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4일 목요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민주노동당 양주시당부 간부 연수회 강연 초
안 재 구
2008. 11. 22
1. 나는 무엇인가.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갈 때 문득 내가 무엇인가, 그리고 삶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납니다. 부모를 잘 만나서 먹고 사는 데 걱정이 없고 삶이 힘들지 않은 사람들은 그 삶을 즐기느라고 이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별로 없겠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일해서 자기 삶을 스스로 영위할 때가 되면 이런 생각을 안 해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특히 요즘과 같이 삶이 고되고 세상이 어지러워질수록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삶에 대한 문제가 더욱 절실해질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혼자 하늘에서 뚝 떨어졌거나 땅에서 불쑥 솟아난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생명을 이어받아 부모와 형제자매로 구성된 가족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받아 자라고 일가친척들의 도움과 우애로 외롭지 않게 살게 되며, 이웃 사람들과 유무상통하면서 서로 친교를 하는 가운데서 배우고 자라 성인이 되며, 그래서 장차 또 하나의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창조하고 인생을 살면서 역사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가족공동체 안에서 부모로부터 생명을 이어받아 태어났고, 사회라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 안에서 사람의 삶을 배우고 일하며 더욱 나은 삶을 영위해나가기 위한 물질적 정신적 재화를 생산하며 창조하고, 이들 재화를 삶의 수단으로 해서 살아나갑니다.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그 안에서 재화를 생산하고 소비하여 삶을 영위하며 그 삶의 방식과 슬기를 더욱 발전시키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들의 집단을 사회라고 합니다.
사람은 부모로부터 육체적 생명을 이어받아 가족공동체 안에서 그 구성원의 사랑을 받고 자랍니다. 그리고 더 넓은 사회라는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자질을 배워서 스스로 생산하는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도록 성장하여, 마침내 한 사람의 온전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집단으로서의 사회는 처음부터 지금과 같이 나라라는 민족공동체와 같은 완전한 집단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은 가족공동체라는 혈연적 집단에서 출발했고, 더욱 큰 규모의 생산을 위하여 혈연적 관계를 가진 여러 개의 가족공동체의 연합으로 씨족공동체로 발전했으며, 더욱 큰 규모의 집단적 노동이 필요한 농업생산으로 발전하자 거기에 걸맞게 가까운 씨족공동체들이 연합하여 더욱 큰 규모의 사회로서의 부족공동체로 발전했습니다. 부족공동체의 사회에서 농업생산의 규모가 터 잡게 되고 발전됨으로써 부족을 넘는 더욱 더 큰 규모의 공동체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로써 더욱 많은 잉여생산물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욱 많은 잉여생산물을 위하여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고 이를 위하여 다른 부족공동체를 습격하고 그 생구를 노예로 삼고 또 한편 공동체의 규범을 어긴 죄인과 더불어 노동생상에서 소외되고 오직 착취만 당하는 노예계급이 발생했으며, 노예계급을 지배하여 더욱 많은 잉여생산물을 차지하는 노예주와 그 지배체제에 속하는 신관, 관리와 귀족, 제왕 등의 지배자계급들로 구성된 인류최초의 계급사회인 노예제사회가 나타났습니다.
노예제사회는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강제수단으로 법률제도와 이를 집행하고 옹호하는 무력을 가진 권력이 생겨났습니다. 그 법률에 따라 왕, 관료, 제관, 장군 등 지배계층구조가 생겨났으며, 착취제도가 법률적으로 보장되고 합리화되는 역사상 최초의 국가가 발생한 것입니다.
국가는 그 통치권이 미치는 영역이 확정되며, 핏줄이 같고,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삶의 형식과 슬기, 즉 문화의 공동성을 가진 인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같은 핏줄, 같은 말, 같은 땅이라는 공통성으로부터 민족이라는 공고한 집단의 구성체로서의 민족공동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우리민족은 대동강 연안의 비옥한 농경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최초의 민족국가로서 생겨났으며 그 이름을 조선이라 했습니다. 최초의 민족수장으로 단군왕검이 있었으며, 다른 민족과 구별하여 아사달, 배달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 영역이 둘레가 7천리, 남으로는 반도 전체와 북으로는 할아빈 일대까지, 동으로는 산해관 너머 지금의 북경지역까지, 서로는 연해주까지 이르는 광대하고 강성한 고대국가로 발전하였습니다. 사회는 노동을 착취하는 지배계급과 노동을 수탈당하는 피지배계급으로 나누어진 최초의 계급사회인 노예제사회였으며, 문화는 청동기문화로 그 비파형 동검은 우리민족의 최초의 표징으로 되었습니다. 신지문자로 찬란한 문화를 이루었고, 강력한 기마군대로 주변 여러 나라를 복속시켜 동북아시아의 강성한 나라로 번영했습니다.
우리들은 바로 이 단군조선의 핏줄을 이어받아 찬란한 문화전통을 창조하면서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민족국가의 자랑스러운 성원인 것입니다.
2. 찬란한 문화로 이어온 민족의 성원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의 해답은 인간의 삶의 본질, 삶의 목적과 의의, 생활의 보람과 가치, 참된 삶을 누리기 위한 방도로부터 나옵니다. 이러한 문제는 세계와 인간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한 견해와 관점으로부터 나옵니다. 이를 인생관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관은 본질적인 것으로 철학의 문제로 되겠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해명함으로써 철학의 본래 사명을 다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와 관점 그리고 입장, 즉 인생관은 시대가 바꿔짐에 따라 변화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자주의식과 창조적 능력의 발전정도, 사회제도의 성격,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조류들과 도덕, 생활양식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대와 중세에는 주로 종교가 사람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에 따라 그 시대의 인생관에서는 일반적으로 종교적 색채가 강했던 것입니다. 혹독한 억압과 고통 속에서 올바른 철학의 영향을 받을 수 없었던 당시의 민중은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 것으로 스스로를 달랬던 것입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돈으로 계산되고 사람의 인격마저 돈에 의하여 평가되는 개인주의적 인생관이 지배적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자본주의의 첨단인 미국이 퍼뜨린 세계관으로 실용주의(‘인간에 유용한 것만 가치가 있다는 것’이라고 하는 사상조류)와 물질만능주의가 있고, 이러한 삶을 위해 애쓰다가 실패한 패배주의자들이 빠지고 마는 실존주의(인간은 홀로 고독한 존재이며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허무주의철학), 쾌락주의(살아있을 때가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철학)도 있습니다.
인생은 오직 한번만 살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오직 한번 사는 ‘일생’을 보람되게 살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이 가지는 너무나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요구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생을 살기 위하여 먼저 우리 자신, 즉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3. 사람의 본질적 속성
사물은 그것이 그것이게끔 규정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본질적 속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본질적 속성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자주성입니다. 자주성은 ‘세계의 주인으로 그리고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의 사회적 속성’입니다. 사람은 자기 주변의 세계에 있는 그대로 따르지 않고, 도구를 만들어 개조 변혁함으로써 다른 생명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더욱 고등한 생명체로서의 사람으로 되는 것입니다.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세계를 개조 변혁하는 자주성은 세계에 대한 주인으로서 세계에서의 사람의 지위를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주성을 쟁취하는 사람의 활동은 크게 자연에 대한 투쟁(노동), 사회에 대한 투쟁(민족적ㆍ계급적 억압과 예속을 비롯한 온갖 사회적 구속과 예속을 없애기 위한 변혁과 건설의 투쟁), 그리고 인간의 의식에 남아 있는 비자주적인 사상을 일소하기 위한 사상투쟁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구속과 압박을 거부하고 이 세 가지(자연ㆍ사회ㆍ인간 자신)의 자주성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서는 것은 자주성을 생명으로 하는 참된 사람의 본성입니다.
둘째, 창조성입니다. 창조성은 ‘자주적 요구에 맞게 목적의식적으로 세계를 개조하고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입니다.
‘인간이 창조성을 가졌다.’는 것은 ‘창조적 능력(지혜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성은 세계에 작용하는 인간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셋째, 의식성입니다. 의식성은 ‘세계와 자기 자신을 파악하고 이를 개조 변혁하기 위한 모든 활동을 규제하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입니다.
의식의 내용에는 지식과 사상의식이 있는데, 지식이 주위세계에 대한 합법칙성을 아는 것이라면 사상의식은 자기의 이해와 요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사상을 자기의 철학으로 가졌느냐’ 에 따라 사람은 이렇게도 움직이게 하고 저렇게도 움직이게 합니다.
사상의식 중에서도 자주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노동자와 민중의 철학인 자주적인 사상의식은 사람을 각성시키고 그래서 더욱 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결정적 요인인 것입니다.
4. 인간의 속성은 천성적인 것인가, 사회적인가.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이 인간을 주위세계와 근본적으로 구별 짓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하여,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인간의 속성은 천성적인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나라 속담에 ‘자식은 겉을 낳지 속은 못 낳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식의 육체는 낳지만 그가 지니게 될 지식ㆍ인품ㆍ사상 같은 사회적 속성은 낳지 못한다.’ 는 뜻입니다.
인간의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은 자연이 인간에게 준 생물적 속성이 아니라 사회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발전되어온 사회적 속성입니다. 사회적인 교육과 실천을 통하여 자주적인 사상의식과 창조적인 능력이 배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와 완전히 단절된 인간은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할 수 있고 사회적 속성을 가질 수 있는 생물학적 바탕 즉 발달된 육체구조를 가진 유일한 존재입니다. 고도로 발달된 뇌수, 보행기관에서 해방되어 노동의 기관으로 바뀐 손, 언어를 소통할 수 있는 후두구조와 같이 인간의 육체기관은 다른 생명물질이 가질 수 없는 사유의 기능과 의사교환의 기능, 노동의 기능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육체기관은 인간의 속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물질적ㆍ생물학적 기초일 뿐입니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본질적 속성은 그 형성에서부터 사회적 산물이며 그 내용과 수준이 역사적으로 변화ㆍ발전하는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떳떳한 사회적 존재로 살며 발전하려면 사회적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생명, 즉 사회ㆍ정치적 생명을 가지고 사회생활, 사회적 실천에 적극 참여하여야 합니다. 자주성을 위한 투쟁에 적극 참여하는 길에서만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은 더욱 강화ㆍ증대될 수 있습니다.
인간을 ‘고독한 개체’ 로 묘사하면서 집단 속에 들어가면 인간개성이 ‘말살’되고 ‘평균화’된다고 하며 인간들에게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 것을 역설하는 온갖 부르주아사상(특히 실존주의에 이런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이 노리는 것은, 사람들을 민족ㆍ민중이라는 집단과 그것이 처해진 현실에 등을 돌리고 무위도식하는 속물로, 사회도 민족도 모르고 오직 개인의 생물학적 생명만을 위해 사는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려는 것이며, 지금 한창 고양되고 있는 자주ㆍ민주ㆍ통일과 노동해방을 통한 새 사회 건설투쟁을 어떻게 하든지 막아 보려는 데에 그 속셈이 있는 것입니다.
본질적 속성으로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헌신성을 가집니다. 사람들의 가장 작은 공동체로서 가족공동체에서는 부부ㆍ부모ㆍ형제자매 사이의 자기희생적인 헌신성이 있습니다. 사회적 관계로부터 생겨나는 모든 공동체에서도 그 공동체의 이상이 잘 구현되려면 공동체의 성원이 그 공동체의 이상실현을 위한 헌신성이 담보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공동체에 대한 자기헌신성으로부터 발현하는 정서를 우리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헌신적인 정서로서의 사랑으로 그 공동체의 공고한 단결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대한 헌신성의 정서로서의 사랑은 아주 강렬해서 주어서 기쁘고 보람을 느끼는 정서로서, 특히 가족이나 앞으로 창조될 가족공동체의 주체로서의 남녀 사이에서는 매우 강렬하게 발현됩니다. 한편 특히 민족공동체는 그 흥망성쇠의 운명이 성원의 운명과 함께하는 운명공동체로서 그 성원의 강렬한 생명력으로서의 애국심을 발현시켜 줍니다.
사회혁명ㆍ민족혁명이라는 운동의 전위조직이라는 공동체의 성원들 사이에는 동지애라는 가장 의식적이고 가장 강렬한 자기헌신의 정서가 발현됩니다. 동지애는 자기의 혁명이상이 동지의 혁명투쟁으로 담보되고 자기의 혁명투쟁이 동지의 혁명이상을 담보시켜주는 데에서 발현되는 것이며, 그 정서가 사상의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서로 생명을 주고받는 가장 숭고한 사랑으로까지 발현되고 있음을 우리는 혁명투쟁의 역사에서 봅니다.
5.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의 높이와 질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그래서 인간다운 가치를 발휘하는 삶, 즉 인간다운 삶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자주성ㆍ창조성ㆍ의식성에 맞는 삶, 그것을 더욱 증대시키고 빛내어 가는 삶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민족의 민중으로서, 노동자로서 살아가는데서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삶은 어떤 삶이라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앞서 인간을 둘러싼 모든 예속과 착취, 억압과 압박에 맞서 그것을 우리의 요구대로 지배ㆍ개조하는 것이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삶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을 옥죄는 억압ㆍ예속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너무나 많습니다. 많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을 말하자면 아마 이런 것들이겠습니다.
장시간의 힘든 노동, 직장에서의 비인간적인 대우, 사회의 싸늘한 냉대, 넉넉하지는 못한 생활, 충분한 휴식과 문화생활을 누리기 어려운 시간적ㆍ경제적 제약.
더 나아가서는, 정치적으로는 무권리, 정치는 노동자와는 무관하게 몇몇 정치꾼들이 차지, 사회는 점점 물질만능ㆍ극단적 개인주의, 나 자신도 점점 그렇게 변해 가는 것 같고.
이런 상황을 벗어나고자 조금만 투쟁에 나서면 국가보안법입네 집시법입네 해서 잡아가두고 해고시키고.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어디서 비롯되었습니까? 이 모든 것들은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민중이 생산수단과 국가주권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생산수단과 국가주권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구경꾼으로 그저 일하는 기계로 전락하게 만든 이 사회 때문에.
생산수단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힘들게 열심히 일하지만 생산물은 내 것이 아니고 사장의 것, 노동자는 그저 몇 푼 월급만 받으면 ‘땡’(노동의 소외). 국가주권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의 압도적 다수가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이건만 우리를 위한 정치는 없고, 가진 자, 있는 자를 위한 정치만 있을 뿐 말할 기회도 말할 통로도 없기 때문에. (사회의 소외)
그래서 그저 술이나 한 잔 걸치고 노래방에 가서 고함이나 치며 스트레스나 해소하고, 아니면 한쪽 구석에서 볼멘소리로 중얼거릴 뿐.
이래서는 안 됩니다. 과감히 나서야 합니다. 생산수단의 주인으로 국가주권의 주인으로 당당히 나서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이남사회의 본질은, 아직도 미국에 예속되고 지배받고 있는 분단된 식민지자본주의사회입니다.
미국의 부당한 간섭을 끝장내고 우리 힘으로 조국을 통일하며 노동자와 민중이 주인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투쟁으로 떨쳐 일어서야 합니다.
이 길이야 말로 이 시대, 이 땅에 태어난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게 사는 길이 될 것입니다.
착취가 있고 억압이 있으며 노예 같은 예속이 있는데, 이를 쳐부수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는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놔두고 어디에서 인간다운 삶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에게는 육체적 생명 외에 자주성이라는 사회정치적인 생명이 또 하나 있습니다. 육체적 생명은 끝나면 그냥 분해되고 없어지고 말지만, 자주적인 삶의 사회정치적 생명은 오히려 육체적 생명보다 더 중요하고 보람 있고 길이길이 후대에게서 부활되는 영생하는 생명이라 하겠습니다. 자주성은 인간이 인간다운 잣대이기 때문에 자주성이 없으면 인간이되 이미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물려준 찬란한 물질적ㆍ정신적 재부를 자양분삼아 우리가 다른 생명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생명체, 즉 인간으로 자라온 민족공동체에 우리는 우리 후손들에게 또 다른 물질적ㆍ정신적 재부를 많이 남겨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돈이나 물질 자체가 아니라 인간중심의, 인간을 위한 새 사회건설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예속과 억압당하는 민족과 민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 이 길만이 이 시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인간답고 보람차며 가치 있는 삶을 살며 빛내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육체적으로는 안락하지 않아도, 또 설사 그 길에서 쓰러질지라도 우리의 사회정치적 생명은 우리조국, 우리민중과 함께 영원히 살아 숨 쉬며 후손들의 소중한 재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인생의 의미와 보람을 보는 것입니다.
(2008.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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