부터 내가 하는 전문분야의 연구와 더불어 변혁운동에서 필요한 지식과 이론을 확립하기 위하여 철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학습도 열심히 했습니다. 당시 경북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먼지를 들쓰고 잠들고 있는 맑스주의, 레닌주의 이론의 책을 찾아 계통적으로 공부하고 모택동사상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평양에서 방송하는 방송대학의 강의를 매일 밤 듣고 녹취하여 공부했습니다. 나의 서재는 그래서 새벽 4시전에 불이 꺼진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런 공부들 중에서 방송대학에서 녹취한 철학을 줏대로 하고 소련 과학아카데미에서 출간한 철학교정, 경제학교과서가 뼈대가 되어 우리민족의 역사 공부를 살로 해서 나의 사상이 확립되어 갔으며 우리민족의 자주성을 구현하는 사상으로 발전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나의 학습은 내 혼자의 힘으로 진행도 했지만 당시 대구지역의 진보적 청년들과 함께 책을 서로 빌려주고 빌려보면서, 그러면서 서로 질문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 서로의 이론수준을 높여나갔으며 그러는 중에 서로의 사상을 함께 하면서 동지로 되어 갔습니다.
3.
당시 우리는 비록 어떤 조직을 형식화해서 결성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여러 운동에 핵심적 부분을 담당하면서 청년학생, 노동청년들을 지도하고 지원하면서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시민운동, 지역의 정치운동 등 여러 부문에 영향을 끼치며 이론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나는 주로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을 맡았습니다.
민주화를 요구하고 조국의 통일을 열원하는 학생들을 하나의 조직으로 묶어 세우고 이들에게 학습과 그 조직화를 지원하고 투쟁을 후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들 운동을 단순히 지원하는 것이었으나 점차 조직적으로 방조하는 사업을 꾸려나갔습니다. 그래서 [정진회], [정사회]라는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민주화운동과 자주적 통일운동을 위한 학생운동의 핵심으로서의 동아리를 조직 지도해 나갔습니다. 이들은 1960년대 말에 일어난 '삼선개헌반대운동'과 '교련반대운동'의 핵심조직으로서의 역할을 잘 해냈습니다.
1970 년대에 들어서자 박정희 파쇼도당은 대학 안에 있는 모든 사회과학연구 동아리와 학생운동의 동아리를 강제 해산했습니다. [정진회], [정사회]도 해체 당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동지들은 단순한 학술연구의 동아리로 위장하여 [한국풍토연구회](약칭 [한풍회])를 조직했습니다. 지도교수도 지극히 무난한 교수를 초빙하여 겉으로는 운동과 전혀 무관한 동아리로 위장하고 학생운동의 핵심을 꾸려나갔습니다.
이들의 학습과 회합은 산이나 바다에서 천막을 치고 등산이나 관광을 가장해서 열었습니다. 이들이 나중에는 '유신반대운동'의 핵심으로 성장되었던 것입니다. 운동도 파쇼정권의 탄압에 맞서 치고 빠지는 게릴라식 전법을 창조해서 영활하게 전개해 나가 한때 파쇼당국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나의 학생운동에 대한 지원을 눈치채게 되었고 파쇼당국은 나를 76년 2월에 처음 실시하게 된 교수재임명제에 걸어 이른바 '국가관 미확립'과 '정부정책 비협조'를 이유로 들어 대학으로부터 추방했습니다.
한 학기를 지나고 나서 동국대학교에서 교수대우라지만 강사로 임명받아 강의하다가 이듬해 새 학년에 교수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때부터 이재문 동지와 신향식 동지들과 함께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직업적 변혁운동가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 후 두 번이나 감옥살이를 했는데 그것도 사형수로 두 번 있었고 무기징역을 두 번이나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밖에 나와 있지만 내 어깨에는 남은 잔형 27년이라는 무거운 징역을 걸머지고 있는 형집행정지자, 보안관찰대상 좌익수라는 딱지를 붙이고 사는 사람입니다.
4.
저 자신의 자기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여러 분들이나 저는 지식인이라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잘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은 자기의 사회적 본질을 잘 알고 그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게 사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자면 우리는 지식인이라는 본질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와 같은 좋은 자리에서 지식의 본질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 지식인'이란 한마디로 해서 정신노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외국에서는 '인텔리겐챠', 이로부터 외래어로 줄여서 '인텔리'라고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지식인이라서 그런지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과 유다르게 말하기도 합니다만 육체노동으로만 삶을 영위하지 않고 주로 정신노동으로 사회생활에 참여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객관적인 정의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지식인으로 들게 되는 사람들로는 기사, 기수, 전문가, 의사, 예술가 등 자연 및 사회과학부문의 정신노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이에 속하게 되겠습니다.
이러한 지식인은 사람의 생산노동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으로 갈라지고 정신노동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 발생했던 시대인 노예제사회에서 발생하여 봉건제사회와 자본제사회로 거쳐왔습니다.
지식인은 여러 계급의 출신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사회의 지식인 가운데는 자산계급출신의 지식인들도 있고 소자산계급 출신의 지식인들도 있으며 그 수는 얼마 안되지만 노동자, 농민 출신의 지식인들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계급의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는 지식인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독자적인 계급으로 이루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지식인은 이러저러한 계급에게 복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인은 그 입장이 그가 속한 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데로부터 다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자본주의사회에서 지식인들은 주로 자본가계급을 위하여 복무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지식인들이 주권과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주인행세를 하는 자본가계급에게 복무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사회의 본질에서 나오는 피치 못할 현상입니다.
자본주의사회의 지식인들은 대부분이 자기가 가진 지식을 팔아 생활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이 바로 상품화되고 있습니다. 지식이 상품화된다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차별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마치 상품이 차별화 되고 경쟁이 일어나고 그래서 독점화 되듯이 지식도 경쟁화되고 독점화 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남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해 그것의 진리성은 도외시하고 자기는 그것과 다른 이론을 내어놓아야 하고 차별성을 강조하게 되고 독점화로서 지식에 대한 이해관계를 고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은 바로 남보다 더 높은 지위로 올라서는 도구로 이용될 수 있으며, 그 지위는 자본의 이윤을 올리기 위한 능력으로 담보되고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지식이 남보다 더 자본의 요구에 충족된다는 것은 바로 자기 생활을 더 유족하게 하는 수단으로 되고 그것은 사회적 지위와도 관계되며 또 높은 명예와도 연관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사회의 지식인들은 대부분이 경쟁상태 속에 있습니다. 따라서 지식과 이론의 가치를 그 진리성에서보다 경쟁에서 이겨 남의 위에 올라서는 데에 두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지식인들 사이에는 출세주의, 영웅주의, 배타주의 등 온갖 지식의 진리성이라는 본질과는 유리되는 부정적인 작풍이 만연되고 있습니다.
6.
그러나 아주 적기는 하지만 자본가계급을 반대하고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투쟁하는 선진적이고 혁명적인 지식인들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사회는 노동자들도 스스로 정신노동에 의하여 지식을 얻을 수 있고 그로부터 올바르게 얻어진 창조적인 사상의식에 의하여 자신의 계급적 처지를 인식하게 되고 그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도를 찾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뒤떨어진 식민지, 반식민지 나라의 지식인들은 제국주의자들에 의하여 민족적 억압과 차별대우를 받기 때문에 일정하게 혁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지식인들은 노동자, 농민들을 교양하고 그들의 처지를 개혁하는 투쟁으로 나서게 하고 그들을 혁명운동에 다리를 놓아주는 교량자적 역할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지식인들 자신의 민족적 해방이 노동자, 농민들의 해방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변혁운동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대단합니다.
변혁운동은 세상을 바꾸는 일입니다. 그것도 전혀 사람들이 걸어보지 못했던 길을 열어나가는 일입니다. 변혁운동에 참가한 지식인은 변혁운동의 사상의식을 창조하고 운동의 전략전술을 내와서 운동의 과학성을 보장해줍니다. 특히 특출한 운동가는 그 시대의 새로운 변혁사상을 창조하고 운동을 영도해나갑니다.
마르크스주의 사상도, 레닌주의이론도, 모택동사상도, 월남 호지명의 인민전쟁이론도,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주체사상도 변혁운동에 뛰어들어 그들이 그 시대의 변혁운동을 영도해나가는 가운데 창조된 빛나는 이론체계들입니다.
변혁운동은 전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만큼 그것을 창조하는 사람 역시 전혀 새로운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마다 살아온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그것도 미제의 예속식민지사회에서 자랐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주의사회의 이윤추구라는 본질에서 개인주의, 자유주의, 출세주의에 푹 젖었고 그것들이 충족되지 않을 때 생기는 소외로부터 허무주의와 냉소까지 안고 있으며, 식민지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사대굴종 노예주의까지 싸잡아 안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변혁운동, 새 세상을 창조하는 사업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변혁운동을 하는 지식인은 이러한 자본주의사회에서, 식민지사회에서 얻어진 변혁운동에 부정적인 사상을 청산하고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자기개조를 이루어내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들 변혁운동의 대열에 자기개조사업을 옳게 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 현상들이 바로 분파현상으로 나타나 운동의 통일단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진리가 아무리 명백하다 해도 운동에서 차지하려는 헤게모니에 눈먼 사람은 그 올바른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이와 해를 따르는 자본주의사상의 속성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렵게 차지한 지위와 그 보잘것없는 안락을 유지하기 위하여 센 놈에게 빌붙는 사대굴종의 사상이라는 식민지사회의 속성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혁운동은 이러한 사상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통일단결을 이루어낼 수 없고 새롭고 과학적인 전략과 전술을 모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7.
여러 선생님들.우리들은 반백년이 훨씬 넘는 민족분단과 미제의 식민지통치 시대에서 살아왔습니다. 이제 통일과 해방의 시대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6.15공동선언으로 그 대문이 활짝 열려져 있습니다.
우리민족의 역량이 미제의 전쟁책동을 막아내고 미제를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있을 만큼 강성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분단과 예속으로부터 해방되는 마지막 투쟁의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지금 우리시대에서 우리가 할 일은 지난 세월 친일잔재와 사대매국노들 그리고 군사깡패들이 가꾸어온 반통일 반민족세력으로부터 자주적 민주정권을 쟁취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미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 우리민족끼리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에게 보람차지만 아름차기도 합니다.
이 시대, 우리시대의 지식인에게는 이 민족적 역사적 대사업에 참여하여 민족대단결의 운동에서, 예속에서 자주의 나라로 나아가는 해방운동의 길에서, 우리시대에서 통일조국을 건설하는 일에서 지식인들이 지식으로 헌신하는 일이 놓여 있습니다.
2004 년 8월 1일
2009년 5월 21일 목요일
미군주둔 60년, 우리는 왜 맥아더를 이야기해야 하는가(3)
[이 글은 2005년 9월, 인천 월미도에 있는 이른바 <맥아더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라는 농성시위를 하던 때에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의 홈페이지 측의 요청에 의하여 3번으로 나누어 맥아더의 우리나라에 대한 범죄를 폭로하기 위하여 쓴 글입니다. 그중 셋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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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비전투 민간인을 300만 명을 학살한 맥아더
맥아더는 6.25전쟁에서 우리민족에게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재난을 들씌웠다. 전쟁에서 전투원끼리의 살상도 교전 이외의 살상은 전쟁범죄에 들어간다. 맥아더는 6.25전쟁에서 피난하는 민간인을 폭격과 기총소사로 마구 학살하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도시와 촌락, 농사 등 생업활동을 하고 있는 민간인을 아무런 경고도 없이 마구 죽이게 했다. 그의 지휘 하의 전투원은 도시를 점령하거나 촌락을 지나치다가 아무런 경고도 없이 사격을 가하고 주민을 끌어내다가 마구 죽이는 인간백정이었다.
그의 군정 하에서 조국의 분단을 반대하고 군정의 폭압을 반대하여 궐기한 제주도의 4.3항쟁에 대해서 그가 지휘하는 남조선의 군정경찰, 국방경비대, 그리고 국군으로 하여금 제주도를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만들었고, 당시 30만 제주도민에서 5만의 주민을 학살했다. 이것은 6.25전쟁 전의 일이다.
전쟁 중 지리산 등 조국의 산악에서 미제와 이승만 예속정권의 학살탄압을 반대하여 싸우는 유격대 토벌(이승만 군경은 이를 일제가 말하듯이 공비토벌이라 했다. 하기야 이승만 군경의 지휘자들은 대부분이 일제에 빌붙어서 동족을 탄압 학살하던 민족반역자들이었다.)에서 일제가 말하는 삼광정책(殺光, 奪光, 燒光의 三光으로 살아있는 것은 모조리 없앤다는 토벌방식, 일제가 중국의 동북지역을 위시하여 조ㆍ중 민간인의 학살초토화정책)과 중국의 장개석군이 말하는 건벽청야(建壁淸野) 그리고 미군이 장기로 하는 초토화 작전으로 수십만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미군이 38선을 넘어 벌인 민간인 학살은 미제의 군인이 얼마나 야수적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 실례로 황해도 신천학살은 대표적이다.
미군이 신천으로 쳐들어가 점령한 52일 동안, 신천군에서 남녀노소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해 신천군 전체 인구 14만 2,786명 가운데 3만 5,383명을 살해했다. 특히 신천군 궁흥면 만궁리에서는 주민의 87%, 온천면 운봉리에서는 66%, 신천면 양장리에서는 남자 전원을 학살했다.
미군의 이런 학살은 복조선 도처에서 일어났다.
미군은 이북에 또 무차별 공중폭격으로 엄청난 수의 민간인을 살상했다.
당시 인구 30만의 평양에 43만 발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이북 땅 전역에 1평방킬로미터당 18개의 폭탄을 퍼부었다. 1950년 6.25전쟁 이후 1953년 4월말까지 미군은 26만발의 중대형 폭탄, 2억발의 탄환, 약 40만 발의 로켓탄, 약 150만발의 네이팜탄을 쏟아 부었다. 이것은 태평양전쟁 중에 미국이 사용한 총폭탄 총량보다 더 많은 양이다. 이런 초토화 작전과 융단폭격으로 조선반도는 폐허로 변했고, 특히 이북은 완전히 '원시상태'로 되돌아갔다.
예컨대 당시 이북의 주요 산업지대였던 원산은 종전 후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며 말짱한 건물은 한 채도 없었고 공장들도 땅에 파묻혀버렸다. 이러한 상황은 이북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이북만이 아니었다. 이남도 이북 인민군의 점령지대였을 때 미군의 폭격은 이북의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6.25전쟁으로 하여금 우리민족은 약 100-150만의 전투원과 약 300-400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살상당하고 모든 산업과 전국토의 대부분이 파괴당했다. 이런 파괴를 지휘한 미제와 그 작전을 지휘한 당시 유엔군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의 전쟁수행방식이 얼마나 야수적이었고 범죄적이었는지 알 수 있도록 해준다.
맥아더는 일제의 전쟁범죄자를 감싸 안았다. 그 중에서도 백번을 죽여도 조ㆍ중인민의 한이 풀릴 수 없는 중북 동북 하르빈에 있던 일본군 세균무기제조와 실험부대인 일본 천황의 직속 제731부대의 부대장인 이시이를 보호하고 미군의 세균전을 위해 그들의 경험을 축적하여 6.25전쟁에서 사용하도록 했다.
세균무기는 실제 맥아더가 총사령관에서 추방된 이후에 실전에 사용되었지만 그 실험과 준비는 맥아더의 지휘 하에서 시작된 것이다.
벌레만도 못한 반인륜적인 살인의사 이시이가 미군의 보호아래 1951년 겨울, 극비리에 직접 조선반도의 세균작전현장을 다녀갔다. 이 인간쓰레기가 돌아간 뒤 이북과 중국의 동북지역에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엄동설한인데도 파리ㆍ모기가 산채로 발견되었다. 그 이후부터 주민들은 콜레라에 감염되고 페스트에 걸려 수 십 명씩 죽기도 했다.
미군의 이 세균전은 오키나와 기지에 있는 B29폭격기에 무수한 파리, 벼룩, 거미, 빈대, 모기, 이, 귀뚜라미 등의 해충이 가득 찬 세균무기를 실었는데, 거기에는 콜레라, 페스트, 장티푸스, 재귀열병 등 가장 지독한 전염병균이 무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세균무기를 사용한 세균전은 평안남도 안주군 발남리에서 실시되었는데 페스트환자가 발생했고 36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각지에서 숫한 인명을 살상했다.
미국은 이북의 후방에 대해서 화학전도 강행하여 숫한 민간인을 살상했다.
1951년 5월 6일 B29 3기는 남포시 근교의 삼화리, 후포리, 축돈리, 용정리, 용수리 일대에 가스탄을 투하하여 379명을 살상했다. 1951년 8월 1일에는 황해도의 연성리와 원철리에, 1952년 1월 9일에는 원산북방의 학성리에도 가스탄을 투하했다.
맥아더는 패퇴하는 전국을 만회하기 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감했다.
언제나 미군이 하는 것처럼 엄청난 화력을 써서 초토화 작전으로 제압하고 상륙을 감행했다. 맥아더는 300여척의 함선과 약 1,000여대의 비행기, 5만 여명의 방대한 무력을 동원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다.
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6시에 개시하여 2시간 만에 월미도를 점령했다고 하는데 이와 달리 말하는 쪽도 있다. 월미도를 수비하고 있던 인민군이 3일간을 버티었기 때문에 경인지역의 인민군 주력이 후퇴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
작전지휘관은 패퇴를 해도 대개 작전상 후퇴라고 강변한다. 물론 전쟁을 하다보면 작전상 후퇴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 후퇴가 작전상 후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패퇴라고 할 수 있는가는 그 후퇴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확보했는가, 못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쟁 초기 맥아더가 지휘한 미군의 낙동강으로의 후퇴는 패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초기의 국군은 공황상태로 무너지고 이를 밀어주기 위해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을 전선에 보내고 딘 소장이 지휘하던 미 제24사단도 전선으로 투입했으나 대전작전에서 전멸되고 말았다. 이로 인한 미군의 후퇴는 작전상 후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반해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인민군이 작전상 후퇴를 했는데 이 후퇴는 대부분의 병력을 유지하면서 후퇴했고, 미군의 이북 전진에 대한 반격을 위해 부대를 재배치하기 위하여 후퇴한 것이며, 이 결과 인민군의 겨울공세 때 이북에 들어온 미군과 국방군 30만 명을 포위 섬멸한 작전의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후퇴가 그야말로 작전상 후퇴라고 할 수 있는 승리의 후퇴라고 할 수 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후, 이북으로 확대될 육상전이 제3차 세계전쟁을 불러올 위험을 우려하고 있는 세계평화애호인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침을 감행하여 38선을 넘어 진격했다. 그의 휘하에 있는 미군은 이북에 들어가 살인, 강간, 방화, 파괴 등 온갖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그들의 52일간의 이북점령으로 이북 땅을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바꾸어 놓았지만 이북 동포들은 이 침략군에 반대하고 인민군의 작전을 도와 미군을 몰아냈다.
인민군의 후퇴는 새로운 거대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후퇴했는데, 그것은 전진해 들어온 미군의 그 후방을 차단하는 거대한 포위망으로 전변시켜 다가온 이북 겨울의 혹한을 자연적 무기로 하여 미군과 국방군을 섬멸시켜버렸다. 맥아더는 수많은 병력을 잃고 후퇴했다. 맥아더의 이 후퇴는 완전무결한 패퇴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를 1.4후퇴라고 부른다.
6.25전쟁에서 맥아더의 용병은 미제가 자랑하는 명장의 용병은 아니다. 그의 용병은 이 전쟁에서 두 번이나 패퇴한 패장(敗將)의 용병이었고, 물량에만 의지해서 사람과 물건을 가리지 않고 마구 파괴하는 폭장(暴將)의 용병이었으며 옥수수파이프나 입에 물고 겉멋만 부리고 속은 텅 빈 용열한 용장(庸將)의 거드름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용장이 생각해 내는 일이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마구 많이 죽이는 일이다.
그는 이북에 쳐들어가 그가 보기에는 이북 전체가 곧 그의 손아귀에 들듯 했다. 그런 생각이 남가일몽처럼 다 망했던 것이다. 다 잡았다고 생각했던 인민군의 주력이 고스라니 남아 그대로 나타났고, 게다가 그가 보기에는 소총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손에 폭탄만 쥐고 있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중국인민지원군이 나타나, 강력한 화력과 기동력 그리고 넘쳐나는 물량을 갖춘 이때까지 한 번도 패퇴한 적이 없는 천하무적의 미합중국의 군사를 쥐새끼 몰 듯 포위망에 몰아넣더니 마구 쳐 죽이고 무장해제를 시켜버리는 꼴을 보고 용장(庸將)으로서의 심술이 발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원자폭탄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6. 우리에게 핵 참화를 불러오려 한 맥아더
조ㆍ중국경의 산악지대까지 후퇴하여 태세를 고쳐 세운 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은 함께 이북의 험준한 산악지대까지 깊숙이 들어온 미국군을 포위 격파 패주시키고 12월 5일 평양을 탈환하고 51년 1월 5일에는 서울을 재점령했으며 3월 14일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경장부대였고 그 대부분은 중국 동북지방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청년들이어서 인민군과 바로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문화권의 형제 같은 동포여서 하나의 군대로 작전을 할 수 있을뿐더러 혼합해서 전투대열을 조직할 수도 있었다.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은 드럼과 피리를 불면서 산을 내려와 미군에게 반격을 가했고 이북의 엄혹한 동장군이 또한 무기로 되어 미군은 소탕당하여 패주하고 말았다.
압록강까지 다다랐던 미군과 국방군은 그만 쫓겨 내려와 11월 25일부터 28일까지의 청천강전투(평양 서북 100킬로미터 정도)에서 미군은 섬멸을 당했다. 이 청천강의 전투로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이루어놓은 전공은 그만 삭치고 말았다.
11월 28일 맥아더는 통합참모본부에 지급전보를 치고 「총병력 20만의 적군이 국련군과 대치하고 있다. 결과 우리는 전혀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고 있다.」는 비명이었다.
이 연락을 받고 트루만은 「소련과 드디어 핵 대결의 때는 왔다.」고 11월 30일 기자에게 말했다. 「핵무기도 포함해선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를 포함한다. 핵무기의 사용은 늘 검토하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맥아더와 트루만은 핵전쟁에 대해서 항상 죽이 맞아 있었다.
그래서 맥아더가 조ㆍ중 국경에 30개에서 50개의 원폭을 투하해서 코발트방사능오염지대를 만들어 만주로부터 물자와 병력이 북조선에 유입하는 것을 막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통합참모본부는 원폭사용반대를 표명했다. 그것은 국내외의 여론의 우려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 세계에는 반전의 목소리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캐나다도 영국도 한목소리로 원자폭탄의 투하는 필연적으로 전쟁을 확대시킬 수 있다면서 핵무기사용을 강력히 반대했다. 캐나다의 외상 피어슨은 속히 화평교섭에 들 것을 주장했다. 영국의회에서는 노동당소속 하원의원 100명이 애틀리 수상에게 서한을 보내어 핵무기 사용을 반대하고 미 정부에 항의할 것을 요청했다.
영국수상은 12월 4일 워싱턴에 도착하여 8일까지 연나흘 동안 트루만과 회담하고 트루만으로부터 영국정부의 사전 동의 없이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언질을 받으려고 매달렸다.
그들은 중국과 전면전쟁이 되고 마침내 소련과의 핵전쟁, 제3차 세계전쟁으로 발전되어 유럽 전체가 핵전쟁에 휘말려들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미국 내에서도 핵무기사용에 강력히 반대하는 기운이 높아졌다.
원자력위원회와 통합참모본부는 「조선반도에서는 이제 원폭투하에 적절한 목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핵무기사용을 반대했다. 당시 동부의 명문 컬럼비아대학교 총장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도 핵무기사용을 반대했다. 하지만 이자는 대통령에 당선 되더니, 12월 하순 태평양을 항행하는 순양함 헬레나에서 각료회의를 열고 조기정전을 위해 핵무기 사용도 불사한다고 표명했다. 그 석상 통합참모의장 아더 라드포드(Arthur Radford)제독은 핵무기에 의한 대량보복을 주장했다. 이와 같이 미국의 지배자들은 늘 핵무기사용을 생각해왔고 그 후로도 늘 핵 공갈로 일관해왔다.
결국 트루만은 4월 11일 맥아더를 해임하고 핵무기 사용을 걷어치우고 말았다.
이 이후부터 미국 내의 여론은 전쟁을 가능한 한 빨리 종결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국가목표로 되었다.
끝으로
이상 우리가 알아본 맥아더는 별 볼일 없는 장군이다. 미국이나 숭미 친미 공미의 미국숭배자들이 외대는 것처럼 용장(勇將)도 아니고 지장(智將)도 아니며 덕장(德將)이나 인장(仁將)은 더구나 아니다. 그가 지휘하고 치러낸 전쟁이나 전투를 보면 위에서 해설한 바와 같이 패장(敗將)이고 용장(庸將)이고 폭장(暴將)이기도 하다.
그러면 왜 이런 자를 미제와 미제를 숭모하는 자들이 그처럼 맥아더를 숭배하고 그를 은인으로까지 해서 받드는가.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8.15해방으로 민족의 배신자로서 배족의 죄업을 영원히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친일파ㆍ민족반역자들이 맥아더의 포고문으로 그들이 저지른 배족의 업(業)에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고, 분단의 원흉 이승만이 일으킨 전쟁으로 멸망의 문턱으로까지 들어선 그들의 생명을 지켜준 그야말로 은인이기 때문이다.
과연 친일 배족세력과 그들의 자손으로 보아서는 생명의 은인이고 구원의 하느님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배신한 동포들에게까지 은인이라고 우기는 것은 검은 것을 희다고 하고 흰 것은 검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그들이 배신한 동포들에게까지 그렇게 인식되도록 하는 길은 올바른 교육으로는 불가능할 것이고 고급한 심리적 사술에 의한 세뇌로밖에는 없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 제국주의의 세계 제패라는 패권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미국이 자랑하는 미디어의 기능에 의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맥아더가 겪어온 전쟁의 지휘에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장수는 용감하고 정의롭고 지혜롭고 인덕이 갖춘 사람이라는 점은 어디에고 찾아 볼 수 없다.
필리핀전투에서 85,000이나 되는 자기 병력을 그 좁은 바탄반도로 몰아넣어 보급로를 스스로 차단당하여 장졸들에게 고난을 들씌우다가 10분의 1도 안되는 6,000 남짓한 적의 공격을 받자 도망 가버리는 장수, 인천상륙작전을 하고서 적이 보이지 않자 적이 없다고 판단하고 잘 나간다고 적의 포위망인 줄 모르고 들어갔다가 몽땅 당하고 마는 장수, 적 지역의 인민을 마구 살상하도록 만드는 장수, 자기 윗사람에게 버릇없는 짓을 예사로 해버리는 예절 없는 장수를 어찌 명장이라 할 수 있겠는가.
미제의 미디어는 이런 장수까지도 명장까지는 아닐지라도 인기 있는 정군으로 만드는 재주는 과연 돈을 줄만큼 가치(?) 있다고 보겠다.
이제 우리는 「주한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어야 하는 투쟁을 전개할 때가 왔다. 이 운동에서 제일 먼저 전개해야 할 일이 「주한미군」이 우리를 지켜주는 고마운 존재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자주성을 짓밟고 우리민족의 살길을 여는 통일의 방해꾼임을 인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친미 숭미 공미의 반통일세력은 「주한미군」을 지지하고 그들을 은인으로까지 받들고 있다. 그 전형으로 맥아더를 들고 있다. 그들은 맥아더를 은인으로, 명장으로 그리고 덕장으로까지 모시고 이를 인민들에게 더욱 깊이 인식시키려고 발광을 하고 있다.
결코 맥아더는 명장일 수 없다. 민족의 배신자에게는 은인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민족에게는 전쟁의 참화를 들씌우고 핵 참화까지 들씌우려고까지 한 민족의 원수이고 세계평화의 파괴자일 뿐이다.
이런 용장(庸將), 패장 그리고 학살의 폭장(暴將)의 동상을 세워두고 우리민족의 자존심을 지킬 수 없다.
'Unews에 게재 2005. 9. 12.'
미군주둔 60년, 우리는 왜 맥아더를 이야기해야 하는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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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고도 영웅이 된 더글러스 맥아더
1941년 12월에 태평양전쟁을 맞은 아들 더글러스 맥아더는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2월 8일 진주만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의 초기에서 선제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필리핀 주둔 미 공군사령관이 타이완의 일본군 비행장의 공격하려고 했는데, 맥아더는 이 요청을 받고 판단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놓쳐버렸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108대나 되는 일본 해군의 육상공격기의 공격을 받게 되어, 처음부터 맥아더는 전쟁의 선제주도권을 빼앗기는 용장(庸將)으로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폭격을 맞은 미군의 클라크비행장은 못 쓰게 되었고 미군의 비행기는 일본군의 일격으로 30분만에 98대의 폭격기와 전투기를 잃어버렸다. 그 이튿날 9일은 악천후로 일본군의 비행기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10일에는 캬비테 군항에 일본군 폭격기와 전투기들이 공격을 가해왔다. 미국의 아시아 함대는 이미 남쪽으로 도망가서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초계정과 어뢰정, 유조선등이 격침되었고, 정박 중이던 잠수함 1척이 격침되었다.
10일 항공기지 확보를 위한 일본군의 대대적인 상륙작전이 시작되었으나, 이미 용장이 되어버린 맥아더는 이 상륙이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수비군의 파견을 요청했지만 그 요청을 거절했고, 전력이 급격히 줄어든 항공기들만으로 상륙저지에 나서게 했다.
그러나 사령관의 우둔한 지휘로 만신창이가 된 미군이지만 상륙저지에 나선 항공기는 해안으로 돌진해오는 일본군 주정을 공격하고, 일본군 전투기가 마구 설쳐대는 하늘에 올라가 일본군의 수송함대를 공격하여 소해정 1척을 격침하고 순양함을 대파하는 등 미군은 강렬하게 저항했다.
일본군은 원군을 못 받은 1개중대에 불과한 수비대를 공격해서 내쫓은 다음 오후 2시경에 아바리 비행장을 비롯해 그 남쪽의 무르뉴간 비행장과 쓰게가라오 비행장 점령하고 이들 비행장에 일본군 육군 5비행집단이 일제히 날아와 11일부터는 이곳을 거점으로 해서 미 항공병력을 격멸하는 작전에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이미 제공권을 장악한 일본군의 주력부대 상륙은 12월 22일 야간에 시작되었다. 이들은 두 곳에서 상륙하여 마닐라를 협공하는 태세를 취했다. 일본군은 마닐라 북방 200km 지점인 링가옌 만에 상륙을 했고, 24일에 마닐라 동남쪽 110km 지점의 라몬 만에 상륙을 했다.
초전에 주도권을 상실한 맥아더는 연속 패전을 겪어야 했고 이 국면을 타개할 전술을 내오지 않고 도망할 궁리만 하고선 23일에는 벌서 각 부대에게 이미 만들어놓은 퇴각계획대로 바탄반도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만 할 뿐이었다.
바탄반도는 남지나해와 마닐라 만 사이에 길게 나온 길이 48km의 반도로서, 협곡, 바위, 정글로 이루어진 산악지대였다. 이곳에 수비군을 집결시키면 마닐라는 일본군에게 내어주더라도 정작 중요한 마닐라 만은 연합군의 지배하에 놓이는 것이다.
마닐라 만의 입구에 있는 코레히도르 섬에는 강력한 요새가 있었다. 그리고 그 섬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은 꼭 바탄반도를 거쳐야 한다. 이를 맥아더는 ‘적은 병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병마개는 우리에게 있거든’ 하고 적절하게 비유했다.
과연 이 전술이 들어맞아 일본군은 바탄반도 점령을 위해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되도록 많은 수의 병력이 무사히 바탄반도에 들어와야 한다고 보고 맥아더는 바탄반도로 후퇴하라고 재촉했다.
27일에는 마닐라가 무방비도시로 선언되었고, 1월 1일에는 남부 루손군의 마지막 부대가 안전지대로 빠져나와 바탄반도로 들어왔다.
1월 2일에 일본군은 무방비 상태의 마닐라를 점령했고, 1월 6일까지는 미군과 필리핀군이 모두 바탄 반도로 후퇴했다. 남아있던 B-17은 모두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하였고, 아시아 함대는 자바로 들어갔다.
바탄반도 안에는 미군과 필리핀 군대를 합해서 총 85,000의 병력을 집결시켰는데 병력 수로 보아서는 일본군보다 약 10배나 우세했다. 너무 많은 병력이 좁은 곳에 집결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일본군은 적은 병력으로 포위하기 쉽고, 모두 적의 공격을 피해 후퇴한 상황이라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열성적으로 저항한 자들은 현지인 필리핀군뿐이었다.
1월 10일부터 공격을 시작한 일본군에 대항해서 필리핀군 부대는 자기 땅을 지키려는 일념을 가지고 싸웠으나 미군은 전투를 서로 미루기만 하고 꽁무니를 뺄 뿐이었다. 26일까지 필리핀군은 일본군의 맹렬한 공격을 이겨냈다. 그 후 보급이 떨어진 상태이지만 그들은 영웅적으로 방어진을 펴고 2개월이 넘도록 버티었다. 그러나 맥아더와 미군은 10배도 넘는 병력을 가지고도 일본군과 싸워 상황을 타개할 생각은 않고 코레히도르 섬을 포기하고 이미 바탄반도를 오래전에 탈출하고 말았다.
일본군이 병력을 자바공격을 위하여 빼고 6,000의 부대로 공격하는 데에도 맥아더는 85,000이나 되는 병력을 좁은 곳으로 후퇴시켜 놓았기 때문에 오히려 많은 병력이 적은 병력에게 역으로 포위되는 꼴이 되었다. 맥아더는 결과적으로 자신이 말했던 병의 마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군에게 주고 만 격이 되고 말았다. 그는 많은 병력을 남겨두고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지휘관이 없는 병력은 오합지졸이 되고 만다. 도망을 못 간 미군은 허둥대다가 일본군의 포로로 되었고, 그 14,000의 포로는 「죽음의 행군」이라고 일컫는 일본군의 학대행군으로 반수 이상은 행군 중에 쓰러져 죽었다. 그 많은 부하를 이 꼴로 만든 장군을 과연 누가 명장이라 할 수 있겠는가.
머리에 엘리트의식으로 가득한 웨스트포인트 출신의 맥아더는 오직 출세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래서 세 불리하면 출세를 위하여 내빼고 식민지민중을 탄압하고 지배자로서 위엄만 부리는, 행세만 하는 장군일 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줄행랑을 친 맥아더는 1942년 3월 남서태평양전역 연합군사령관직을 맡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로 복귀했다.
그는 뉴기니에서 공격개시를 명령하여 1943년 1월 파푸아진군을 시켰고 미 태평양군은 영웅적 전투로 일본군을 몰아냈다. 미군은 1943~44년의 일련의 전투로 중남부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장악하고 필리핀으로 진군했다.
맥아더에 의해서 필리핀에 투입된 미군은 이 우매한 장군에 의해 발이 묶여 1945년의 7개월을 루손 섬의 진흙바닥에서 뒹굴도록 만들었다. 그가 인식하는 태평양전쟁은 그가 쫓겨난 필리핀이 미 식민지로 복귀하는 일 뿐이었고 거기에서 지배자로 되는 것으로만 보았을까.
그는 1944년 12월 육군 원수로 승진되고, 4개월 후 태평양지역의 미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서야 잠을 깼는지 비로소 사이판으로, 이오시마로, 오키나와로 올라오게 되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조선의 북부에서 조선인민혁명군과 북부 조선인민의 전민항쟁으로 조선해방의 최후결전을 하고 있을 때, 그는 북위 38도선과는 수천 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진 루손 섬에서 그리고 오키나와 섬에서 진구렁에서 죽탕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게 무조건항복을 했다.
이로써 우리 조선은 일제식민지통치로부터 해방되었다. 조선에 있는 일제의 모든 통치기관과 군대는 연합군에게 항복을 하게 되었고 북위 38도선 이남은 미군에게, 이북은 소련군에게 항복하고 무장해제하도록 얄타회담에서 결정되어 있었다.
전후 미국은 단연 다른 제국주의 열강을 제치고 최강의 제국주의로 되었다. 아직 일천하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동맹은 자기나라의 전후복구문제 이외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 소련이 원자폭탄을 가지고 있는 막대한 국력을 가진 미국의 주장에 대해 어찌 맞설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전후처리의 당면적인 문제는 미국의 의도대로 되는 수밖에 없었다.
38선문제도 그 무렵 우리나라에서 아직 수 천리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군대를 가진 나라가 바로 가까이 있는 나라에 대해 38선으로 경계를 삼아 주둔한다는 것은 분명히 도무지 이치에 당치 않는 처사이다. 미국은 당시 국력으로 이 비합리를 관철시키려고 했고 소련은 일본에 투하한 미국의 원자폭탄에 얼어 있었는지 그 비합리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수락하기만 했다.
이처럼 조선의 38선 분단은 미국의 억지주장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은 지금까지 60년 넘는 분단의 시초로 된 것이다.
3. 미군의 남조선강점과 맥아더
미제와 숭미 사대주의자 그리고 미제의 식민지통치의 교육정책을 충실히 받아들인 대부분의 이남 사람들은 조선의 8.15 일제 식민지해방을 연합군의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특히 이남은 미군의 점령을 미군의 승리에 의한 당연한 이치로 알고 그 자체를 해방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승의 영광 위에 빛나는 장군이 맥아더이고, 그래서 맥아더는 영웅이고 우리 이남사람에게는 일본을 내쫓은 해방의 은인으로 비치는 것이다.
이는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을 비롯해서 이남 땅의 역대정권에 의해 교육, 문화, 언론 등으로 조성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거짓된 환상이다. 사람들이 이 환상에서 깨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 환상 속에서 우리들 민중이 깨나기 위해서 맥아더를 이야기해야 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1945년 8월 15일이 되기 전에 이미 우리나라의 북부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결전과 전민항쟁으로 우리민족의 손으로 일제 통치기관을 파괴하고 식민지통치로부터 우리민족 스스로 해방되었고 각 지방에서 주권기관이 자연스레 터전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남은 사정이 좀 달랐다.
당시 조선총독인 아베 노부유끼는 이제 패망 후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받기 위해 시정권을 조선인의 대표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이를 위하여 부하인 정무총감 엔도를 시켜 처음은 송진우에게 교섭을 했지만 송진우는 친일신문인 동아일보 사장을 했던 자인지라 자신이 나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거절했다.
그러자 하는 수 없이 엔도는 조선 사람들에게 당시 이남에서 가장 존경을 받고 있던 독립혁명투사인 여운형을 만나 시정권 이양을 교섭했다. 여운형은, 정치범과 경제범으로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전원석방과 치안과 시정을 조선인에게 맡기고 간섭하지 말 것 그리고 가을추수까지 3개월의 식량배급의 확보, 이 3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이의 수락을 조건으로 이양받기로 했다.
여운형은 이미 일제의 최후의 날이 올 것을 예상하고 일제와 최후결전을 위한 준비로 지하비밀단체인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있었고 그 조직망은 전국적으로 망라되어 있었다.
여운형은 이 단체의 조직과 각 지방의 일제에게 절개를 팔지 않은 애국인사들로 하여금 「조선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를 조직하여 일제통치기관을 접수하고 치안대를 조직하여 치안을 확보하고 시정을 원활히 했으며 인민들의 후생을 담당했고, 당시 해방된 조국으로 물밀듯 들어오는 귀환동포의 원호를 원활히 했다.
그러는 한편 식민지해방 이후 일어나는 문제를 권위 있게 처결하기 위하여 나라의 주권기관을 건설해야 했다. 이를 위하여 각급 지방인민대표자를 선출하고 그 대표자회는 각급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 대표자를 보내어 1945년 9월 6일 서울 경기여고 강당에 회집하여 중앙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정강정책을 채택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그 이틀 후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에 들어왔다.
미군은 그 전날 7일에 전국 방방곡곡 조선 사람이 있을 만 한 곳에 비행기를 띄워 전단을 뿌렸다.
거기에는 미군이 일제의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를 하는 단순한 주둔군이 아니라 조선의 이남 땅을 점령하고 군정을 펴는 점령군임을 밝히고 있다. 그 포고문은 미합중국 태평양군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정말로 어처구니없었으나 소련도 어쩌지 못하는 원자폭탄을 가진 미군인지라 이에 항의할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더구나 그 포고문에는 일제 통치의 원상대로 일제관리가 그냥 복무하고 조선 사람들은 거기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래도 조선 사람들은 원수의 적은 우리 편이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일본의 적인 미국은 우리 편으로 생각했는지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다는 말을 듣고 미군주둔을 환영하려고 인천부두에 몰려갔는데 부두의 경비를 서고 있는 자들은 일본군이었다. 이 일본군은 질서를 잡는다면서 조선 사람들에게 실탄을 쏘아 여러 사람의 사상자를 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일제로부터 조선이 해방되는 사실을 말한 어떤 문건에서도 미군이 조선에 일제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하여 진주한다고 했지 점령하여 군정을 편다는 말은 없었다. 이에 대해서 북조선에 주둔한 소련군은 주둔군사령부라고 했지 점령군이라는 말도 군정청이라는 말도 없었다.
참으로 나라에 힘이 없으면 이런 꼴을 당해도 그냥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맥아더는 그의 부하인 하지를 점령군사령관으로 했고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라는 정식 이름을 달고 점령군으로서 군정을 폈다.
이와 같이 맥아더는 논리적 사고를 전혀 무시한, 그래서 바로 폭력의 논리, 따라서 깡패의 논리를 가지고 자기 자신의 지배욕과 미제의 패권주의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폭력의 무법자임을 스스로 나타내었다.
4. 6.25전쟁과 맥아더
6.25전쟁을 두고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가지고 사람들의 사상을 재단한다. 그 재단방식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승만 정권과 그 전통을 이어받은 역대 군사정권 그리고 민간정권이라 하는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이 선 이후 줄곧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2분법논리, 미군정이 들어와서 시작된 OX문제식 해답으로 하는 사상검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6.25전쟁을 남침이라고 하면 영락없이 국가보안법에 걸린다. 남침도 되고 북침도 된다고 하면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해서 취직도 안 되고 그래서 먹고 살기가 말이 아니다.
이렇게 길들여져 왔으므로 설사 그것이 틀리더라도 그릇되게 주입되면 그것이 바른 것으로 인식되어 머릿속에 콱 박히게 된다.
사실 6.25전쟁은 그 시작의 시점을 잡는 데 따라 북침도 되고 남침도 되는 것 같다. 당시 그처럼 38도선 상에서 일상다반사로 충돌이 있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발생된 그 시대의 상황을 분석해서 누가 전쟁을 도발했는가, 전쟁에서 이익을 보는 쪽이 누구이며 손해를 보는 쪽이 누구인가를 분석해서 어느 쪽이 어떻다는 정도의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맥아더의 6.25전쟁에서 역할을 알기만 하면 되므로 전쟁이 발생된 그 시대의 상황을 분석해보기로 하고 결론은 내리지 않기로 한다.
당초 미국은 남조선에 일제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하여 주둔한 미군을 점령군으로 탈바꿈하여 들어온 이상, 철수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더구나 일제의 항복과 무장해제 이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철수한다는 의사는 조금만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1947년 3월에 트루만이 의회에서 발표한 독트린을 보아서 명백히 알 수 있다. 미국의 대 소련 포위망 구축을 내용으로 하는 그 독트린에서 조선반도의 역할이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미ㆍ소공동위원회 사업을 파탄 냈으며, 전후문제를 취급하지 않는다는 국제연합의 헌장을 짓밟고 전후처리문제의 하나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한 조선 문제를 국제연합에 가지고 가서 남조선단독선거를 실시하고 남조선에 그들의 예속정권으로서 이승만 정권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를 반대하고 분단을 받아들지 않는 모든 세력들이 협상을 벌여 전 조선적인 대표자를 선출하여 비록 북조선에만 그 권위가 통하지만 명분상으로는 전 조선적인 정권으로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조국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기회 있을 때마다 북진통일을 부르짖고 북조선의 공화국은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통일하자고 호소했다.
이승만 정권은 남조선의 통일세력을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살인적으로 탄압하여 다스렸고 남조선 인민들은 줄기차게 자주통일을 위해 투쟁해왔다.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투쟁했으나 일부 세력은 무너졌지만 다른 일부세력은 2년 후 5.30총선거에 크게 진출하여 다음 2년 후에 있을 대통령선거에 이승만 정권은 무너지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바로 미제의 대조선반도정책의 실패로 귀결되고 미제는 조선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제는 전후복구에 의해 일시적으로 상승되던 경제가 하강을 맞고 있어서 경제회복의 기회를 만들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를 위해 지구 상 어디든 분쟁이 조성되어 군수산업의 경기를 되찾아서 경제회복을 도모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조선반도에서의 분쟁이다.
조선반도의 전쟁은 당시 38도선 상에서 항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충돌을 그 규모를 키우면 되는 것이다.
2년 후 권좌에서 쫓겨나게 될 이승만은 전쟁을 일으키는데 혈안이 되어 도쿄에 있는 극동군사령부로 날아가서 맥아더를 만났고, 워싱턴의 당시 트루만 대통령의 고문이고 나중에 국무성 장관으로 된 존 포스트 덜레스, 이들 3자의 연락이 빈번해지더니 덜레스가 1950년 6월 19일 남조선을 방문하고 국회에 연설하며 38선을 시찰하는 등 돌아가다가 1주일 만에 전쟁이 일어났다.
그래서 6.25전쟁은 이승만과 맥아더 그리고 덜레스 3사람의 작품으로 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맥아더는 호전가의 기질을 여지없이 발휘했다.
맥아더는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있는 미군을 즉시 동원하여 우리민족 내부문제에 무력으로 간섭하여 전쟁을 확대시켰다. 그는 스스로 조선에 날아와 공황상태로 허물어가는 국군을 그의 휘하군대로 받쳐 주고 이승만 정권의 명맥을 이어주었다. 이승만에게는 정말로 은인이었지만 북진통일을 부르짖는 분단의 원흉을 살려줌으로써 우리민족의 통일을 적극적으로 방해한 자주통일의 방해자로 되었다.
'Unews에 게재 2005. 9. 12.'
미군주둔 60년, 우리는 왜 맥아더를 이야기해야 하는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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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머리에
주한 미군이 우리나라의 38도선이남 땅에 들어온 지 올해로 꼭 60년이 된다. 국제적으로 인정된 미군의 주둔 명분은 일제 침략군에게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를 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미군은 우리나라의 이남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그들은 그러한 명분을 집어던지고 진주군으로서가 아니라 점령군으로서 들어왔다. 바로 맥아더는 그 점령군을 지휘하는 미국 태평양군의 총사령관이고, 주둔군의 명분을 집어던지고 점령군으로 모습을 바꾸어 조선인민에게 점령군 포고령을 반포한 그 장본인이다.
지금 우리는 일제식민지해방 60년이 지나도록 일제 식민지시대에서 자기 민족을 배신하고 동포들에게 고난을 들씌운 반역자들을 아직까지도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돌아보면서, 우리사회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는 일을 전 민족적으로 벌이고 있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해방된 조국에서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ㆍ민족반역자들의 치 떨리는 죄상을 되돌아보고 그들과 그들 후손들의 현주소를 알아보곤 사람들은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기막힌 일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 대부분이 일제 주구에서 미제의 충실한 주구로 변절하여 계속 일제 식민지시대의 친일주구로서 가졌던 기득권을 고스라니 이어받고 이승만 예속정권의 창건에서부터 역대 예속정권의 핵심적 세력으로 역할을 다했다는 사실이다.
미제는 식민지민중을 직접 통치하는 전전의 식민지통치방식을 바꾸어 식민지 점령지역에서 친미세력을 중심으로 해서 구성한 주민들로 예속정권을 만들어 정치ㆍ군사ㆍ외교ㆍ경제ㆍ문화ㆍ교육 등 각 분야에서 각종 조약과 원조 그리고 고문 등으로 얽어놓고 그들의 식민지통치정책을 구현해나가는 새로운 식민지통치방식을 취했다. 우리는 이것을 신식민지정책이라고 정식화하고 있다.
미제는 우리 땅에서 일제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마치고 38선 이북에 주둔한 소련군과 공동위원회를 열어 남과 북을 통일한 단일 정권인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워서 철군한다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짓밟고, 이남 땅에 단독선거를 실시하고 이러한 신식민지예속정권을 만들었으며, 그 핵심세력이 바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숭미 사대주의자들인데 그것은 바로 일제 식민지시대의 친일파ㆍ민족반역자와 친일 지주들이었다. 이들을 이어온 자들이 바로 지금의 반통일세력을 이루고 있으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예속정권의 정통성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과거청산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온 사회가 이에 대해 주목하고 그 귀추를 주시하고 있다. 또 「우리민족끼리」라는 민족적 이념으로 6.15공동선언을 이행하여 낮은 단계의 연방과 연합을 합친 통일을 위하여 매진하고 있는 6.15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래서 분단 60년을 맞이하여 민족의 자주평화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일이 바로 우리들 앞에 나서고 있다. 그래서 남과 북 그리고 해외의 온 민족이 올해를 「주한미군」철수의 원년으로 해서 힘차게 투쟁을 벌이고 있다.
주한미군철수운동에서 우리들 앞에 가장 먼저 나서는 일로 「주한미군」이 점령군의 모습으로 들어오게 한 최고사령관이고, 6.25전쟁을 일으킨 자들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자들 중의 하나이며, 조국의 이북 땅으로 쳐들어가 몰죽음을 당해 쫓겨나오자 이북 땅에 핵폭탄을 사용해 핵 완충지대를 만들려고 했던 핵전쟁광으로 아직도 인천 월미도 공원에 있는 그 맥아더의 동상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이리하여 이에 대한 철거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이에 대해 수구반동 반통일세력들이 이 운동에 맞서 나오고 있다.
그들은 미제와 미제에 빌붙은 친일교육자가 변절해서 팔자를 고친 친미교육자와 숭미 사대 미디어에 의해 60년을 교화ㆍ세뇌된 친미ㆍ숭미사상이 골수에까지 젖어 아직도 깨나지 못하고 있는 동포들이다. 미제의 이른바 ‘네오콘’ 등 온갖 국제적 모략이 그들 뒤를 받치고 있고 지원을 하고 있다. 어찌 쉽게 민족자주적 입장으로 돌아오겠는가. 우리들은 이들에게도 동포애를 가지고 교양선전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고 이들의 생각을 바로 세우는 것도 민족자주성을 구현하는 투쟁이다.
6.15시대를 맞아 주한미군철수운동이 한창일 때 강정구 교수가 「주한미군」의 부당성과 이를 해설하기 위해 6.25전쟁의 본질을 해설하는 논문을 썼다 해서 당국은 이를 국가보안법으로 걸어 조사를 벌이고 있다. 아직도 국가보안법은 시퍼렇게 눈을 부릅뜨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그 숨을 들이쉬고 있다.
강정구 교수의 논문은 학술적 표현이다. 그런데 이를 걸고 국가보안법으로 조사를 한다고 하니 당국은 시대의 흐름을 아직도 모르는가. 지금은 6.15시대, 남과 북이 서로 내왕하고 통일을 위해 서로 의논하고 이해를 함께 하려고 모대기고 있는 시대이다. 강정구 교수의 논문은 우리민족끼리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루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주한미군」문제를 다루고 이를 위하여 6.25전쟁의 본질에 대한 자기의 학문적 견해를 내었고 이어서 맥아더 동상철거문제를 언급했을 뿐이다.
당국자들은 이제 시대의 흐름을 인식하고 시대의 지진아에서 벗어나 국가보안법을 당장 폐지해야 할 것이다. 민족은 자주통일을 향해 나가는데 이를 가로 막고 국가보안법을 휘두르는 것은 바로 반민족적인 행위로 될 수밖에 없다. 당국은 하루속히 이 반민족적인 탄압을 걷어치우고 자주통일의 길에 함께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이 글은 「주한미군」철수운동의 시초에서 바로 마주 선 맥아더 동상철거문제에 즈음해서 맥아더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그가 과연 우리민족의 은인인가, 침략자의 원흉인가 하는 이야기를 우리는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 맥아더의 아버지와 미서전쟁(米西戰爭)
맥아더는 미국 아칸소 주(州)의 리틀록에서 출생했다. 미국-스페인전쟁(미서전쟁-美西戰爭)에서 무공을 세운 고급장교인 아서 맥아더의 아들로서 1903년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그 후 육군에 근무하여 1930년에 대장으로 승진했다. 군에서는 극동통으로 알려져 있고, 1936년 필리핀군의 고문으로 근무하다가 1937년에 일단 퇴역했다.
대일관계가 긴박하게 되자 1941년 7월에 현역에 복귀하여 미국 극동군사령관으로 필리핀에서 근무하다가 태평양전쟁을 맞았다.
1942년 초 일본군의 공격으로 마닐라를 빼앗기고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 연합군 남서태평양방면사령관으로서 대일작전을 지휘했다.
그 해 가을부터 뉴기니작전을 비롯하여 반격작전을 전개하였는데, 1945년 7월에는 필리핀을 완전히 탈환했고 이어 8월에 일본을 항복시켜 일본점령군최고사령관 및 대평양지역 주둔미군최고사령관으로 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제연합군(UN군)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고 전세를 역전시켜 인민군을 후퇴 시켰다고 하는데 1950년 10월에 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대공세를 맞아 패퇴했다.
맥아더는 이북을 점령하여 군정을 펴고 이북마저 식민지로 하려고 30만의 대병력을 투입하였으나 이들 병력을 몽땅 잃어버리고 마침내 그러한 꿈을 깨도록 만들었다.
이에 분한 나머지 그는 만주폭격과 조ㆍ중 국경 봉쇄를 주장했으며 대만의 국부군을 전쟁에 참가시켜야 한다고 주창했다.
맥아더는 그가 패퇴한 분을 보복하려는 셈인지 조ㆍ중 국경 이남에 핵폭탄을 투하하여 핵 완충지대를 만들어 우리나라를 영원히 핵 참화 속에 두려고 했던 천인공노할 전쟁광의 원흉이다.
이와 같이 6.25전쟁을 핵전쟁으로 비화시키려는 기도는 국제여론을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이를 둘러싸고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이 격화되었으며, 끝내 1951년 4월 사령관의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이상이 아주 짧게 추린 맥아더의 약력이다.
여기에서 맥아더 부자의 집안은 바로 미국 독점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전변되어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의 시작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미제의 침략전쟁과 그 세계패권주의와 더불어 그 생을 다한 자들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먼저 그 아버지인 아서 맥아더가 공훈을 세웠다고 하는 미서전쟁에 대해서 알아보자.
미국은 1850년대에 노예문제로부터 일어난 위기와 남북전쟁, 그 전후의 재건 그리고 대서부로의 개척과 사회개혁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1890년대에 들어서자 산업자본이 고도로 성장하여 독점자본의 형태를 띠게 되었고 선발 유럽 제국주의에 비해 늦기는 했지만 그때부터 해외 자본진출과 이를 위한 식민지쟁탈의 경쟁에 들어서는 제국주의로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1850년대부터 카리브 바다에 있는 쿠바에 설탕산업을 진출시키고 있던 미국 산업자본주의는 제국주의적 독점자본의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하자 당시 쿠바의 지배자인 스페인과 이해관계의 충돌이 벌어져 그것이 날이 갈수록 첨예화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쿠바에 4,000만 내지 5,000만 달러에 이르는 자본을 설탕과 담배공장, 제당공장, 망간과 철광의 광업 등에 투자하고 있었고 미국과 쿠바의 무역은 연간 1억달러에 이르고 있었다. 미국은 쿠바의 내전이 이러한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 크게 손실을 가져오게 되자 쿠바에 자본을 투자했거나 쿠바와의 무역에 종사했던 미국인들은 전쟁의 종식을 강력히 요구했고, 쿠바내전에서의 스페인 지배자들의 야만적인 행위는 미국인들의 인도주의적, 종교적 감정을 크게 자극하기도 했다. 특히 강제수용소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가해진 고통과 죽음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은 컸다.
이상과 같이 미국 독점자본의 이해관계와 야만적이고 잔학한 스페인 지배자들에 대한 도덕적 감정 등이 작용하여 미국의 쿠바에 대한 제국주의적 진출의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쿠바내전에 대한 미국의 군사간섭의 기회가 점차 무르익어갔다.
처음은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1895년 6월 중립선언과 1897년 클리블랜드를 승계한 맥킨리 대통령의 불개입선언으로 개입을 주저해왔지만 신문 등 여론으로 스페인 지배자들의 야만성과 잔학성을 과장해서 선전하고 전쟁개입을 선동했다.
1898년 1월, 수도 아바나에서 쿠바의 혁명세력은 완전한 독립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수락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 미국 정부는 쿠바 내의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불안상태가 계속된다면 강력한 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결의를 보이기 위하여 전함 메인호(Maine) 한 척을 아바나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여 사태가 위기로 치달았다.
게다가 미국주재 스페인 공사가 쿠바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가 쿠바의 한 혁명가의 손에 들어갔다. 그 편지에는 맥킨리 미국대통령을 모욕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이 내용이 1898년 2월 9일자 신문에 보도되어 미ㆍ서 양국 간에 나쁜 감정과 불신을 크게 조장시켜 놓았다.
이런 스페인공사의 편지사건이 있은 지 불과 6일 만에 2월 15일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이던 메인호가 폭발, 침몰하면서 266명의 미 해군수병이 살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메인호의 비극은 미국의 호전가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들의 신문들은 미국이 명예를 지키려면 쿠바사태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즈벨트 같은 제국주의자들은 메인호의 침몰은 명백히 스페인의 음모라고 하면서 스페인을 맹렬히 규탄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의회는 만장일치로 전쟁준비를 위하여 5,000만 달러를 배정했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메인호 폭침은 전쟁 도발자들에 의한 모략이라고 하는 말도 있다. 마치 훗날 베트남 통킹 만의 미 구축함의 피습으로 하노이폭격을 시작해서 베트남전쟁에 미군이 개입하는 계기를 만든 것처럼 미국이나 일본이 잘 쓰는 모략과 똑같은 것이라고 할까.
1895년에 일어난 쿠바의 반란에 즈음해서는 미국이 처음부터 그 반란의 와중(渦中)에 휩쓸려들었다. 이미 많은 의용병이 쿠바인민을 돕기 위해 쿠바로 떠났고, 또한 뉴욕에 본거지를 둔 쿠바인의 혁명단체가 발매한 공채도 잘 팔렸다. 해외진출에 반대한 미국인들조차 쿠바의 해방 자체에는 찬성했고, 쿠바에 재산을 둔 미국인은 물론 그 보호를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과 미국 사이에는 직접 전쟁을 유발할만한 중요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는데, 호전가들은 여론을 일으켜 스페인의 쿠바인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그것이 학대라든지, 압정이라는 식으로 실제보다 확대해서 신문에 보도되어 미국인으로 하여금 스페인에 악감정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의회가 결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불간섭 방침을 견지하였으나, 매킨리는 1896년에 실시되는 대통령선거에 공약으로 쿠바의 독립을 내세웠다.
마침내 1896년 4월 11일 대통령은 대 스페인 개전요청교서를 의회에 보내고, 20일 의회가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양국은 정식으로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미국군은 마닐라 만과 산티아고 등 여러 곳에서 승리를 거두어 전쟁은 불과 수개월 만에 끝났다.
전쟁결과 12월 10일에는 파리조약이 체결되어 쿠바는 독립하기로 하고,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은 미국의 영토로 되었다.
이 전쟁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아버지 아서 맥아더가 고급장교로 참전하여 공훈을 세웠던 것이다. 아서 맥아더는 이 공훈으로 장군별 준장을 달았고 필리핀으로 전근했다. 필리핀 점령군사령부에 근무하다가 1900년에는 소장으로 승진되어 필리핀 제8군사령관 및 군정장관에 임명되었다. 1906년 육군 중장이 되었고, 1909년에 퇴역했다.
이 장군의 아들인 더글러스 맥아더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아 군인다운 풍모를 갖추며 자랐고, 미군의 엘리트 장교 양성기관인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에서 미 육군 장교로서의 세계패권사상을 닦으며 졸업했다.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는 입학지원 자격과 지명권을 미국의 상원ㆍ하원 의원들이 대부분 행사하는 미국군인의 엘리트양성을 위한 학교로서 미국의 세계패권주의의 첨병을 양성하는 선민교육기관이다.
이 학교의 교육으로 선민의식이 충만한 청년이 만들어졌으며, 그들은 출세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오직 별을 얻기 위하여 굴종하고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는 우월감으로 대하는 지배욕으로 가득 찬 특수한 풍모를 가진 인간으로 양성된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아버지시대부터 인연이 맺어진 필리핀에서 대장으로 승진했고, 1936년 필리핀군의 고문으로 근무하다가 1937년에 퇴역했다. 퇴역 후 식민지지배자의 자리에서 향락을 누리다가 대일관계가 긴박해지자 1941년 7월 현역에 복귀하여 미국 극동군사령관으로 필리핀에서 근무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인 태평양전쟁을 맞았다.
이처럼 맥아더의 부자 2대는 미서전쟁과 뗄 수 없는 인연을 기진 인물로서 식민지통치, 그것도 미국식 식민지통치와 식민지 침략전쟁 속에서 식민지 지배방식과 식민지민중의 해방투쟁을 학살 탄압하는 골수의 식민지 군사지배자였다. 그들 부자를 세계패권주의자가 볼 때는 가장 우수한 지배자의 자질과 능력을 가진 자로 보였고, 식민지민중이 볼 때는 가장 잔악한 전쟁광신자요 학살의 원흉으로 보이는 인생을 산 자들이다.
미국은 쿠바를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켰으나 독립시키지 않고, 존 R 브룩(John R Brooke)을 쿠바총독으로 임명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3년 동안 총독군정을 실시하면서 학교를 세우고 공중보건시설을 세우면서 쿠바가 미국에 종속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후에 미국은 1901년에 공화제헌법을 만들어주었지만, 이와 동시에 미국의 내정간섭과 군사기지의 설치를 인정하는 플래트수정조항을 덧붙이고 1903년부터 99년간 관타나모 만 등을 조차 받아 미 해군기지를 설치했다.
미국의 총독군정정치가 종결되고 1902년 5월에 팔마를 수반으로 하는 공화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미국이 내정간섭권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비옥한 땅, 사탕산업, 교통수단, 관광시설 들 쿠바의 중추적 경제는 모두 미 독점자본에게 장악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수뢰, 부패, 실정, 무책임의 상징으로 인정되고 있는 고메스에 이어 가르시아, 사야스, 마차도, 바티스타로 그 부패의 전통을 이어오면서 친미예속 부패정권의 표본으로 되고 있으며, 미제는 이 쿠바의 예속정권에 의한 식민지통치의 경험을 살려 제2차세계대전 전후의 신식민지통치방식을 정립했다고 볼 수 있다.
'Unews에 게재 2005. 9. 12.'
2009년 5월 18일 월요일
굴곡된 우리 현대사의 시작
60년 현대사에서 미제는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이때까지 이남체제에 대한 신식민지적 경영(정치, 군사, 경제, 문화 사회의 모든 경영)의 주체자로서 그들의 예속정권을 통하여 지배・경영해왔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조국의 남부 정권은 미제의 신식민지적 본질이 더욱더 분명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교육은 이러한 우리의 신식민지적 현대사를 은폐하고 완전한 자주독립의 국가로 그 종주국으로서의 미제와 대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가 어려울 때는 언제나 도움을 주는 ‘언클 톰’의 나라로 인식되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미제는 우리 조국의 남부의 60년 현대사를 군사점령상태로 해서 역사의 구비마다 간섭하고 때로는 그들의 주구로 하여금 자주와 민주, 평화와 통일의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가로막아 나섰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남부 단독선거에 의한 이승만 정권의 창출을 비롯해서, 4.19청년학생의 봉기가 민주혁명으로 시동되고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운동으로 나아가자 박정희로 하여금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도록 해서 군사깡패들의 폭력으로 짓밟아버리게 했다.
그들이 내세운 이 박정희도 그의 부하인 김재규에 의해서 사살되었다고 하나 그 죽음의 의문은 안개에 가려져 있다. 아무튼 박정희의 제거는 정치, 군사, 경제에서 미제와 갈등을 빚는 고분고분하지 못한 예속정권에 대한 당연한 결말이기는 하지만 학살과 폭압의 원흉은 제거되었다. 그 후계자로서 전두환이 나서서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 일컫는 몇 달동안의 아주 조그마한 자유, 그 자유가 자주평화통일의 길로 틀림없이 구비 틀 것을 예상해서 광주학살로 짓밟도록 만든 장본인으로서의 미제의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전으로 조선에 북위 38도선 이남의 일본 식민지총독정권과 그 무력으로 조선군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하여 진주한 미군이 점령군으로 돌변하여 미제가 조국의 이남으로 들어온 것이다.
우리는 그 8.15일제해방의 역사적 사실과 우리민족으로서 그 의의를 올바르게 앎으로써 우리 현대사를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이남의 현대사는 미국에 의해 굴곡이 되었건, 가령 미국이 이남 땅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이 8.15민족해방으로부터 씌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도권 교육에서 현대사는 8.15해방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으로 일본식민지정권을 물리치고 약소민족인 우리 민족에게 베푼 것이라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과연 그런 것인가!
8.15민족해방의 의의
우리나라는 19세기 영․정조 시대부터 자본주의의 맹아가 트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의 봉건체제는 이 시대에 이르러 농민과 양반지주 사이의 모순이 격화되고, 농민도 도시빈민과 지주로 양극분화가 이루어졌으며 수공업의 규모가 커져 상업자본이 객주와 전주의 형태로 성장되고 있었다. 이 상업자본은 대규모의 수공업적 생산자본으로 성장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근대사상이 자생적으로 실학사상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미 근대화를 마치고 산업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선 서유럽 열강들이 동부 아시아에 그들의 식민지를 찾아 물밀 듯이 들어왔다. 인도, 베트남, 말레이지어, 중국, 일본으로 밀려들어와 그들 나라를 식민지로 또는 반식민지로 만들었고, 우리나라에는 대원군시대에 포화로 위협을 하고 침략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반항했지만, 1876년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해서 여러 열강들이 이 땅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들의 근대화가 이들 제국주의에 의해서 그 방향이 반식민지로 틀어지게 되었다. 좀 일찍이 근대화를 시작해서 서유럽식의 근대화를 본 딴 일본이 제국주의적 식민지 쟁탈에 동참하여 우리나라에 대한 서유럽의 제국주의의 이해관계를 받아 안고 지난 20세기초부터 나라의 주권을 강탈하여 우리나라를 그들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고 말았다.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무단정책으로 가장 악랄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우리나라는 자주적인 근대화의 길이 막혔고 일제에 의하여 봉건적 토지관계가 그대로 온존된 데다가 온갖 봉건적 유제마저 그대로 껴안고 있는 반봉건사회로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광복운동은 일제를 타도하여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쳐부숴 이 땅에서 몰아내고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에 심어진 일제의 모든 잔재를 청산하는 민족해방운동임과 동시에, 일제가 온존한 봉건적 토지제도와 그에 기반된 온갖 봉건적 유제를 타도하여 새로운 근대적 나라를 건설하는 민주주의운동으로서, 지난 시대의 봉건사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혁명운동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바로 민족해방민주주의운동으로서의 사회혁명인 것이다.
8.15전후의 민족해방투쟁
일제의 대륙침략은 41년 12월에 대평양전쟁으로 확대되고 이 전쟁으로 일제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1945년에 들어서자 일제는 멸망의 마지막 숨결을 모으는 듯 조선에는 그 지독한 유생, 무생의 역량수탈도 그 힘이 현저히 줄어들고 치안력마저 약해졌다. 곳곳에 철도폭파, 징용, 징병, 학병으로부터 그리고 수탈에 저항하다 도망한 자들이 속출하고, 평양의 일본군 연대에서는 대대적인 조선청년의 집단탈영이 이어졌다. 이는 일본의 마지막 모습을 잘 보여준다. 마침내 지리산에서도 이현상 선생이 징병, 학병 도망자, 수탈에 저항하다 도망한 청년들을 모아 무장대를 조직하고 있었고, 함양경찰서를 습격하여 불태우고 무장을 탈취하여 일제와 최후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선의 여러 산악지대에서는 연합군이 상륙하면 일본군의 배후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한 무장대의 준비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1930년대부터 백두산 밀림을 근거지로 하여 일제의 100만 관동군과 조선군 20만, 만주괴뢰군 40만을 상대로 백전백승의 유격전을 벌였던 김일성 장군의 조선인민혁명군이 조국해방의 최후결전을 위하여 백두산 밀영을 근거지로 해서 활동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의 대일선전포고에 앞서 8월 8일 새벽, 김일성 장군의 조선인민혁명군이 두만강가의 당시 웅기군 토리에 있는 일본군의 요새를 격파하여 국내침공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8월 9일 소련의 대일선전포고와 더불어 김일성 장군은 조선인민혁명군에게 항일무장투쟁의 최후공격을 명령했다. 이를 기념해서 웅기군을 「선봉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노도와 같이 국내로 들어왔고, 이미 조직되어 있던 조국광복회 산하의 무장돌격대는 일제의 경찰관서와 통치기관을 접수했으며 조선인민혁명군을 일본군의 퇴로로 인도하여 적을 섬멸시켰으며, 또한 조선인민혁명군은 대일작전에 참가한 소련군대와 연계를 취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조국을 해방시켜나갔다.
한편 이남에서는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소련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이 파죽지세로 밀려오자 일제의 아베 총독을 우두머리로 한 일제 통치배들은 그들의 생명보호를 위해 시정권을 조선인에 넘겨주기로 했다. 처음은 친일신문 「동아일보」 사장을 했던 송진우에게 부탁하였으나 송진우가 감당할 일이 못되는 지라 거절당하고, 하는 수 없이 여운형 선생에게 엔도 정무총감을 보내어 부탁했다.
여운형 선생은, “1. 감옥에 가두고 있는 모든 정치범, 경제범을 석방할 것, 2. 향후 3개월 동안(추수 때까지) 1인 1일 3합의 식량배급을 보장할 것. 3. 조선인이 하는 일에 일체 간섭하지 말 것.” 등 3가지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을 다짐받고 시정권을 받아들였다.
여운형 선생은 1944년 8월부터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에게 마지막 타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건국동맹」의 3불맹세(三不盟誓 - 1. (不名)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2. (不居) 거처를 말하지 않는다. 3. (不文) 글을 남기지 않는다.)로 유명하다.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시키고 있던, 이 조직을 핵심으로 하여 조국의 남부 전역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해방직후의 혼란한 치안을 확보하고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또는 수탈과 탄압에 못 견디어 조국을 떠나게 된 동포들의 귀환을 원호하면서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모두가 하나같이 떨쳐나서도록 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정권기관을 창출하기 위하여 먼저 동・리와 면・군의 지방정권기관으로서의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이들이 각급지방의 대표를 선출하고, 9월 6일 서울 이화고등여학교에 모여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정강」과 「중앙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로써 남과 북은 모두 각급 주권기관을 창출하고 중앙정권기관을 내와서 이제 통일정권을 내오는 일만 남은 것이었다.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첫 단계가 우리민족의 손으로 빛나게 승리한 것이다. 이제 일제의 모든 식민지잔재를 청산하고 남녀, 귀천, 사상, 종교, 정치 등 모든 차별을 철폐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와 같이 미군이 조국의 이남에 들어오기 전에 일제의 총독부가 자기들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 통치권을 넘겼고, 이북은 바로 총대로 일제 통치기관을 짓부숴버렸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8월 15일에는 이미 우리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고, 이때 미국은 저 멀리 오키나와에서, 그리고 필리핀의 루손 섬에서 정글의 진창에서 허덕이고 있지 않았던가!
일제의 식민지에서 미제의 식민지로 된 이남 땅
일제의 항복을 받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하기 위해 상륙할 것으로 알고 있는 미군이 상륙을 앞두고 일본군과 총독부에게 미군이 상륙할 때 일본군이 무장하여 경비하고 질서를 지키도록 할 것과 미군의 허락이 있을 때까지 부서를 지킬 것을 명령했다.
9월 7일, 미군은 인천에 상륙했다. 순진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적의 적은 우리 편’이라는 단순한 형식논리로 수많은 사람들이 인천부두로 전승국 미군을 환영하러 나갔다. 일본군은 철모르고 환영하러 나온 군중에게 총질을 해서 수많은 우리 청년들을 죽이고 상했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이날 또 미군은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이남 전역에 비행기로 전단을 살포하고 군정을 실시한다고 했으며 군사강점을 선포했다. 그리고 일제의 모든 통치기관은 그대로 온존한다고 했고, 각급 관리들은 직장을 지킬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미군은 총독부에 군정청을 두고 조선의 북위 38도선 이남의 권위는 군정청에 있다고 했으며, 다른 어떤 것도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따라서 「조선인민공화국」은 인정하지 않으며 「중앙인민위원회」와 각급 「인민위원회」는 해체하라고 명령했다. 미군은 지프차에 기관총을 달고 와 각급 「인민위원회」와 「치안대」의 간판을 뜯고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분통이 터진 열혈청년들은 도처에서 저항하다가 총에 맞아죽고 부상을 입었다. 그중에서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곳은 전라남도 화순광산의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미군과 그 앞잡이 경찰에게 다이나마이트로 대항했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진압당하고 말았다. 총대 없는 정권이란 정말로 맥없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했다.
미군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관인 「총독부」관리와 친일지주, 친미종교인, 친일관리,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끌어 모아 「군정청」을 설치했다.
한편, 38도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대륙침공의 첨병부대인 일본군 나남사단 등 모든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이북의 모든 행정권을 이북의 북조선인민위원회에게 이양했다.
이북의 모든 행정권을 이양 받은 김일성 장군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일제의 모든 법령과 통치제도를 타파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실시해나갔다. 그 첫째가 9할이 가까운 농민의 봉건적 착취의 기초였던 봉건적 토지제도의 청산이었다. 즉 모든 토지를 밭갈이하는 농민에게 무상분배하는 토지개혁이었다. 이로써 이북은 한날한시에 지주가 몽땅 소멸되고 말았다. 다음은 8시간제 노동을 기본으로 하는 민주적인 노동법을 선포했다. 그리고 일제가 가지고 있는 공장, 은행, 선박, 교통기관 등 중요산업기관을 국유화했다. 이것은 노동자가 바로 공장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남녀평등권법령을 공포했다. 수 천 년을 봉건적 억압 속에서 살아온 여성들에게 남자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가지게 되었고, 산후 산전의 유급휴가를 받게 되는 등 여성으로서의 신성한 권리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북은 항일투쟁시기에 내걸었던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강령을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정강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20개 정강으로 이루어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해나갔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과 「미소공동위원회」
이남 땅에 미군이 들어오게 된 명분은 미・소 양국의 협정에 의하여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그들을 무장해제하는 것이었다. 미・소 양군은 이 과업을 마치고 적당한 권위를 인정받는 정권을 창출하여 거기에다 권력을 넘겨주고 철수해야 마땅할 것이다.
38선을 경계로 미・소 양군이 일본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결정한 얄타회담에서 합의한 내용에 따라 1945년 12월에 전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영・소 3개국의 외상이 모스크바에 모여 회담을 하고 「조선문제」에 대한 결정을 발표했다. 즉 “미・소 양군은 「미・소공동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선인민의 정당・사회단체의 대표자들과 협의하여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수립을 위한 정강을 결정하고, 이를 미・영・소・중 4개국의 정부의 승인을 받아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고 4개국은 최장 5개년을 신탁통치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신탁통치’란 것은 국제연합 헌정에서의 ‘신탁통치’는 아니고, 러시아어의 원본에는 ‘후견’이라는 말로 되어 있다고 한다. 미제는 이를 모략적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의미를 사상해버리고 그냥 ‘신탁통치’라는 기분 나쁜 보도로 만들어 처음부터 딴지를 걸었다. 이 보도를 보고 우리들은 모두 격분을 했으나 그 내용이 일제의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 한 후 양군이 돌아가기 위해서 하는 정당한 조치임을 알게 되자, 친일파 민족반역자와 미제의 점령 밑에서 출세하려는 친미 숭미 사대주의자들을 제외하고, 절대다수의 민중들은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미제와 이른바 「상해임시정부」에서 분파로 분탕만 일으키다가 미국으로 들어가 독립운동자금이라면서 「임시정부」를 팔아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서 안락한 생활을 하다가 조국이 해방이 되자 미제의 충실한 주구로 된 이승만과 이자가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끌어 모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폭력집단들은 「미・소공동위원회」사업을 백방으로 방해해 나섰다.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5월에 협의대상의 정당・사회단체들에 친일파의 단체까지 넣자고 하는 미국 측의 주장 때문에 무기휴회로 들어가고 말았다.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절대다수의 농민들이 토지개혁으로 제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게 되리라고 고대하던 일이 허사로 돌아갔고, 때마침 모리배들이 미제의 묵인 아래 쌀을 일본으로 대량 밀수출한 결과로 생긴 도시민중의 쌀 소동과 맞물려 10월달에 대구지방 일대에서 항쟁이 터졌다. 사람들은 이를 ‘10월인민항쟁’ 또는 ‘10월폭동’이라고 한다.
하늘도 일제 해방을 축하해주는 듯 전쟁 중 내내 가물어 흉년이었던 것이 해방의 1945년은 대풍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6년 봄부터 시장에 쌀 공급이 줄어들어 쌀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도시민은 그들의 임금으로 식량을 사댈 수가 없었다. 월급쟁이들이 한 달 월급을 몽땅 털어도 쌀 한 말 사기가 어려웠다. 쌀값이 이처럼 뛰어오르자 물가는 쌀값에 미치지는 못해도 덩달아 오를 수밖에 없었다. 6월초에 당국에서 물가지수란 것을 발표했는데 3월말 기준이라고 하면서 1945년 8월 15일을 100으로 할 때 524라고 했다. 불과 반년 남짓 한 기간에 5배나 오른 셈이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쌀 배급을 도시에 실시하려 했지만 쌀은 이미 물 건너 일본으로 가고 만 것이다. 창고에 있던 총독부가 공출로 빼앗아놓은 얼마 남지 않은 묵은 쌀을 털어 일단 서울에 1인 1일 1합의 배급을 해보았지만 며칠이 안 되어 그것도 바닥나고 말았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자 사정은 더 악화했다.
초여름에 보리 수확 철을 맞고 식량 사정이 좀 풀리는가 했더니 도시민의 식량 해결의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미군정 당국이 이른바 군정관리에게 그 해결 방안을 강구하도록 했는데 그 방안으로 꺼낸 것이 일제 총독부가 만든 이른바「식량공출령」이라는 묵은 법률이었다.
군정청은 그들의 졸개 행정기관을 통해 농민에게 보리 공출을 할당하고 공출을 독려했지만 농민의 반발은 격렬했다. 농민조합은 이를 즉각 반대했고 농민들은 조직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군정은 미군이 지휘하는 경찰을 동원해서 강제공출에 나섰다. 미군이 지프차를 타고 뒤따라오고 군정경찰을 앞세워 마을에 들어가 집집마다 뒤지고 빼앗았다. 도처에서 실력행사가 일어났다. 많은 농민들이 붙잡혀 유치장으로 끌려갔고 실력행사 와중에 사상자도 났다.
이리하여「신한공사」가 만들어져서 토지개혁이라는 희망도 사라진데다가 공출까지 당해야 하는 농민은 군정과 이제 영영 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공출소동에 동원된 군정경찰의 모진 탄압으로 경찰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나빠졌다. 이렇게 빼앗은 보리로 배급을 주려고 했지만 그것으로 식량문제 해결에는 새발에 피였다.
쌀소동으로 세상이 한참 뒤숭숭할 때 이승만 박사는 한 말씀했다.
“한국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쌀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될 것을 왜 쌀만 먹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말이 나돌자 사람들은 말했다.
“정말 천황씨 같은 양반이네. 쌀 살 돈도 없는데 고기를 사 먹을 돈은 어디 있는데? 어이구 참, 미국에서 살았다고 고기만 아는가 봐. 그런 사람에게 나라를 맡겼다가는 우리들 다 굶겨 죽이겠다.”
당시 물가는, 왜놈들이 망할 무렵 그들이 앞으로 필경 조선에서 쫓겨날 것을 염두에 두고 그때 쓸 요량으로 많은 조선은행권을 찍어둔 것을 군정청이 차지하여 그들의 군정 비용으로 시중에 아무런 제한 없이 유통시켜서 일어난 것이다.
신식민지체제의 기반구축
미제는 조선민중의 끈질긴 저항을 폭력적 탄압만으로는 군정을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마침내 미제는 「미・소공동위원회」를 다시 열어 일단 민중의 저항을 달래보려고 했다.
미제의 점령군 사령관 하지는 북조선 주둔군 사령관에게 「미・소공동위원회」재개를 제안하고 그 서한을 공개하여 저항을 달래보려고 했다. 거기에는, 먼저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 정부와 민주단체와 더불어 후견안(여기에서는 신탁이라는 말이 없다)을 작성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지는 신탁의 의미를 정하기 전에 임시정부를 먼저 수립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조선민중의 저항에 당황한 미제는 경찰에게 일제히 무기휴대를 금하고 대신 방망이를 가지게 했다. 경찰복장도 일제 경찰의 검은 복장을 없애고 엷은 카키색 미 군복에다 아프리카 식민지 서양 사람들이 쓰던 민간 헬멧으로 바꾸었다. 폭동을 진압한다면서 마구잡이로 잡아간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지시하고 급히 미국으로부터 밀가루와 우유, 설탕, 과자를 엄청나게 대량으로 들여와서 배급이라고 주었다.
뿐만 아니라 미제는 원면을 헐값으로 들여오고 그들이 군수잉여물자로 광목, 낙하산감, 심지어 모기장감의 직물을 마구 들여와 우리 민족경제의 바탕으로 되어 있던 면직, 견직, 마직 공업을 결딴내었고, 화학비료를 무제한으로 들여와 화학비료의 득실을 모르는 우리 농민으로 하여금 마구 뿌리도록 만들어 토지를 산성화시켜 농업생산의 기초를 파괴했다. 민족경제를 그 기반으로부터 파괴하여 경제를 완전히 미제에 예속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미제위 이런 물자의 선심은 결코 그처럼 고마운 원조나 시혜가 아니었다. 남조선 군정이 미제의 금융자본으로부터 대조선차관 2,500만 달러를 빌려다가 태평양방면에 있는 미국의 전쟁잉여물자를 사서 들여온 것이다. 이 차관은 미군이 철수할 때는 그 빚이 조선정부에 이양되고 25개년 기간으로 1951년부터 연리 2.63퍼센트로 매년 분할상환 한다는 것이다.
미제는 알토란같은 쌀을 모리배로 하여금 일본에 갖다 팔도록 해서 떼돈을 벌게 하여 장차 미제의 식민지 경제에서 그들의 주구가 되는 매판자본까지 키웠고, 쌀을 달라는 아우성이 폭동으로 번지자 귀한 외환을 빚내어 과자부스러기나 사다가 안겨서 달래는 한편, 자립적 민족경제의 기반까지 파괴하는 일석이조의 사기를 치는 것이었다. 미국놈의 원조가 바로 그렇고 차관이 바로 그렇지 않는가.
특히 미군정은 2월 21일 일제가 조선농민으로부터 강탈해간「동양척식주식회사(약칭 동척)」의 땅을 일본의 소유로 규정하여 적산이라는 이유를 들어 미군정의 소유로 하고「신한공사」라는 것을 만들었다.「신한공사」는 조선정부와 독립된 기관으로서 사장은 미군 장교로 임명하고 조선정부는 어떠한 권한도 없다고 했다. 공사에 관계된 범죄는 미군의 군사재판이 담당한다고 발표했다. 미군정이 말하는 조선정부란 그때 3상회의 결정으로 수립될「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독립이 된 후에도 그 땅을 미국의 재산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강도가 탈취한 것을 보다 힘센 새로운 강도가 빼앗아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제 것으로 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해 농민들은 결사적인 반대투쟁을 조직하고 저항했지만 총칼을 가진 미국 놈들에게 속수무책이었다.
실제로 미군정은 3월 11일에「신한공사」의 법률을 제정 공포하고 왜놈들이 강탈해간 조선 사람의 땅을 제 것으로 차지하고 그 땅에서 소작료를 받았다. 미군정은 소작인들에게 군사재판으로 위협했고 그해 가을부터 약 3할의 소작료를 강탈했던 것이다.
해방군의 너울을 쓰고 들어온 미제는 이때부터 침략의 의도가 노골화되어 갔다. 미제는 일제가 조선에서 차지하고 있던 모든 중요산업과 일인의 개인재산까지 전부를 점령군이 점유한 재산으로 결정하고「적산관리부」를 만들어 차지했다. 이로써 미제는 조선의 대부분의 부동산, 동산을 차지한 것이다.
또 미제는 남조선을 문화적으로도 식민지화하려는 기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해방 후 경성대학과 각 전문학교는 거기에 있는 조선인 교수들의 열성적인 활동으로 교수를 새로이 초빙하고 학생자치회와 더불어 자치경영하고 있었다. 미군정이 학원을 간섭하기 전에는 참으로 학문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었다. 미군정과 군정 관리는 이것이 못마땅했고 자유주의적인 교수와 사회주의 경제학을 연구하는 교수들의 새나라 건설의 자주적인 일군을 양성하는 일이 특히 눈에 가시처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되자 학문의 자유에 대해서 가장 열렬한 도상록 교수와 사회주의 경제학자로 일제 때부터 탄압을 무릅쓰고 연구에 전심해서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낸 것으로 유명한 백남운 교수를 본보기로 해서 일차적으로 파면했다. 그것은 앞으로 식민지 교육정책으로 내놓을 이른바 「국대안」을 위한 전주곡이었고 다른 교수들에 대한 위협이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이르는 「국대안」이란 6월 19일에 발표한 이른바 「국립서울종합대학안」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미군정이 학교 경영권을 가지고 군정에서 관제로 이사회를 조직하여 대학의 경영을 맡긴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것은 또한 서울에 있는 일제 총독부의 관립 도립전문학교와 수원에 있는 농업전문학교를 한데 통합한다는 것이다.
6월 19일 이른바 「국대안」이라는 것이 나오자 전국의 학원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제일 먼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전에서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어 서울대학을 비롯해 「국대안」에 들어갈 전문학교들이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연이어 다른 학교들도 동정 휴학을 선포했다. 나중에는 중학교도 이에 동조해서 군정청의 민족교육을 무시한 교육정책을 비난하고 진보적인 교수와 교사의 해임을 반대하며 즉각 복직시킬 것을 주장해 동맹휴학으로 나섰다.
미군정의 교육당국은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자 국립서울대학교의 총장은 조선인으로 한다고 무마해 나왔지만 이미 그들의 식민지교육정책의 마각이 드러난지라 믿을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동맹휴학의 열풍은 지방으로까지 번져나갔다.
미군정은 한편으로 회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탄압을 강화했다.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교수, 교사를 다른 구실을 붙여 학교에서 축출했고 학생들은 학원에서 퇴학시켜 추방했다.
당시 사회는 일제로부터 막 해방이 되어서 일제의 우민정책으로 대학이나 중학교의 교사로 임명할 수 있는 정식 자격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중학교 교사 중에서 실력이 있고 자발적으로 학문을 꾸준히 연구해온 학자들이 대학의 교단을 담당했다. 여기에 곁달아 수단 좋은 사람들도 줄을 달아 대학으로 올라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중학교도 마찬가지로 공인된 정식교사가 아주 적었다. 갑자기 불어난 중학교 교원의 수요를 감당할 수가 도저히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교원 중에서 일부 실력 있는 자들이 중학교 교원으로 올라왔다. 여기에서도 여러 가지 경로로 줄을 달아 초등학교 교원도 못할 자들이 들어와 학생들에게 배척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일제 때부터 왜놈들 밑에서 식민지 노예교육의 첨병으로 복무했던 군정의 문교관리들은 노예교육정책의 실행과 거기에서 얻은 모략적 책략에 이골이 난자들이라 이러한 해방 직후의 불가피한 상황을 이용했다. 그들은 대학과 중학교의 교원의 자격문제를 정리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진보적인 대학교원과 중학교 교원 중 앞으로 교육의 식민지적 지배에 방해될 교원들을 정리하려는 했다. 그들을 무자격이라는 핑계를 걸고 학원에서 추방하는 일을 벌였다. 대신에 실력도 없고 줄을 타고 중학교에 대학교에 교원으로 올라온 자들은 온갖 위조졸업장을 만들고 자격증을 위조해서 그것을 근거로 교원의 자격증을 남발하여 미제의 군정교육정책, 즉 식민지교육의 첨병으로 나서게 했고, 실력은 있지만 위조졸업장을 만들거나 자격증을 위조해서 학생들을 속일 수 없는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교원들은 학원에서 대거 추방당하는 어처구니없는 꼴을 당했다.
유신정권시대에 교수재임명을 빙자해서 학생들의 통일운동 민주화운동에 동정적인 교수들을 추방하는 방법의 원조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학생들이 따르고 실력이 있는 대학 교원과 중학교 교원들은 일시에 직업을 잃고 방황하게 되자 여기에 조국의 북부에서 구원의 손길이 뻗쳐왔다. 많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이때 북으로 넘어갔다. 거기에서 그들은 자기의 능력에 따라 일할 곳을 얻어 나라의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지금 북 공화국의 강성한 과학기술과 화려한 문화예술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에 그들은 크게 이바지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미제의 신식민지적 기반을 구축하는 한편, 이로 인하여 일어나는 저항을 우선 조금이라도 누그러지도록 하기 위하여 1947년 5월에 미제의 사령관 하지는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요청했고 소련을 이를 받아들여 재개되었다. 소련 측은 대폭 양보하여 협의대상자의 수를 정당・사회단체의 회원 수에 비례하여 정하기로 제안하여 이를 합의하고 결정을 보았다.
이러한 결정이 발표되자 하룻밤 사이에 425개의 유령, 협잡단체가 생겨 협의대상자의 신청을 해왔고 그 회원 수는 전체 남북인구의 근 2배에 달하는 5,600만 명이나 되었다.
소련 측은 마지막으로 협의대상자의 수를 남북 동수로 하자고 주장했으나 미국 측은 인구수의 비례로 하자고 하여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소련 대표들은 이북으로 돌아가서 조선문제는 조선인민의 자결권에 맡기고 양군은 1947년 연말까지 동시에 철수하자고 제안했다.
분단, 남조선단독선거와 단독정부
모스크바 3상회결정으로 이루어진 「미․소공동위원회」를 파탄내고만 미제는 조선문제를 국제연합으로 넘겼다. 그리하여 국제연합은 미제의 의사대로 그를 따르는 회원국의 수적 우세를 이용하여 국제연합 감시 하에 총선거를 한다는 미제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미제는 국제연합을 만들 때 대서양헌장이라는 국제연합 헌장에 전후문제에 관계되는 사항은 국제연합에서 취급하지 않고 이해당사자 간에 해결하도록 되어있다. 조선문제는 전후문제에 관계되는 것으로, 그래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취급했던 것이다. 소련은 그에 따라 조선문제의 해결책으로 ‘조선문제는 조선인민의 자결권에 맡기고 미소 양군은 1947년 12월 말까지 동시 철수’를 제안해두고 있었다. 미제는 이러한 소련의 제안을 묵살하고 조선문제를 국제연합 헌장마저 짓밟고 국제연합에 넘겼던 것이다.
그러는 한편 이남 땅에서는 대대적인 탄압으로 민주인사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고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 「학련」 그리고 깡패들을 동원하여 민주인사들의 가옥과 살림을 쳐부수고 사람들을 마구 팼다. 그래서 이남 땅을 완전히 공포분위기로 만들고 민중들을 「향보단」이라는 조직으로 몰아넣어 부정선거를 준비해나갔다.
미국의 제안에 따라 국제연합 감시 하의 총선거를 결의한 국제연합은 「조선위원단」을 조직하여 들어왔으나 이북 측의 거부로 이북에는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다시 국제연합에 총회시기도 아닌 때에 급히 국제연합 헌정에도 없는 「소총회」라면서 소집해서 선거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제안하고 이를 결의하여 이남 땅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총선거를 한 것이 이른바 5.10선거라는 것이다.
이남 민중은 이를 반대하여 총궐기해서 투쟁을 전개했다.
1948년 2월 7일에 이남 땅 전역에서 총파업투쟁이 벌어졌고 농민들은 경찰관서를 습격해서 무장을 탈취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곳곳에 야산대가 조직되고 밤이면 산마루에 봉화가 올랐고 ‘단독선거 반대’의 함성이 울렸다.
제주도에서는 4월 3일 전 섬에 총궐기가 있었다. 무장을 들고 그 동안 도민을 탄압해온 경찰관서를 점령하고 서북청년단을 까부쉈다. 이것이 ‘제주도 4.3인민항쟁’이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제주도는 미군 군정청 행정이 들어가지 못했다. 제주도에서는 남조선단독선거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1948년 5월 10일, 이른바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나 곳곳에서 저항을 받았고 투표를 못한 곳도 있었지만 대리투표, 무더기표 등 부정선거로 얼룩진 선거였고 무장경찰이 마을을 다니면서 투표장으로 몰고 가는 선거였지만, 이른바 국제연합 선거감시단은 평화적이고 순조로운 선거라고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국회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그 결과는 이남 「국회의원」 198명 중 그 성분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는 노동자와 농민의 대표자는 한 사람도 없다.
이들이 헌법을 만들었고 「대한민국」이라는 정부를 만들었는데 이는 지주, 자본가, 친일관리들이 정부임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이것이 미제에 의하여 만들어낸 분단된 예속정권의 실상이라 할 수 있다.
이리하여 8.15 일제로부터 해방의 의의였던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완수는 이남에서는 미제에 의하여 완전히 좌절되었고 그들이 세운 예속정권인 이승만 정권에 의하여 학살되고 말았다.
이남의 민중 앞에는 새로이 미제 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새로운 민족해방운동과 그 예속정권의 파쇼폭압에서 벗어나는 민주주의운동이 과업으로 주어지게 된 것이다.
역사의 새로운 시작, 통일운동
미제의 식민지 통치는 제2차세계대전 이전의 주권을 완전히 찬탈하는 식민지 통치가 아니라, 주권은 그들이 세워놓은 예속정권에게 주어 식민지를 통치하도록 하고 각종 협정과 조약으로 종주국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하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제도이다. 이를 전전의 식민지제도와 구별해서 신식민지제도라고 한다.
이남 땅에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운동이 격화해지는 가운데 이북에서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으로 하여금 조국이 분단의 위기에 처한 상황을 반대하고 민족자주역량을 하나로 모으기 위하여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개최를 제안했다. 이에 대해 이남의 정당・사회단체 중 「한국민주당」과 이승만 일파 등 지극히 소수만 제외하고 모스크바3상회결정을 반대하던 김구 선생까지도 지지하는 등 거의 모든 민중들이 지지하고 대표자를 선정했고 이들이 이북 평양으로 모여들었다.
1948년 4월 30일에는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지도자들의 협의회가 진행되었다. 회의에서는 「남북조선 제 정당・사회단체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여 미・소양군 철수안을 절대 지지하며 양군이 철거한 후의 완전한 질서를 담보하며 외국군대 철수 후에는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고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남조선단선에 의하여 조작되는 단독정부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성명했다.
남북연석회의 참가자들은 서로 정견과 신앙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구국방안과 통일방침을 일치하게 결의하고 회의에서 채택된 결정을 실현하기 위하여 한결같이 떨쳐나설 것을 호소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1948년 5월 10일 남조선 단독선거가 결행되자 1948년 6월 29일 「남북조선 제 정당・사회단체들의 지도자협의회」를 소집하여 지체없이 전조선적인 통일적 중앙정부를 세우는 방침을 결정을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 방침은 모든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전체 인민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지도자협의회는 남조선에서 강압적으로 실시된 단독선거의 무효를 선언한 다음 전조선적인 선거를 실시하며 이에 기초하여 최고인민회의를 창설하고 중앙정부를 세울 것을 결정했다.
남북조선 전지역에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는 1948년 8월 25일에 진행되었다.
이북에서는 일반적인 평등적, 직접적 비밀투표에 의하여 선거가 진행되었는데 유권자의 99.97%가 참가하여 98.49%의 찬성투표로서 212명의 대의원을 선출했다.
이남에서는 군정경찰과 우익깡패들의 방해책동을 고려하여 비밀리에 선거자들의 서명을 받는 방법으로 인민대표들을 선출하고, 선출된 인민대표들이 이북 해주에서 모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을 선거하기로 했다.
군정경찰과 이남의 우익정치깡패들의 폭력적 탄압을 무릅쓰고 서명투표가 진행되었다. 이 탄압은 정말로 격심했다. 8월 20일 하루 동안 이남에서 1,370명이 붙잡혔고 선거의 전 기간 동안 수만 명이 체포 투옥되었으며 수 천 명이 살상되었다.
미제와 군정경찰 그리고 폭력배들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이남 민중은 통일의 열망을 가지고 선거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전체 유권자의 77.52%에 해당하는 673만 여명이 선거에 참가하여 1,080명의 대표를 선출했다.
이 대표자들이 이북지역인 해주에 들어가서 8월 21-26일 사이에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여기서 비밀투표에 의하여 이남인구 5만 명에 1명 비례로 360명의 최고인민회의대의원을 선거했다.
이러한 남북총선거에 기초하여 1948년 9월 2일 평양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가 소집되었고 회의에는 남북조선에서 선거된 572명의 대의원들이 참가했다.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했다. 회의에서 김일성 장군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으로, 국가수반으로 추대되었으며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선포했다.
이와 같이 해서 이남은 이북의 대표자들이 한 사람도 없는 친일지주와 자본가들 그리고 친일관료 출신들로 이루어진 명실 공히 반동가리 정부인 셈이고, 이북은 그래도 이남 출신의 대의원으로서 전체 대의원수의 63%를 차지하고 거기에는 노동자, 농민, 교육자, 소시민 등도 자기 계급계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참가한 전체 민족의 정부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명분은 정당하지만 실지 현실로는 그 정부의 권력은 이북에서만 실행가능한 정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그 후 이남의 「민주주의민족전선」과 합동한 「조국통일민족전선」의 이름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가지로 통일방안을 제의하고 인사들을 보내어왔지만 미제와 이승만 정권은 이를 일축하고 북진통일만 부르짖었고, 통일을 위해 넘어온 인사들은 감옥에 처넣거나 살해하고 말았던 것이다.
반미구국운동의 전개와 6.25 전쟁
미제는 이승만 정권을 세움으로써 우리민족을 분단 시켰고 이 분단을 반대하여 투쟁하는 민중들은 유격대를 조직하여 대항해 나섰다. 한라산의 유격대, 지리산, 태백산, 운문산-신불산 유격대를 비롯하여 높은 산에는 모두 유격대가 조직되어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미제는 이승만 군대를 정예화 시키고 과거 악명 떨친 일본군의 삼광(三光)적전과 중국 장개석 군대의 건벽청야(建壁淸野)작전에다, 미제가 인디안을 몰살했던 작전까지 동원하여 유격대와 산간민중을 잔인하게 토벌했다. 여기에다 투쟁의 지도부인 남노당 지도부의 배신적 간첩행위로 유격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민중들은 굴하지 않았다. 2년후 1950년 5월 31일에 총선거가 있었다. 민중은 거기에 무소속 후보에게 표를 던져 이승만의 지지자는 3분의 1에도 못 미치게 되었다. 당시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거하는 간선제였으므로 2년 후에는 이승만이 끝나게 된 것이다.
당황한 미제와 이승만은 살 길을 찾았으나 그 길은 전쟁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침 미제는 전후 호경기가 끝나고 불황에 빠져 허덕이고 있던 중이라 그들도 불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38선에서 항시 충돌이 있었으며 그것은 전투가 대대전투규모로 더러 연대전투규모로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이 충돌이 더 규모가 커지면 바로 전면전쟁으로 되는 것이다.
1950년 6월에 들어서자 늘 있던 충돌의 규모가 예사롭지 않았고, 소련・중국의 포위망 구축을 제안했던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 날아오고, 워싱턴, 토오쿄오, 서울이 서로 오고가며 한참 바쁘더니 마침내 1950년 6월 25일에 38선에서 전면전쟁으로 발전된 것이 6.25전쟁인 것이다. 이리하여 이승만은 살아났다.
이승만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미제의 비호 아래에 그를 반대하는 세력을 모조리 공산당으로 몰아 학살을 했다. 이미 사상전향을 한 「보도연맹」 회원까지 쓸어 넣어서 산골짜기에, 바다에, 광산 폐광에 죽여 처넣었다. 약 30만 명이나 되는 대학살이었다고 한다. 이런 대학살은 우리 역사에는 물론 없었고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물다.
그리고는 공포정치를 폈다. 그의 공포정치의 하수인으로 극히 유명한 자들로 특무대장 김창룡, 백골부대장 김종원, 헌병사령관 원용덕이 있었다. 이승만의 주장에 반대하는 자들은 모조리 공산주의자로 몰아 감옥에 처넣고 죽였다. 이승만은 헌법도 협잡 날치기로 개정하여 간선제을 직선제로 고치고 나중에는 종신 출마제로 뜯어고쳤다.
사회는 실업자로 넘쳐났고, 무슨 토지개혁이라면서 지주에게는 지가증권을 주어 그것으로 자본가로 변신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농민에게는 분배받은 토지의 농지세라고 하면서 거두어들였다. 이러한 토지개혁은 농업경영을 영세화시켰고 그 결과 엄청난 절량농민을 발생시켜 살길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도시는 판자촌과 사창굴로 화하고 말았다.
전쟁을 부추겨 동족상잔을 일으켰던 미제는 얼마 안 되는 구호물자를 풀어 나누어주고 후안무치하게도 그들이 무슨 구호의 천사인 양 했다. 이들로부터 구호물자와 원조물자를 받아 이를 판 돈으로 대충자금이라 하여 예속정권의 유지비용으로 썼고 미제의 식민지 통치자금으로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승만 정권의 사회는 일제 해방의 의의인 민족해방 민주주의혁명을 완전히 봉쇄해버린 봉건적 토지소유가 그대로 온존된 사회이였고, 그 정권은 미제의 신식민지 예속정권으로서 군사통수권마저 갖다 바친 예속정권이다. 그 사회는 일제 식민지체제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식민지반봉건사회였던 것이다.
끝으로
일단 이야기를 여기에서 마무리하고 이승만 정권의 창출과 나라의 분단, 우리 현대사로서의 미제의 신식미지체제의 정착과정을 이야기함으로써 이남 사회의 현대사의 시작을 대강 그려보았다.
분단으로 시작된 우리의 현대사는 필연적으로 통일의 현대사도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의 현대사, 굴곡되고 식민지통치로 오욕에 찬 역사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해방운동으로서의 긍지도 함께 가질 수 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수탈과 압제의 세상에서 가장 보람 있는 삶은 그에 반대해서 투쟁하는 삶이고, 그런 삶에서 얻은 만신창이로 당한 상처마저도, 때로는 죽음마저도 그보다 더한 영광은 없는 것이다.
(2009년 5월 2일)
(월간 말 2009년 6월호에 게재)
2009년 5월 16일 토요일
주체사상이란 무엇인가
[이 글은 2003년 5월에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에서 특별강의 초청을 받아 강의한 내용입니다. 거기에는 공안검사, 공안경찰간부, 군 기무사령부 요원들이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은 이 강의를 거절하려고도 생각했지만, 그들이 주체사상을 반공강연식으로 알고만 있지는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자 이들에게도 이북 동포들의 사상을 바로 알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강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강의하고 난 후 질의응답에서 진실을 담아 강의해준데 대하여 감사하다는 말을 들었고 특히 고난을 그처럼 겪고서도 자기 뜻을 당당하게 펼치시는 데에 존경한다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저는 이 강의에서 외세가 개입하지 않고 우리민족끼리라면 어느 누구와도 통일문제를 가슴을 열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으로 뜻밖에 좋은 분위기였습니다. ]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의 요청으로 이북의 주체사상을 강의하기 위하여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주체사상은 이북 사람들이 그들의 사회주의건설과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한 활동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사회적 사상입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사람들을 불러일으키는 동기유발의 근저에는 개인적 이익의 창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일신의 이익이 다른 사람의 이익과 상충하지 않도록 사회적 도덕관념과 사회제도 그리고 법률제도로 담보되고 옹호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동기유발의 근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근면성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이북은 사회주의제도가 수립되고 있고 그것이 전인미답의 새로운 제도로 계속 새로이 창조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사회는 “하나는 만인을 위해, 만인은 하나를 위해” 활동하는 집단주의적 동기유발이 그 근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도 자본주의사회에서도 공동체의식이 있듯이 개인적 동기유발도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 남보다 생산의 성과에 대한 물질적 정신적 담보도 있습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관통되고 있는 동기유발인 개인주의적 이익이 자연발생적라면 이북사회의 사회주의사회는 사상교육에 의한 집단주의적 이익을 앞세우는 의식화된 목적의식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북의 사상이 바로 주체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주체사상은 김일성 주석이 항일혁명의 시기 1930년 6월 30일 카륜에서 새로운 세대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의 모임을 가지고 거기에서 항일혁명의 의의와 그 전략전술을 담은 「조선혁명의 진로」에서 주체의 혁명로선의 창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북 사회는 김일성 주석의 주체의 혁명로선인 항일혁명의 전통을 이어받고 그것을 구현 발전시키고 있는 사회입니다. 그 후 이북 공화국의 창건과 인민민주주의혁명도, 전후복구도, 사회주의경제건설의 시작인 천리마운동도, 자주국방로선도,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이후 엄중한 경제봉쇄와 자연재해를 극복해낸 「고난의 행군정신」도, 미사일을 만들어 미국에 대해 큰소리를 치고 있는 것도 모두 김일성 주석이 창시한 주체의 혁명로선과 이를 계승발전시킨 김정일 총서기의 「주체사상」을 그 사상의식의 기초로 하고 있는 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거의 80년의 세월 동안이나 창조해온 주체사상의 이론을 단지 한 두 시간으로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학생들을 위하여 6.15공동선언의 정신에 따라 이북 사회를 대결의 상대가 아니라 앞으로 더불어 살아야 할 민족의 반쪽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삶에 사상적 기초를 이루고 있는 주체사상을 먼저 마음을 열고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경제와 문화를 교류하더라도 서로의 마음 속에 깊이 담고 있는 사상을 이해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지 않는다면 하나의 나라로 통일을 이루어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처럼 반백년만에 이루어진 민족화해와 통일의 정세를 귀중히 여기고 이북 동포들과 하루빨리 통일된 조국의 한품에 서로 안을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이북 동포들이 마음 속에 깊이 담고 있는 주체사상을 진정으로 이해하여 화해의 문을 열어야 서로 한자리에서 머리를 맞대고 자주적 평화통일의 방도를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1. 주체사상의 창시
주체사상은 김일성 주석이 1930년대에 백두산 일대에서 항일빨치산인 조선인민혁명군을 창설하고 아무런 후방도 없이 일제의 무기를 탈취하여 그 무기를 들고 전투를 승리적으로 이끌면서 싸워온 민족해방의 투쟁 속에서 창시한 것입니다.
당시 세계정세는 1차대전 직후 경제의 호경기가 계속되다가 공황의 나락으로 떨어져 세계적 혼란이 일어났고 제국주의는 그 불황을 파시즘체제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실제 독일에는 나치즘이,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 등장했으며 일본은 군국주의가 번성하여 대륙침략에 나섰습니다. 이리하여 세계는 다시 식민지재분할을 위한 세계전쟁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나라였던 러시아는 독일의 침략과 일본의 침략에서 벗어나려는 데에만 바빠서 작은 나라 민족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다른 제국주의 나라인 미국, 영국, 프랑스도 그들의 식민지를 간수하는 데에 관심을 두었기에 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군국주의의 야수적 만행과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제의 야만적인 통치를 들어 이야기할 처지가 못되었습니다.
중국도 내전에 휘말리고 있었으며 민족해방의 후원을 내걸고 있는 중국공산당조차도 나라없는 조선민족의 해방투쟁을 자기네 나라의 혁명에 이용만 했지 진정으로 힘이 되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 결과 민생단 사건을 빌미로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희생되었고 국제공산당의 지령이라면서 동북의 조․중 민중의 동북항일연군을 열하성으로 이동하는 전략으로 조․중 민중의 부대에 들어 있던 조선혁명가들이 일제의 추격군과의 전투에서 수없이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열하원정’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시기에 김일성 주석이 조선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을 구의 주위에 모아 1926년 10월 17일 화성의숙의 벗들과 함께 「타도제국주의동맹」을 조직하고 앞으로의 조선혁명을 위하여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길림의 육문중학교로 옮긴 김일성 주석은 조선혁명의 주력군인 청년학생들을 조직하기 위하여 다시 1928년 8월 28일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1930년 6월 30일 카륜에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의 회의를 개최하고, 조선혁명은 일제를 무력으로 타도하고 조국을 광복할 전략과 전술을 내와서 조선인민에 의거하여 조선인민의 재주와 조선인민의 힘으로 조국을 광복할 주체의 혁명로선을 담은 보고 「조선혁명의 진로」를 발표하고 토론에 붙였습니다. 「조선혁명의 진로」에서, 주체의 혁명조직의 건설과 항일무장투쟁의 방침을 제시했습니다. 세상은 이 회의를 주체사상의 창시로 정하고 있습니다.
「카륜회의」가 끝난 다음날 1930년 7월 3일 「카륜회의」의 방침에 따라 첫 주체형의 당조직인 「건설동지사」를 내왔습니다. 이는 나중에 「조선인민혁명군당중앙위원회」으로 개편되어 조선혁명의 당중앙으로 되었습니다.
이처럼 엄중한 정세를 맞은 김일성 주석은 백두산 수림 속에 밀영을 묻고 일제의 백만 관동군과 위만군에게 무리죽음을 안기면서 전투를 승리적으로 인도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이러한 조국해방의 전투와 혁명투쟁 가운데서 나라의 광복과 혁명은 민중에게 철저히 의지하고 조직동원된 자기 나라의 민중의 힘으로 이루어낼 수 있다는 주체사상의 구체적 원리를 찾아냈던 것입니다.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려고 일어난 민중의 힘은 제국주의의 어떤 힘도 이겨낼 수 있다는 사상을 동지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세계를 변혁하는 힘은 바로 자주성을 지키려는 사상의식으로 단결되고 마를 줄 모르는 민중의 창조적 역량에 의지해야 하고, 이러한 민중의 힘에 의지할 때 어떠한 곤란도 넘길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다는 신심을 동지들에게 안겨주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창시한 이러한 주체사상은 그의 후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철학적으로 체계화하여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사상의 근본원리로 정식화했습니다.
이 주체사상으로 영도되고 일심동체로 단결된 민중의 힘으로 이북 공화국을 창건하고 ‘근로민중을 위하여 근로민중에게 의지하여 근로민중의 힘으로’ 새 나라를 건설했습니다. 그 일천한 나라가 미제와 그 추종국가 16개 나라의 군대를 막아내고 이북 나라를 지켰습니다.
전후 복구와 건설에서 천리마의 기세로 나라를 튼튼히 세웠습니다. 그리고 미제의 어떠할 도발도 제때에 대응하고 자주성을 지킨다는 원칙으로 일관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냈습니다. 푸에블로호 사건만 하더라도 영해에 침범해 들어온 미제의 정보함을 즉시 나포하고 일촉즉발의 전쟁 위협을 의연히 이겨내고 미제의 사과를 기어이 받아냈습니다. 그 후 판문점 충돌 사건, 헬리곱터 침입 사건 등 미제의 도발은 제때에 자주성을 지킨다는 원칙에 튼튼히 서서 민족의 존엄성을 지켜냈습니다.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가 무너져 이북이 경제적으로 고립되고 엄청난 홍수와 가뭄으로 식량이 떨어져 이북이 곧 망한다고 언론미디어가 난리를 칠 때 미제와 그를 추종하는 온 세계의 제국주의 나라들은 이북을 봉쇄하고 핵문제를 내걸어 숨통을 졸랐으나 그 난관을 김일성 주석의 항일유격전 시대의 ‘고난의 천리행군’을 상기하고 ‘고난의 행군’을 구호로 내걸고 이겨냈습니다. 마침내 자체의 힘으로 과학기술을 개발하여 자체의 자재와 기술로 인공위성을 지구 궤도에 올려놓아 민족의 무한한 힘을 과시했으며 그들은 ‘조선이 없으면 지구도 없다’고 큰소리로 외치고 “세계의 어느 누구도 감히 우리를 넘볼 수 없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1년에 들어서자 ‘고난의 행군시기’를 끝내고 ‘강성대국’이 길에 들어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힘의 바탕에는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된 이북 민중이 있고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 주체사상의 체계화 과정
백두산 밀림을 배경으로 해서 일제와 백전백승의 해방투쟁의 전투 속에서 주체사상을 창시한 김일성 주석은 조국의 해방을 맞이하여 이북으로 개선하고 이북의 공화국을 건설했습니다. 조국광복회를 조직하면서 그 핵심으로 당을 건설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 준비 밑에서 국내의 반일애국역량을 포섭하여 북조선 공산당을 조직하였습니다.
조선에는 1920년대에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였으나 여러 종파분자들과 야심가들이 스며들어 당을 지켜내지 못하고 여러 차례의 검거로 명맥조차 볼 수 없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일제에 투항하여 앞잡이로 전락한 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해방을 맞아 자기의 과거를 숨기고 당에 스며들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지도로 건설된 당은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는 일을 가장 먼저 앞세우는 새로운 형태의 주체형의 당입니다. 그것은 나라의 근로민중을 주인으로 하고 근로민중이 모든 것을 결정하며 김일성 장군을 수령으로 하고 수령의 뜻에 따라 일심동체로 단결된 당입니다. 그것은 김일성 주석이 항일유격전 속에서 전혀 새롭게 창시한, 모든 것을 민중을 위하고 민중에게 헌신하여 민중을 유격군의 중심으로 튼튼히 묶어세우고 민중의 무한한 창조성에 따라 민중이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이끌어 주는 ‘군중로선’을 관철하는 주체형의 당입니다.
물론 백두밀림에서 단련된 항일빨치산들은 일제와의 혈전에서 새로운 주체형의 당을 건설하고 수령을 모시고 수령의 뜻에 따라 당을 건설해나갔지만 국내에 있었던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당에 대해 낯설었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김일성 주석의 새로운 형태의 당을 지지하고 옹호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이남에서 미제의 새로운 식민지통치와 3년동안이나 벌렸던 침략전쟁으로 조성된 엄중한 정세를 틈타서 일제에 투항했던 반당분자와 이들과 이러저러한 친소관계로 이루어진 종파분자들이 당을 파괴하고 그들의 야심을 이루려는 반역행위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 맑스=레닌주의를 교조적으로 해석하여 조선혁명을 다른 나라에 의지하거나 그들이 한 대로 따라해야 한다는 사상적 사대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나라의 자립적 경제건설 정책을 비난하고 ‘기계는 선진 사회주의 나라의 것을 쓰고 소비재생산에 주력해야 한다’고 하면서 ‘기계에서 밥이 나오나 옷이 나오나’라면서 공공연히 비난하고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종파를 만들어 정부를 뒤집어엎으려고 획책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이러한 모든 종파분자들과 사대주의에 대하여 투쟁을 전개하여 당을 주체형의 당으로 지켜나가도록 영도했습니다. 그 결과 1956년 8월 당의 전원회의에서 종파분자와 사대주의지와의 투쟁을 보고하고 수정주의 종파분자들을 완전히 청산했다고 보고했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중국에서 일어난 이른바 문화혁명과 중소분쟁에서도 이북은 나라의 자주성을 지켜나갔습니다. 그들은 자기식대로 혁명을 하지 않는다고 이북을 비난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일성 주석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힌 말은 주체사상의 진수를 담고있는 유명한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들이 의자를 만들어놓고 서로 자기 의자에 앉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의자는 결코 우리 몸에 맞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앉을 의자는 우리 몸에 맞도록 우리가 스스로 만들 것입니다.”
종파분자와 사대주의를 청산한 이북의 당은 백두밀림 속에서 일제와의 조국해방전쟁에서 창조된 주체사상을 유일사상체계로 하고 이북을 주체사상 이외에는 어떤 사상도 먹어들 수 없는 나라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3대혁명을 기치로 내걸었습니다.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회는 인류가 전혀 밟아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며 사회주의적 사상의식으로 의식화된 사람들이 창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회주의사회 창조하는 데에 결코 자본주의 세계에서 길들여진 사람들이 만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제도를 엎어버리는 사회혁명이 일어난 다음에는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혁명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사회주의를 창조하는 사람으로 되어야 한다는 사상혁명이 일어나 사회주의적 사람으로 개조되어야 하고, 둘째 사회주의의 물질적 조건을 이루어내기 위해 생산력을 높여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을 위해 기술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셋째 사회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수준높은 새로운 사회주의적 문화를 창조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문화혁명이라는 것입니다. 사회혁명에 이어 사회주의사회를 창조하는 계속혁명은 이러한 세 가지의 혁명, 즉 3대혁명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김정일 총비서는 김일성 주석이 창시한 주체사상으로 이북의 민중을 정열적으로 지도하면서 그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했고, 이 내용을 담아 하나로 관철된 철학적 체계로 정식화했습니다. 그 결과를 1982년 3월 31일 김일성 주석의 탄생 70돐을 축하하는 「주체사상국제학술대회」에「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내어놓았습니다. 이 논문은 주체사상의 철학적 체계로서 고전적 문헌입니다.
3.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
주체사상은 철학의 근본문제를 인간의 운명문제에 두고 있습니다. 인간의 운명문제에다 철학의 근본문제를 둠으로써 주체사상은 인간중심의 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이 세계관을 주는 학문이라는 본성으로부터 철학은 바로 인간의 운명문제를 해결하는 바른 견해를 줄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사명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정일 총비서는 주체사상의 사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철학적 세계관의 근본사명은 인간의 운명개척의 길을 밝혀 주는 데에 있습니다.”
지난 시기의 맑스=레닌주의 철학은, 인간이 세계를 변혁하는 투쟁에서 그 승리를 과학적으로 보장하는 이론을 정립하는 데에서 세계의 본질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 철학은 세계의 존재문제를, 즉 물질=존재가 일차적이고 의식=사유가 부차적이라는 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내세웠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세계의 운동발전의 법칙을 밝히는 존재론을 구성하고 인식의 본질과 그 과정의 합법칙성을 밝히는 인식론을 구성하여 과학적 철학사상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문제에 대해서는 그러한 존재론과 인식론에 종속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도 세계의 한 존재로만 규정되고, 인간의 운명은 무엇에 의하여 규정되는가, 인간의 운명을 규정하는 궁극적 원리를 인식할 수 있는가 없는가 라는 문제를 존재론과 인식론으로 논의하는 데에 머물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맑스=레닌주의 철학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으로 세계를 해석함으로써 자연과 사회 그리고 사유의 발전에서 가장 보편적인 합법칙성을 밝혀주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인간의 운명문제에서 신비주의적, 숙명론적 운명관을 걷어내게 되었고 그 문제를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리하여 철학의 근본사명으로서의 운명문제에 올바른 해답을 줄 수 있는 전제를 마련해 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철학에서 인간의 운명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주려면 인간의 운명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삼아야 하고 그 해답도 내와야 합니다. 그래야 운명개척의 합법칙성을 밝혀낼 수 있고 그 방도를 찾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주체사상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입니다.
주체사상에서는 인간의 운명을 개척하는 데에 영향을 주는 것은 객관세계와 인간 자신이라고 봅니다.
객관세계는 인간이 살며 활동하는 시공간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환경과 여건입니다. 그러므로 객관세계는 인간의 운명개척에 크게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을 개척하는 담당자는 또한 바로 인간 자신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무엇인가, 그 본질적 특성은 어떤 것인가를 밝혀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김정일 총비서는, 사람은 그 본질적 특성으로 첫째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자주성을 가지고 있고, 둘째 사람은 객관세계에 존재하는 합법칙성을 인식하고 이것에 근거해서 객관세계를 개조변혁하면서 문화와 역사를 창조하는 창조성을 가지고 있으며, 셋째 인간의 개조변혁활동은 목적의식적이며, 사상의식적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의지, 즉 의식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바로 그 본질적 특성으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지고 있는 사회적 존재라고 정식화했습니다.
맑스=레닌주의 철학의 한계에서 인간의 운명문제를 사회적 존재라는 존재론과 객관세계와의 관계에서 인식론에만 머물고 만다면 인간을 단순히 최고로 발달한 뇌수와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단순한 물질세계의 한 부분으로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변혁에 대한 설명은 존재의 본질과 그 운동과정 자체의 해설이라는 한계를 넘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을 존재로서 사회적 존재로만 보는 데에 머물지 않고, 거기에다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밝혀냄으로써 객관세계에 대하여 오직 사람만이 그 주체로 존재하고, 따라서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이 해명되며, 마침내 인간을 세계의 주인으로, 세계의 지배자로, 개조자로 내세워지는 것입니다.
김일성 주석이 창시하고 김정일 총비서가 심화 발전시켜 철학적 이론으로 정식화한 주체사상은 이와 같이 철학의 문제를 보는 데에서부터 맑스=레닌주의 철학과 달리 철학의 문제를 인간의 운명문제로 보았으며 그것을 밝혀내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모든 것을 결정한다”라는 근본원리를 정립했던 것입니다.
이는 인류사상에서 처음으로 사람의 세계에 대한 지위를 과학적으로 해명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체사상은 어떤 사람들이 더러 말하는 맑스=레닌주의 철학의 계승발전이 아니라 21세기의 자주의 시대를 선포하는 새로이 창조된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사회역사관
주체사상에서 사회역사관이라 함은 사회역사의 주체를 보는 관점을 말합니다.
김정일 총비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연은 인간의 노동대상이고 인간생활의 물질적 원천이며 사회는 사람들이 생활하고 활동하는 집단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사람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사람들 사이에 일정한 관계를 가진 객관세계에서 자연세계와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사회는 객관세계의 특수한 영역으로서 세계에 대해서 자주성을 구현하는 사람이 존재함으로써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회에서 물질적 부와 정신적 부를 창조하고 활용하면서 생활하고 활동합니다. 사람들이 생활하고 활동하는 데는 일정한 규정이 있고 이 규정에 따라 사회적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이 사회적 관계로 하여금 공동의 이해관계가 생겨나고 이를 토대로 단결하고 협조하며, 또 서로 다른 이해관계 때문에 대립도 하고 투쟁도 합니다.
사람들은 공동의 이해관계를 실현하기 위하여 자기의 이해를 자각하고 표현하며 그 요구에 맞게 목적의식적으로 활동합니다. 이러한 공동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그 실현을 위해 목적의식적으로 활동하게 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의지가 사상의식, 즉 사회적 사상입니다. 사회적 관계는 이러한 사회적 사상에 요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사회생활과 사회활동이 집단적인 것만큼 사회적 관계는 일정한 형식을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적 관계의 형식과 내용에 따라 사회의 성격이 다르게 되고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공고한 제도도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는 일정한 제도를 가진 데에서 머물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단히 상승하고 발전합니다. 사회가 상승발전한다는 것은 사회제도가 새로운 사회제도로 교체되는 것을 말합니다.
주체사상에서는 사회의 상승발전, 즉 사회제도의 교체는 사회의 주인인 사람의 자주성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원시사회로부터 노예제사회, 봉건제사회, 자본제사회로 발전해온 인류의 역사는 예속에서 벗어나 사회의 주인으로 살려는 사람이 가진 본질적 특성인 자주성을 구현하려는 자주적 요구에 기초된 것입니다. 이것이 주체사상의 사회역사관입니다.
주체사상은 사회역사의 주체가 민중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해명한 사회역사관을 토대로 하는 사상의 이론적 체계를 가진 철학입니다.
사회역사의 주체로 민중을 내세운 주체사상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자주성을 구현하기 위한 운동을 내세웁니다. 그것은 ‘사람이 세계의 주인이고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원리에 따라 전개하는 운동입니다. 그것은 바로 객관세계를 사람의 요구에 맞게 개조변혁하는 운동입니다. 자연에 대해서는 자연개조, 사회에 대해서는 사회개조, 사람에 대해서는 세계의 주인으로 의식화된 새로운 자주시대의 사람으로 되는 인간개조의 운동입니다. 이러한 변혁운동이 사회혁명, 과학기술혁명, 인간혁명이라는 3대혁명이라는 것입니다.
5. 영도예술
맑스주의 철학에서 필연성과 우연성의 범주를 놓고 수령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맑스-레닌주의 철학에서는 객관적 필연성이 제기되면 수령은 나오게 되고, 누가 수령이 되는가라는 문제는 우연적인 것이라 했습니다. 심지어 맑스가 19세기 노동계급의 수령이 된 것은 우연적이고, 객관적 필연성이 제기되면 맑스가 없어도 다른 디츠겐이나 모르간이 수령으로 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역사는 영웅을 내지만 영웅이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면서 주장했습니다. 즉 역사에서 제기되는 혁명의 필연성과 거기에서 혁명을 지도하는 한 특정한 개인으로서의 수령이라는 우연성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로써 설명하고 있습니다.
맑스=레닌주의 이론에서는 착취와 억압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저항이 있게 되고 그 저항운동은 궁극적으로 사회혁명으로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이 저항운동을 혁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그 사회혁명의 전위계급인 노동계급의 지도로 다른 계급계층과 동맹해서, 특히 농민과 동맹해서 강성한 역량으로 착취계급을 압도함으로써 사회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했습니다. 혁명의 역량을 조직화하기 위하여 혁명의 사령부인 당이 노동계급의 지도로 조직되고 당의 지도에 의해 다른 계급계층을 하나로 묶어 혁명대열에 서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지도자로서의 수령은 그 조직에서 특출한 능력을 가진 자로서 나오게 되고 그의 능력의 발휘로 힘있게 전진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혁명은 객관적 필연성에 의해 제기되고 그렇게 되면 수령은 나온다는 것입니다. 혁명에서 수령이 나온다는 것은 필연성이지만 어떤 개인이 혁명에서 지도자로 된다는 것은 그러한 필연성에 대해 우연성이라고 했습니다.
주체사상에서는 민중이 역사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언제나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하는 역사의 자주적 주체로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민중이 조직되고 사상적으로 결속되어야만 역사와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수령이 사상의지의 결속, 변혁조직의 결집의 구심점으로 있어 민중과 수령이 운명 개척의 공동체를 이루었을 때만이 민중이 역사의 참다운 주체, 즉 자주적 주체로 된다는 것입니다. 즉 수령은 역사의 자주적 주체의 내적 구조로서 보아야 하고 수령, 당, 민중으로 구성된 역사의 자주적 주체의 중추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볼 때 수령은 주체의 중추, 즉 뇌수이고 당은 심장이며 중추의 의지에 따라 맥박쳐서 생명체의 구석구석 빠짐이 없이 생명의 피를 보내줌으로써 민중이라는 주체가 비로소 세계를 개조변혁하는 운동의 통일체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체사상의 수령론은 간고한 항일투쟁 속에서 창조된 것입니다. 수령이 주체의 의지를 사상의식적으로 담보하고 생명체로서의 민중의 고통과 원망을 구석구석 깊이 알고 있으며 그 고통을 함께 겪고 민중과 일심동체로 살면서 창조해낸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가정에서 어버이가 자식들이 말하기에 앞서 그리고 자식들의 요구에 앞서 이미 그것을 알고 어루만져주며 자식들은 어버이의 바램을 위해 효성을 다하듯이, 주체사상은 나라를 하나의 대가정으로 보고 수령이 어버이로서 인덕정치를 펴며 당과 민중이 함께 어버이의 뜻을 따라 효성을 다하는 대가정을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6. 주체사상의 나라로서의 이북
김일성 주석이 영도하고 김정일 총비서의 지도에 의해 주체사상이 관철되고 있는 주체사상의 이북 공화국은 어떤 나라인가, 그것은 김정일 총비서가 주체사상의 고전적 문헌「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은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상에서 주체를 세우는 것은 자주성을 위한 인민대중의 혁명투쟁에서 나서는 선차적인 요구입니다. 혁명과 건설은 사람들의 의식적인 활동인 것만큼 사상에서 주체를 세워야 정치, 경제, 국방 등 모든 분야에서 주체를 세울 수 있습니다.”
사상에서 주체
이북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사상에서 자기 나라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며 실천합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를 스스로의 지혜와 힘으로 풀어나가는 관점과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령과 당이 노선과 정책을 내어놓으면 그것을 스스로의 일로 해서 적극성을 발휘해서 실천합니다. 이것은 주체사상을 온 나라에 유일사상체계로 확고히 서있고 민중이 그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민중이 수령을 따르고 당의 정책을 유일사상체계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상으로 무장되고 수령과 당의 영도에 따라 미국과의 전쟁에서 완전히 잿더미로 된 나라를 복구하고 더 잘 건설했고 나라가 민중생활을 완전히 담보하여 책임을 지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생산에서 혁명에서 나서는 문제는 당의 노선인 군중로선에 따라 정책이 결정되기 때문에 민중이 그 정책을 스스로의 지혜로 세웠고 잘 이해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의 군중로선은 당의 지도가 대중 위에 군림하지 않고 민중의 절실한 문제를 민중이 스스로의 지혜로 방도를 찾고 스스로의 힘을 조직하여 과업과 분공을 정하고 달려들며 당이 하는 일은 그 과업을 시종일관 책임적으로 방조하는 자리에서 일을 합니다.
이러한 군중로선에 의한 전형으로서 사회주의 농촌경리의「청산리정신」과「청산리사업방법」이 있고, 사회주의적 생산의 현장에 적용되고 있는「대안의 사업체계」가 있습니다. 이 군중로선으로 이북 사람들은 집단주의적 도덕을 덕목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새로운 사회주의적 애국심을 낳게 했습니다.
정치에서 자주
이북 사회의 정치제도를 보면 다른 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 제도와 여러 기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북의 정치는 남의 제도를 따르거나 남의 지휘봉에 따라 움직이는 일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정치에서 기본은 정책을 규정하고 집행하는 것입니다. 주체사상은 이북의 모든 노선과 정책을 자주적으로 규정하고 집행합니다. 결코 남이 해놓은 일을 흉내내지 않고 독창적인 방법으로 노선과 정책을 규정합니다.
정치에서 자주성은 대외관계에서 나타납니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전쟁도발에 대해서 이북은 한번도 자주성을 굽힌 일은 없습니다. 전쟁의 바로 코앞에 와 있어도 의연히 ‘전쟁에는 전쟁으로’라고 나라의 존엄을 지켰으며 ‘협상에는 협상으로’라고 하면서 나라의 평화를 지켰습니다.
경제에서 자립
이북 사회는 경제에서 자립의 원칙을 견지하고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자립적 민족경제가 있어야 나라의 독립을 튼튼히 할 수 있고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자주, 국방에서 자위를 확고히 보장할 수 있고 민중에게 풍요로운 물질문화적 생활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제국주의 나라들의 그 혹독한 경제봉쇄 속에서 엄청난 자연재해로 식량이 동이 난 상황에서도 나라의 독립을 지켜냈고 미국의 핵공갈 속에서도 의연히 맞서나갈 수 있는 것은 자립적 경제의 토대가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북이 지난 시대 소련의 대국주의에 굴복해서 이른바 사회주의 나라들 사이의 분업이라는「코메콘」에 들어가 경제를 남의 나라에 의존했더라면 이북의 공화국은 그 존재가 지금쯤 의심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기 나라의 자원에 튼튼히 의존해서 자기 민중의 창조력에 의하여 물질기술적 토대를 이루었기에 미제의 경제봉쇄를 이겨낼 수 있었고 미제의 핵공갈에 의연히 군사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인공위성을 지구 궤도 위에 올려놓아 미제의 핵공갈을 물리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국방에서 자위
감일성 주석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바라지 않지만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제국주의자들 앞에서 평화를 구걸하지도 않습니다. 민족적 독립과 평화를 고수하고 혁명위업의 승리를 이루어가기 위한 가장 옳은 길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전쟁에 해방전쟁으로 맞서고 반동들의 반혁명적 폭력에는 혁명적 폭력으로 맞서며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전쟁책동에 언제나 준비있게 대처해나가는 것입니다.”
김일성 주석의 이와 같은 가르침에 따라 당은 자위적 군사로선으로 4대군사로선을 세웠고 민중은 그 군사로선을 완수해나가는 데에 떨쳐나섰습니다. 즉, 전인민의 무장화, 전군의 간부화, 전국의 요쇄화, 무장의 현대화입니다. 이제 어떤 제국주의 나라도 이북 공화국에 대해 전쟁으로 공갈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디 전쟁을 도발하면 우리 반도에서만 전쟁터로 되겠습니까. 그들의 국토도 잿더미로 될 것입니다. 그래 마침내 ‘조선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라고 그들은 큰 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문화에서 민족성
이북 사회의 문화는 사상에서 주체를 세우는 데에 민족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김정일 총비서는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상에서 주체를 세우기 위하여서는 민족문화를 발전시키고 대중의 문화기술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민족적 형식에 혁명적, 사회주의적 내용을 가진 문화, 자기인민의 감정에 맞고 노동계급적 선이 선 주체적인 문화를 건설하여야 사람들의 사상정신생활을 건전하게 할 수 있으며 사상에서 주체를 더 잘 세울 수 있습니다.”
평양 시내에 세워진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민족적 형식을 가진 현대적 건물은 이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음악에서도 다양한 민족악기를 현대화해서 그들 악기를 교향곡에 도입하여 민족적 정서가 풍기는 현대음악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연극과 가극에서는 집단주의를 발휘해서 규모가 큰 집체적 작품을 특색있게 만들어내고 있으며 문학적 작품과 예술적 작품에서도 집체적 작품이 많습니다.
김정일 총비서는「종자리론」이라는 주체적 사회주의 예술이론을 창조하여 이북 예술창조에서 형식과 내용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예술작품의 사실적 전형을 혁명과 건설의 현장에서 그 종자를 찾고 예술적 형상으로 구성한다는 것입니다.「역사의 대하」와 같이 지난 1994년의 전쟁 직전에 이른 조미간의 외교전쟁과 이에 대한 미제의 침략에 대한 단호한 군사적 대처라는 엄중한 정세 속에서 수령과 지도자 그리고 외교 일꾼과 작전지휘관, 병사들, 민중들에서 예술형상의 종자를 찾아 구성한 이 작품은 이북 예술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우리 민족의 역사의 뿌리를 밝히기 위해서 단군릉을 발굴하여 외세의 문화와 사대주의에 의하여 전설 속에 파묻힌 민족의 위대한 근원을 밝혀 주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주체사상은 학술적 사업에서도 철저히 관철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북 사회는 김일성 주석이 창시하고 김정일 총비서가 심화발전시킨 주체사상이 온 사회에 관철되어 인류역사에서 처음으로 사람의 자주성을 가장 중히 여기는 나라로 되고 있습니다.
7. 끝으로
이북 사람들의 사상은 같은 한 겨레의 사상이며 그 사상으로 하여금 미제의 핵위협 속에서 숨통을 조이는 봉쇄 속에서 자립적 민족경제의 토대를 세웠습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이북의 붕괴는 시간문제라고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혹독한 전쟁위협 속에서 그 엄청난 자연재해 속에서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 세계 어느 나라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고 당당히 이겨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장기인 끈기와 주체사상으로 무장되고 수령을 중추로 하고 당을 심장으로 하여 일심동체로 단결한 이북 동포들의 승리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핵공갈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북도 마주 핵을 들고나와 상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핵공갈이 먹어 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핵무기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 기능이 그 성능이 어떻든 그 파괴력이 어떻든 서로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내고 만다는 절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미사일도 가지고 있어서 이제는 전쟁을 우리 땅에서만 할 수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힘 자랑을 하고 뽐내지만 그들의 목통에는 이북 사람들이 허리끈을 조이고 장만한 비수가 겨누어지고 있습니다.
세상도 많이 변했습니다.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있습니다만 전에는 이북을 말할 때는 꼭 욕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6.15 공동선언의 결과입니다. 이남과 이북의 최고위 두 분이 우리들에게 큰 선물을 주었습니다.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6.15공동선언에서 우리의 분단문제는 사상의 문제, 즉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상도 다를 수 있고 정치적 신조도 다를 수 있으며 종교적 신앙도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이라는 데에서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통일은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가면 우리 후대들이 제도와 사상을 하나로 아우르는 데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 대에 6.15공동선언에 따라 하나의 나라, 우리민족만이 가지는 특수한 형태의 민족국가를 창조해내어야 합니다.
문익환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선은 바로 통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6.15 남북공동선언을 반드시 실천되도록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래서 민족의 가장 큰 선을 이루어내도록 합시다.
(2003. 5. 17)
손자놈과 싸우는 재미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라면 이처럼 쉽게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에게
그 사이 잘 지냈는가.
오늘 보낸 편지 확인하다가 아주 옛날에 ○에게 보낸 메일이 4월 16일에야 확인이 되던구나. 나도 그 사이 메일을 자주 못 보내었고 경아의 소식도 뜸해졌고....
얼마 전에 어머니 모시고 여행도 다녀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 후로는 어떤지 궁금하구만.
요즘 나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고 책도 열심히 보고 젊은 청년들과 자주 만나 이야기하는 재미로 지내지.
이제 봄도 오고 기후도 좋아 심장부담은 덜 하지만 늙은 몸이 계절에 잘 맞추지 못해 신경통과 이유없이 고단함은 해마다 더한 것 같애.
그래도 가장 재미있는 삶은 손자놈들과 노는 것이구먼. 며칠 전에 친손자, 외손자가 할배를 사이에 두고 질투와 시기로 싸우던 걸.
외손자놈은 지금 일곱살, 아직 학교에 들지는 못해도 유치원 다니면서 글을 알아서 책을 잘 읽어. 할배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재롱을 피우지. 그런데 이놈은 할배는 아주 무식하다고 치부하는 것 같애.
이놈이 제 에미에게 나를 두고 하는 말이
" 할배가 박사라는데 맞아?"
그리고는
" 박사라면서 탱크 조립도 잘 못하고 뭐 그래. 할아버지는 박사라도 똑똑 박사는 아닌가봐. 엄마, 할배, 엉터리 박사지?"
이런! 어굴할 데가 있나.
친손자놈은 지금 36개월이 막 넘은 어거지부리는 놈인데, 할배 것은 모두 "내 꺼야!" 한 마디로 빼앗아버리는 놈이야.
먼저번에 손전화기를 잃어버린지라 전화기를 달라고 억지를 부리기에,
" 안돼!"
나는 한 마디로 거절했는데 이놈은 그래도
" 전화기 냇!".
그래서 제 에미가 자기 것을 주며
" 여깄다."
라고 했더니 이놈은 손으로 밀어부치고 하는 말이
" 내맘에 드는 전화기 냇. 내마음에 드는 것, 내 꺼얏!"
하고선 뒤로 벌러덩 넘어지며,
" 내마음에 드는 것 내 꺼얏!"
하는 수 없이 전화기도 몰수당했지.
MP3 를 귀에 꽂고 총선 예측방송을 들으려고 했더니, 이놈이 이것마저
" 귀에 끼는 것, 이리 냇."
그래서 내가
" 이것도 네 맘에 드냐?"
" 응, 내맘에 들어, 내 꺼얏."
" 오냐, 이놈아 니 다햇."
요즘은 손자놈과 노는 것이 이놈들과 싸우는 거지. 그래도 이것 말고 세상에 더 재미있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얼마 전에 놈이 위태한 짓을 하기에 못하도록 붙들었더니 이놈이 화가 단단히 나서 내 얼굴에 손틉을 세워 할켜 자욱이 났겠다. 집에 돌아와 보니 껍질이 벗겨 피가 나더군.
다음날 이놈을 만나서
" 산아, 어제 네가 할배를 할켜서 피가 나잖아!"
하고 따졌더니, 이놈 대답이 걸작,
" 산이가 안 그랬쪄!"
어처구니없이 오리발이다.
그래서 계속 추궁했지만, 이놈의 능청에 손을 들고 말았다.
이놈이 나의 다른 쪽 뺨을 살짝 할키더니, 그쪽을 가리키면서
" 이건 산이가 했쪄."
그리곤 제가 어제 한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 이건 산이가 안했쪄."
" 그러면 누가 했어, 이놈아!"
이놈은 완전히 오리발이다.
" 할배, 그건 곰쥐가 했쪄!"
그리곤 제가 타고 있는 자동차를 발로 밀며 저쪽으로 달아나버린다.
" 허허... 이놈봐라."
그래도 한참 있더니 내 한테 안겨들어 상처를 만지면서
" 할배, 많이 아퍼? 산이가 호 해주까?"
" 호오 호오"
" 오냐, 이제 다 나았다."
이렇게 해서 화해가 이루어졌다.
어제 저녁부터 비가 오더니 지금은 비가 그치고 구름만 잔뜩 껴 있구나.
그럼 내내 건강하고 집안에 언제나 평화가 가득하기를
2009년 5월 13일 수요일
내 인생의 한 순간
다음 글은 2002년 4월인가, [사람과 사람]이라는 [국제민주연대]의 잡지에 게재한 글입니다. 컴퓨터에 보관한 파일을 정리하다가 눈에 띄어 다시 읽어 보았더니 박정희 유신체제의 반민주 반인권이 가슴 밑에서 분통이 되어 치어 오르기에 여기 블록에 게재합니다.
내 인생의 한 순간
나는 지금 일흔이 된 노인이다. 일흔 노인이라면 지금은 흔하지만 옛날에는 ‘인간칠십 고래희’라는 말이 있을 만큼 오래 산 것이다. 이제는 인생을 마감할 때가 다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지나온 인생길을 되돌아본다. 그러면 그 굽이굽이 지나온 길이 아득하게 떠오른다.
소년시기에 눈앞에서 조국이 분단되는 슬픔을 보고 이를 반대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온 몸을 바쳐 죽어간 동무들의 얼굴도 떠오르고, 그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 한때나마 평화로운 초등학교 교사시절 때 포도 알처럼 빛나는 어린 제자들의 눈동자도 떠오르며, 학문의 길에 들어서 연구논문을 가지고 은사 앞에서 동문과 세미나를 하던 흑판의 판서 소리, 인자한 스승의 온화한 미소, 후대에게 학문을 전수하던 강의실…, 모두 다 평화로운 한 때였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인 칠순의 시기에 든 지금의 나는 갈라진 민족을 아울러 조국을 통일하는 운동의 길에 들어서서 처절하게 반생을 겪은 변혁운동가의 모습이다.
그래서 사형선고도 받았고 무기징역을 두 번이나 살았으며 지금도 몸은 비록 감옥을 벗어나 있지만 그 사슬에 묶여있다. 이처럼 나의 인생은 전반과 후반이 전혀 사는 모습이 다르다.
나의 인생이 이처럼 급변하게 된 원인을 따지자면 나는 혁명가의 집안에서 자라나 나라없는 민족의 서러움을 유년시기부터 뼈저리게 맛보았으며 그로부터 해방된 기쁨은 더욱 컸고 다시 나라가 반동강나서 자주성 없는 겨레의 서러움을 당한 데에도 있지만, 학문연구와 그것을 후대에게 전승하는 교수의 자리에서 어느 날 갑자기 바로 그 날로 쫓겨나게 된 너무나 절박한 순간을 맞은 데로부터 시작된다.
1976년 2월 29일 대학에 출근해서 휴게실에서 차 한잔을 시키고 전화로 그 해 신설된 통계학과 수강신청 준비를 위해 교무과와 협의하고 나서 자리에 와 앉아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학교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는 경북 도경 정보과 형사가 내 앞자리에 앉아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얼굴을 들고서 의아한 눈을 하고서,
“어서 오세요. 차 한잔하시지요.”
“예, 좋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거저 아무 것도 아닌 얘깁니다만.”
“예, 말씀해보시지요.”
“선생님, 이번 교수 재임명의 일 말인데요.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 그 일 말입니까. 교수들도 그런 자극을 받아야 연구도 열심히 하고 교수에도 정성을 들일 거 아닙니까? 허허…”
“그런데 말입니다. 만일, 가상해선데 말입니다. 만일 선생님이 탈락된다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허, 나야 이처럼 열심히 안 삽니까? 전혀 그런 일을 생각해보지 안 해서 할 말이 없네요.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저 가상해서 한번 물어본 것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일어나,
“그럼 선생님, 또 뵙겠습니다.”
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무엇인지 모르게 암시의 그늘이 비치었다. 그래서 눈길을 딴 데로 돌려보았더니 선배교수 한 분과 눈이 마주쳤다.
평소와 같으면 나를 반갑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거나 나를 자기 곁에 오도록 손짓을 하던지 내 곁에 오시던지 하는 분이 오늘은 그답지 않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나는 일어나 그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 그의 곁에 가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지금 밖에 나간 형사가 나에게 좀 이상한 말을 하고 나갔습니다…”
나는 그 형사가 한 말을 그대로 이야기하면서
“선생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선배 교수는 한숨을 내쉬더니,
“그게 가상이 아닙니다.”
나는 할 말을 잊었다. 한참 그대로 앉아 있다가 나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연구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그러자 당시 캐나다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가 휴가를 맞아 한 학기 동안 우리교실에 나오고 있던 동기동문 친구가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 나를 끌어안더니,
“이 사람 용기를 잃지 말게. 나는 며칠 전에 알고 있었지만 참으로 자네에게 말하기가 어려웠네. 모진 바람은 언제나 부는 것은 아닐세. 휴가 받은 셈치고 우선 푹 쉬게나.”
진심으로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함께 대학 문을 나섰다. 그날은 둘이서 술을 흠뻑 취하도록 마셨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내에게 하기 어려운 말을 겨우 전하고 잠자리에 들어 골아 떨어졌다. 아마 그 동안 쌓인 피로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는 일종의 편안함이었을까.
다음날로 나는 배낭을 메고 산으로 들어갔다. 내가 혼자 잘 가던 내 고향 밀양 천황산이다. 정상에 올라 소년 때 여기에 와서 미국 침략자와 그 앞잡이로 들어선 친일역적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 나선 이제 가명조차도 아득히 잊어버린 동지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무덤도 없이 아마 이 산천에서 해방되는 날까지 떠돌고 있을 넋.
그리고 평화롭던 연구생활과 교수생활도 순간순간 사진첩처럼 펼쳐진다. 20년 가까운 그 세월이 펼쳐진다.
그 동안 많은 연구 성과도 올렸고 세계에 우리 민족의 수학 학문이 있음을 알렸다. 참으로 무지한 군사정권의 폭정이다. 상급과 훈장을 바라지도 않았지만 난데없이 추방이라니.
물론 나는 대학에 있으면서도 청년학생들의 민주주의와 조국통일운동에 동정적이었고 이들을 물심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 투쟁이 빗나가는 노선을 잡을 때 아낌없이 충고를 했고 이들이 어려운 일에 빠지면 나의 교수신분의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구해내기도 했다.
이런 것이 모두 ‘국가관 미확립’이란다. 분단된 민족의 지식인의 양심을 법으로 규제해서 감옥에 쳐넣지 못한 그들 독재는 ‘교수재임명’이라는 제도를 내세워 그 폭정의 수단으로 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지리산으로 갔다. 지리산은 해방전사의 어머니이다. 봉건시대에는 봉건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식민지시대에는 외세의 침략에 반대하기 위해 농민은, 민중은 어머니 산을 찾는다. 지리산은 아득히 먼 신라시대부터 압제의 멍에에 서러움을 받은 민중이 찾는 어머니 품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새로운 삶을 다짐했다. 민중의 해방을 위해, 민족의 해방을 위해 이름도 없이 죽어간 겨레의 전사들에게 다짐했다.
민주주의가 없고 자주성이 없는 민족에게는 학문의 자유마저 없다고, 그래서 이제는 편안함의 너울을 벗어 던지고 전사의 전투복으로 갈아 입겠다고, 외세의 앞잡이 군사정권과 침략자의 앞잡이 예속정권과 그리고 조국의 분단과 식민지 착취의 원흉 미국을 몰아내고 자주적 민주주의 정부를 건설하고 민족의 자주적 통일을 위하여 전사로 나서겠다고.
나는 산을 내려왔다. 이제 산을 오를 때의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찬 얼굴은 아니었다. 새로운 다짐으로 미래의 찬란한 이상을 내다보는 평화가 충만한 미소의 얼굴로 바뀌었다.
집에 내려온 바로 그 이튿날 예쁜 소녀가 이재문 동지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이 동지한테서 연락이 왔다. 이 동지는 나와 함께 청년학생들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원호했던 동지이다.
독재정권은 이 동지를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사건’으로 많은 현상을 걸어놓고 수배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아지트에서 만났다. 그리고 박정희 군사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연합정권을 세워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쟁하기로 서로 맹세했다.
그리고 나는 비록 대학에 다시 교수생활로 복귀는 되었으나 학문연구가 본업은 아니었고 그것은 생활의 수단으로 되었으며, 민주주의 운동과 자주적 통일운동이 나의 본업으로 자리잡은 직업적 변혁운동가로 변신했다.
그로 인해서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죽음의 바로 일보 전에 서기도 했고 독재정권시기의 이른바 ‘좌익수’라는 딱지를 달고 죄수들이 말하는 이른바 ‘꼽징역’을 살았다.
언제 햇빛을 볼지 모르는 무기징역을,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리고 지금도 사슬에 감겨 산다.
어떤 사람은 인생에서 변화의 순간을 우연적인 것으로 맞는다. 그러나 나는 독재자가 만들어주어서 맞았다. 그래서 변신했다. 그러나 그 변신은 내 인생에서 영광의 변신이다. 식민지 예속 사회에서, 분단된 민족에서 민중해방,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의 인생만큼 더 영광스러운 인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白首靑年)
우리 현대교육사의 새로운 정립을 위하여
말머리에
올해로 우리는 8.15해방 60주년을 맞습니다. 세상도 많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자신이 자주적인 창조성을 구현해서 변화 발전된 것이 아니라 남의 장단에 놀면서 변화된 것입니다. 그렇게 변하다보니 지금은 민족교육이란 말조차 진부한 것이 되고 대통령이나 정부의 교육정책 책임자까지도 교육을 기업으로 보고 이를 외세에 개방한다고 야단입니다.
본질적으로 교육이란 인류문화의 발상 때부터 민족단위로 이루어져 왔고 그것은 선대가 창조한 문화를 후대가 이어가면서 새로이 창조해나가는 역사적 과정이며, 문화가 민족의 특색을 표현하듯이 교육 또한 민족마다 고유한 방식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라는 실용주의의 새로운 변종으로 나타난 세계화라는 것이 교육을 민족문화와 단절시키고 교육의 기업화를 내세워 마침내 우리 교육을 과히 시장바닥으로 내 놓고 이윤추구라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으로 포장하여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수탈대상으로 놓이게 되었습니다.
교육현장에서 직접 교육을 맡고 계시는 여러 선생님들에게 교육의 본질문제로서의 민족교육을 외면하고 교육을 기업화하는 과정의 그 본질은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우리 남조선 교육의 현대사가 어떻게 본질로부터 굴곡되어 왔는가를, 제가 이 사회에서 자라고 또 초등, 중등, 고등의 교육현장에서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장 교육자들이 남조선 교육의 현대사를 새로이 정립하는 데 참고하고 거기에 일조가 되었으면 합니다.
1. 8.15해방과 건국준비위원회의 새나라 교육
미제와 그 앞잡이들은 우리민족의 8.15해방을 미국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에게 전승함으로써 얻어진 것, 다시 말해서 미국의 시혜로 얻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남조선의 각급 교육정책에서 그 뼈대로 하여 왔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민족의 일제와의 피나는 투쟁, 승리의 투쟁은 없는 것으로 되고, 일제의 모든 교육정책을 뒤엎고 새로이 새나라 교육으로서의 8.15시기 초에 있었던 민족교육의 태동은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되고 맙니다.
우리교육의 현대사는 바로 8.15해방과 더불어 고동쳤던 민족자주의 교육에서부터 시초에 두고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기초에는 첫째로, 우리민족은 현대병기로 장비하고 잘 훈련된 20만의 일제의 조선군과 100만의 관동군 그리고 40만의 괴뢰 만주국의 군대인 위만군과의 피어린 싸움으로 일제를 타승하고 이북 전역의 일제 통치기관을 엎어버리고 인민정권을 세운 이북의 8.15해방과, 일제가 항복을 대비하여 통치권을 스스로 남조선 인민들에 내 놓았고, 이를 접수하여 전 남조선 전역에 걸쳐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이를 통하여 인민대표자를 뽑아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우리민족의 위대한 8.15의 승리를 내던져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민족의 위대한 승리를 내던져버리고 어떻게 8.15 일제 식민지 해방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군은 일본군과 이들의 지배기관에 있는 일본 관리들의 항복을 받고 이들을 무장해제한다는 국제적으로 인정된 명분을 가지고 진주하는 군대로서의 미 주둔군을, 미제 패권주의자의 우두머리인 트루만과 그의 하수인인 맥아더는 점령군으로 돌변시켜 남조선을 점령하고 군정을 선포했습니다.
그들이 점령하여 가장 먼저 한 일이 인민들이 민족자결권을 발동하여 선포한 국가와 그 통치기관인 각급 인민위원회의 파괴였습니다. 이는 강자에게만 논리가 있고 약자의 말은 없다는 제국주의자들의 약육강식의 표현, 즉 패권주의의 논리일 뿐이며, 전후의 혼란한 틈을 노려 조국의 이남 땅을 군사력으로 강탈한 침략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미제는 남조선 전역에 군정을 펴고 일제 식민지시대에 동족을 배신하여 일제의 군국주의 침략정책을 동포들에게 반역적으로 강제하고 일제의 살인, 방화, 약탈 등에서는 왜놈보다 더 악질적으로 설쳤던 일제의 주구들을 불러 모아 미제의 점령정책을 펴 나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제의 주구가 다시 미제의 주구로 변신하여 일제 식민지시대에서 누렸던 기득권을 고스라니 그대로 물러 받게 해주고 이들을 미제가 세운 예속정권의 주체로 만들어주고서 지금까지 그 체제를 이어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교육도 8.15해방을 맞이하여 건준 교육부에서 초야에 묻혀 있던 조선어(한글)학자들을 찾아 초빙하여 9월부터 시작되는 개학을 앞두고 교사들에게 「조선어철자법통일안」을 강습시켰습니다. 배우는 선생님들이나 가르치는 한글학자들이나 모두 열기에 넘쳐 있었습니다.
일제 식민지시대에서 황국신민교육에 앞잡이로 설친 자들은 모두 쥐구멍을 찾아 도망쳤지만 미제의 점령 포고령으로 다시 살아나 그대로 군정청의 문교부관리로 등장하여 이번에는 친미, 숭미, 공미의 식민지 노예교육의 현장에서 설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들 중 오천석은 존 듀이의 실용주의 교육을 그대로 베껴 ‘새교육’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일제의 군국주의교육 사상에서 미제의 세계 패권의 이론적 지주인 실용주의교육 사상으로 재빨리 변신하여 미제의 침략을 개척(-프론티어)이라는 이름으로 찬미하는 이론을 펼쳤습니다. 이를 위하여 제국주의적 침략사상과 자본주의적 수탈착취사상을 창업정신과 개척정신으로 치장하고, 일신의 출세를 위하여 남에게 굴종하고 또는 남에게 군림하는 출세의 야망으로 충만한 자본주의적 사대주의적 인간을 양성한다는 이론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새교육’의 이론은 그 후 우리사회의 사범대학에서 필수과목으로 되었고 이남 사회의 교육지침으로 되었으며 그 후 이남 사회에서 내온 여러 교육이론들은 모두 이들의 아종, 변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미제의 철학은 철학, 이념, 이상이라는 것을 모조리 무시하는 무철학적 철학이고 오직 이윤을 추구해서 나서는 기업정신, 지배영역을 넓히는 개척정신을 말하는 실용주의일 뿐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민족의 후대를 창조하기 위한 교육은 진부한 것으로 되고, 이해에 밝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인간, 나라나 겨레는 진부한 것으로 보고 미국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다보는 숭미정신을 가지는 인간으로 되도록 하는 것이 세계인으로 만드는 교육이라 하고 오직 이것만이 이 땅에 남게 된 것입니다.
2. 8.15 직후의 민족교육에 대한 인민들의 열망
우리민족만큼 후대 교육에 관심이 많은 민족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국가적으로는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우리민족은 자주적인 민족으로서 과학지식을 개발하고 문명의 이기를 발명하여 일찍이 청동기문화를 비롯하였고, 고구려의 철기문화는 고구려를 강성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경당(扃堂)제도로 국민개병과 교육의 의무로 문화와 국방을 함께 전수했으며 국민이 모두 기본적인 무예를 습득하여 도적들이 나라를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백제의 태학제도는 과학기술문명을 열어 삼국 여러 나라와 중국 일본으로까지 문화를 전수하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 신분에 관계없이 교육이 국가적으로 고루 보급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일제는 우리민족에게 우민정책으로 중등교육기관조차 좁혀놓아 부유층만 받을 수 있도록 하고, 고등교육기관은 식민지정책에 필요한 부문만 두어 식민지통치를 위한 고급관료를 양성하고 친일부유층의 지위를 담보하기 위한 것으로 제한해두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나라에 그들의 최고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경성제국대학에는 법문학부만 두고 사립교육기관으로서의 전문학교는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두었으나 그들의 식민지통치의 하수인으로서의 지식인으로서 법관, 문인 등을 양성하였으며, 연희전문학교에는 자연과학교육을 위한 수물학과, 화학과, 생물학과, 천문기상학과를 두었으나 자연과학연구를 위한 학자를 양성하는 것은 아니고 그들의 식민지통치를 위한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일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교육정책이긴 하지만 조금이라도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식을 조금은 자유로운 일본에 보내어 고등교육을 받도록 했습니다. 특히 조선여성의 자녀교육에 대한 노력은 어느 민족보다 강해서 밤잠을 자지 않고 길쌈을 하여 자녀의 학자를 마련하는 일에 헌신적이었습니다.
이처럼 일제의 혹독한 우민정책으로 교육시설의 부족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마을마다 교육에 관심을 둔 선비나 일찍 개명한 인사들이 야학을 열어 자라나는 가난한 후대들에게 글을 익히고 셈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제가 패망하고 식민지상황에서 벗어나는 8.15해방을 맞이하게 되자 곳곳에서 중등교육기관으로서 중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었습니다. 일제가 우리민족을 수탈하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식량창고, 고치창고, 무명창고 등을 임시로 학교시설로 고쳐서 향학열에 불타는 학생들을 모집하여 학교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해방되자마자 면마다 적어도 중학교(3년제) 하나는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르치는 교사도 초등학교 교사 중에서 실력이 있는 교사들이 나섰고, 강의록으로 독학한 야학교 선생들도 나섰습니다. 이들은 모두 민족교육의 본질을 몸으로 받아 안고 있는 교사들이었습니다. 다시는 식민지 노예로 살지 말자는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는 사람들이었고 거의 모두가 일제 식민지를 반대하여 투쟁한 경력이 있거나 그 해방투쟁에 협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선교육자협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다시는 망국민이 되지 말자는 뜻을 가지고 민족자주정신을 고취하는 교육을 주창했습니다.
3. 자생적 민족교육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
미제는 군정을 실시하여 교육을 일제 식민지교육에서 저들 미제의 식민지교육으로 전환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학생들은 일제 식민지를 반대하여 일어선 광주학생운동을 비롯하여 반제투쟁에서 단련된 선대 청년학생들의 빛나는 운동을 이어받아 미제의 식민지교육정책에 정면으로 맞받아 나섰습니다. 그것의 최초로 나타난 것이 이른바 “국대안(國立大學校設置案)반대투쟁”이었습니다.
미군정의 교육정책이 일제 식민지시대에 일제에 붙어 친일교육을 하고 일제의 침략정책을 고취하던 배족적인 친일교육자들을 등용하여 미제 식민지교육정책을 펼쳐나가자 애국적인 교육자들과 청년학생들이 이런 친일교육자들을 배척하는 등 미군정의 교육정책을 반대해 나섰습니다.
민족교육자들이 민족자주적 교육을 주창하고 학생들이 이를 받아들였으며, 미제가 일제를 청산하지 않고 공립ㆍ관립학교에서 친일반역자를 교단에 내세워 그들의 식민지교육의 기초를 다져나가자 학생들은 이들을 규탄 배척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미제는 그들의 주구로 만들어놓은 친일 교사들이 학생들과 지역 민중으로부터 배척당하자 장래의 그들 식민지정책에 위기를 느껴 그들의 식민지 주구교육자의 양성과 그들 제국주의 문화의 전파를 위한 하수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고등교육을 틀어쥐려고 이른바 ‘국립대학교설치안(약칭 국대안)’을 내어놓고 대학을 완전히 장악하려 했습니다.
미제의 식민지교육정책으로 ‘국대안’이 나오자 대부분의 교육자들과 학생들은 반대해 나섰습니다. 이 투쟁은 처음은 대학⋅전문학교에서 일어나더니 전국적으로 퍼져 모든 중등학교가 투쟁에 참가했고 나중에는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동맹휴학에 합세했습니다.
미군정은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일단 이를 보류하고 수습하기는 했지만 애국적인 학생들과 교사들을 그대로 두고서는 식민지교육정책을 밀고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고등교육기관에서 그들의 정책을 반대하는 교사들과 학생들을 폭력배를 동원해서 추방했습니다.
그리고 지방에 일어나고 있는 민족교육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이른바 “사립학교설치 기준령”이라는 법령을 만들어 중등학교와 대학 등 교육기관의 인가조건을 어렵게 만들었고, 교사자격제도를 정하여 교사가 되는 길을 어렵게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사들, 일제 식민지시대에서도 지방에서 우리 청소년에게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던 애국적 교사들이 관제 교사자격에 걸려 추방당했습니다.
이리하여 명색은 해방이지만 일제 식민지시대에서 황국신민교육에 앞장섰던 민족반역의 교육을 하던 자들이 미제의 식민지교육을 위하여 다시 교단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들은 군, 도, 군정청 문교부의 장학사, 장학관, 편수관이 되어 우리 청년들을 친미, 숭미, 공미의 줏대 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데 그 역할을 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4. 교육모리배로 전환되는 사립학교
공립학교는 문교부와 도 교육당국자들에 의하여 이미 장악되어 있었으나 사립학교는 ‘사립학교 설립기준령’이라는 것으로 옭아매게 되었는데, 사립학교는 이 ‘기준령’에 의하여 재단을 구성하여야 했습니다.
고등교육기관으로 일제 때부터 사립학교로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혜화전문학교 등이 있었고, 이들은 8.15해방 후 각각 연희대학교, 고려대학교, 동국대학교라는 대학으로 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인 이시영이 귀국하여 1920년대에 중국 망명지에서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정신을 계승한다면서 신흥체육대학이 새로 설립했습니다(한양대학교의 전신). 대구에는 경주의 대지주이며 민족운동가인 최식이 설립한 ‘대구문리과대학’, 나중에는 ‘대구대학’이 설립되었습니다.
이들은 대개 원래 종교단체와 경주의 최식을 제외하고는 거의 친일지주가 설립한지라 재단구성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지방에 산재해 있는 사립 중등교육기관으로서의 중학교들이었습니다. 이들 중 어떤 학교는 아예 탄압을 받고 폐교되기도 했고, 당시 고등공민학교로(성인교육기관의 명분을 가지고) 수준을 낮추어 당국이 지목한 교사들을 추방하고 그대로 유지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학교는 재단을 구성하여 ‘설립기준령’에 따라 정식 중학교의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재단의 구성이라는 것이 아주 묘했습니다.
당시 지주들은 정식으로 독립정부가 구성되면 토지개혁이 있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주는 토지를 그대로 소유할 방도로 명목상 육영기관의 재단에 속한 토지로 해서 그 토지의 사실상 소유자로 하려는 지주들의 욕망과, 사립학교를 운영하던 교사들의 설립기준령에 따른 재단인가문제를 해결하려는 욕망이라는 이해관계가 묘하게 일치되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운영을 맡았던 교사들은 친일지주에게 몰려갔습니다. 재단이사장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주의 토지가 학교재단에 속해 있어도 그 지대(소작료)는 지주가 여전히 받아 챙기고 학교는 학부형들이 내는 학생들의 수업료 등 납부금으로 운영한다는 조건을 내어놓았던 것입니다. 지주에게는 토지개혁이 된다면 없어질지도 모르는 토지에 대해 지대를 그냥 받을 수 있는데다가 육영사업가의 명예도 생기게 되는 일이라 흔쾌히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학교운영은 당초의 민족교육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학교당국으로서의 교사는 학교를 운영하기 위하여 기부금도 받고, 정원초과의 보결입학도 시키고 해서 막대한 돈을 벌 수 있어서 학교는 과시 모리의 수단으로 전락되고만 것입니다.
한편 학교에 자기 토지를 명색만으로 기증한 재단구성자로서의 지주 이사장은 학교운영에서 상당한 수입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명색만의 이사장이 아니라 실권자로서의 이사장으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교사 측 운영자와 갈등이 빚어졌고 학교분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규는 결국 돈의 논리에 따라 대개 재단이사장이 이겼고 교사 측 운영자들은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교육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남을 수탈하는 데 이골이 난 친일지주의 학교운영을 통한 치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한 피해는 교사들과 학생들 그리고 학자를 대는 학부모들에게 그대로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교육자나 육영사업가들이 가져야 할 도덕적 덕목이란 전혀 없는 수탈자의 본성을 충분히 발휘하여, 학생모집정원의 몇 배나 되는 학생들을 모집하고 입학금, 기부금을 챙겼고 생계비도 안 되는 봉급으로 교사들을 수탈해서 엄청난 치부를 했습니다.
친일지주로서의 학교운영자가 수탈 치부한 재부는 당시 자금염출의 원천이 거의 없는 사회경제적 정황으로서 사기협잡의 정치판의 정치자금의 유일한 원천으로 되었으며, 친일지주 자신들이나 그들 자식들의 정치적 출세의 담보로 되었던 것입니다. 전쟁 중, 대학생 징집보류제도로 대학생들이 전선에 나가지 않게 되자 농민들은 땅 팔고 소 팔고 해서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게 되어 아무 시설 없는 대학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대학은 모리배들의 소굴로 되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대학 건물을 ‘우골탑’, ‘피골탑’이라는 새로운 말도 만들어 불렀습니다. 이런 것이 전쟁 후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의 물질적 기초의 중요한 원천으로 되었고 이 사회의 사학교육의 보편적 형태로 된 것입니다.
오늘날 이들은 거대한 콘체른을 형성해서 막강한 정치력을 가지고 있어서 법을 만들기도 하고 교육개혁입법을 막기도 해서 그들의 이해관계를 보장하는 물질적 기초로 되고 있습니다.
5. 우리교육의 현대사
우리 현대사는 8.15 일제 식민지해방으로부터 개막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로부터 벗어나는 운동은 바로 나라의 주권을 찾는 일이고 동시에 일제 식민지통치에 의해서 가로 막혀 있던 우리사회의 근대화가 그 질곡에서 벗어나는 일었습니다. 봉건제사회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구조 밑에서 토지의 봉건적 소유관계에 의한 수탈 구조를 가진 사회였습니다. 그러한 봉건국가인 봉건조선은 근대국가로서의 일제의 식민지로 되자 일제는 봉건적 수탈구조를 그대로 온존해 두고 거기에다 근대국가로서의 지배체제를 가진 2중적 지배구조를 가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봉건적 수탈구조를 가지고 봉건적 유제도 고스라니 온존된 근대적 지배체제를 가진 사회로서의 식민지로 된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식민지반봉건사회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은 일제의 식민지상황에서 벗어나고 반봉건적 수탈에서 해방되며 온갖 불평등한 봉건적 유제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혁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이라고 합니다.
바로 8.15민족해방은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시작인 것입니다.
여운형 선생은 우리혁명을 ‘진보적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도 했습니다. 그 ‘진보적민주주의’는 첫째 정치적 평등이고, 둘째 경제적 평등이며, 셋째 사회적 평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교육의 현대사는 이러한 사회혁명에 그 뿌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교육에서는 누구나 교육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 교육이란 민족문화를 계승받고 창조할 수 있는 기능을 기루는 일입니다. 이것을 민족교육이라고 하겠습니다. 민족의 성원은 어느 누구도 민족문화를 계승받을 권리가 있고 창조에 동참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민족문화는 민족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민족교육은 민족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원천입니다.
문화는 민족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창조되고 있으며 그 민족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이 문화는 다른 민족의 문화와 융화되어 인류문화로서의 큰 바다에 어우러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족문화가 없이는 인류문화가 존재할 수 없고 인류문화와 어우러질 때 민족문화는 새로운 창조의 계기를 맞을 수 있고 더욱 빛나는 것으로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민족교육이 위협 당하고 있습니다. 민족교육을 내던지고 이윤의 논리 속에 세계화라면서 천박한 제국주의 식민지 문화가 마구 들어오고 있으며, 교육을 상업주의의 잣대로 재단되고 있습니다.
기초과학의 토대가 없는 과학기술은 남이 만들어 놓은 기계나 계기를 조종하고 읽는 것밖에 할 수 없습니다. 세계화 바람에 우리사회에서 기초과학의 대중적 기반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기초과학의 지식 없이 새로운 기술을 창조할 수 없고 따라서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자립적 민족경제의 토대 위에서 민족문화의 자주적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민족교육은 민족의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집니다. 자기가 사는 국토를 잘 알아야 나라에 대한 애착이 생기고 자원을 이용하는 지혜도 생깁니다. 나라마다 국토가 달리 있고 거기에 있는 자원도 다릅니다. 그래서 그 땅에서 나오는 문화도 다릅니다. 다른 나라와 경제를 교류하더라도 자기 것을 잘 알아야 남의 것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삶 속의 교육이기에 삶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 후대교육을 함께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육을 중앙에 집중한다는 것은 교육의 획일을 도모하고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이루는 데에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폐단은 지난 군부독재체제에서 싫도록 보아 왔습니다.
민족교육은 교육을 후대를 위한 가장 값진 것으로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교육을 담당하는 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 주게 됩니다. 교권은 어느 누구도 도전받을 수 없는 교육자가 가지는 신성한 권리입니다. 교육자가 존경을 받는 것은 그 사회가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표징으로 됩니다.
6. 우리교육의 현대사를 바로 정립하기 위하여
우리교육의 현장은 교육이라는 본질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교육은 그 사회의 집단적인 사회적 활동입니다. 사회적 활동으로서의 교육이 그 본질을 떠나 있다는 사실은 바로 그 사회의 사회적 성격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현장교육은 바로 우리사회의 사회적 성격에서 근원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사회의 사회적 성격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사회는 남북이 하나의 겨레로서 하나의 나라로 살아야 할 나라가 외세에 의해 인위적으로 분단되어 살고 게다가 이남 사회는 미제의 군대가 사실상 점령하고 있고 미제의 이해관계를 잘 반영하도록 하는 예속정권에 의해서 미제의 지배하에 있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 상황, 즉 신식민지상황에 있으며, 자본의 논리가 철저하게 관통되고 있는 자본주의사회이기는 하지만 그 자본의 주체가 미제를 우두머리로 하는 다국적 초국적 독점자본인 심히 정상적이지 못한 파행적인 자본주의사회입니다. 그래서 우리사회는 분단된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단된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라는 본질로부터 나오는 우리교육현장의 굴곡은, 첫째로 분단된 형제인 이북을 철저히 반대해야 하기에 이북 동포와 함께 만들어온 민족의 역사, 그중에서 특히 항일민족해방운동의 역사를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민족의 자주적인 역사를 깔아뭉개버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민족의 긍지 높은 자주민족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미국의 은혜나 구걸하는 약소민족이라는 완전히 굴곡된 역사관과 민족관을 가지도록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의 군대의 통수권마저 미군에 잡힌 나라가 자주독립국가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제의 독점자본이 세계화 바람을 타고 이윤이 생기는 대학교육을 개방하라고 할 때 예속정권의 교육책임자가 그 개방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임은 명백합니다.
미제의 예속정권의 본질에서 친미 숭미 공미의 사상을 퍼뜨리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우리 이남 땅에 점령군으로 들어와 6.25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중의 한 사람이고, 전쟁 중에 피난민을 마구 기총소사하고 굴다리 밑에 쳐 넣어 집단학살하며, 이북에 들어가서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집단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이북 인민군의 반격을 맞아 30만 대군을 잃어버리고 미쳐버린 다음 이북의 조ㆍ중국경의 이북 쪽에 20~30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폭 100킬로미터의 코발트 방사능지대로 만들려고 했고, 세균전, 화학전으로 숫한 이북동포들을 학살한 민족의 원수인 맥아더를 은인으로까지 만들어 교육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전술이란 태평양전쟁 때와 6.25전쟁 때 자기 휘하의 장병을 포위 속으로 빠져들게 하여 몰죽음을 당하게 하고 제만 살아남아 내빼거나 멀리 떠나 있는 천하의 몹쓸 미련한 장군을 명장으로 치장하는 재주는 숭미 공미의 극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식민지 예속정권의 교육에서 벗어나야 민족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민족은 사회의 각 부문에서 이미 미제의 식민지정책으로 미제와 그 앞잡이들과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민족은 남과 북 모두 미제의 패권주의와 격돌하고 있습니다. 미제가 이 땅에 있는 이상 우리민족의 현대사를 자랑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후대에게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민족 자주적 민족교육을 위하여 미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자 !!!
(2005. 10.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