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4일 목요일

국가로서 「대한민국」의 정통성

_____ 5.10단독선거(1948년)에서 제3회 국련총회(같은 해 12월)에 이르기까지


이 논문은 「씨알의힘사」 주최로 1986년 8월 3일, 도쿄(동경)에서 개최된 「몽양 여운형 선생 탄생백주년, 순의40년을 기념하는 강연회」에서 저자 매코매크 교수가 일본어로 강연한 것을 수록한 것이다. 텍스트는 잡지『씨알의 힘』제9호로부터 전재한 것이다.



1.

조선의 분단은 “종전”의 해, 1945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단이 화해 불가능할 만큼 틀어져버리게 된 것은 1948년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해가 미ㆍ소의 냉전이 조선민족의 내부적 항쟁으로 변전된 해이고, 그 과정의 일환으로서 국련이 조선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조선이 일제의 굴레로부터 해방되어서 3년째가 되는 이 해에 들어서자 문제는 점점 더 깊이 착잡해지고 회담으로써 해결할 가능성이 적어졌고 동시에 조선의 국토에서 전쟁의 검은 그늘이 엿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48년이라는 해는 조선으로서는 비극적인 해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문제와 관련해서 국련이 스스로의 원칙을 짓밟아버린 해였다는 점에서 세계로서도 비극적인 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냉전에 대해서 초연해야 할 국련이 미ㆍ소의 대립에 휘말려, 특히 조선문제를 둘러싼 2국간의 분쟁에 관여하게 되고부터 국련은 물러날 수 없는 궁지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로부터 2년 후에는 분명히 세계평화를 위해 만든 국제기관이 인류사상에서 희유할 만큼 비참한 조선전쟁의 당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국련이라는 국제기관이 이와 같은 행동을 한 일은 전무후무, 조선 이외에는 없습니다. 국련은 그 때문에 권위를 실추당하고 조선의 민족주의는 커더란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자신의 정부만이 조선반도 전역을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정통정부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1948년 12월,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국련총회의 결의문(195-III)에 있다는 것으로 일반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결의를 낸 국련이 조선문제에 관여할 권한이 있었던가, 그리고 관여 방법이 정당했던가, 「대한민국」이 정통정부라고 주장하는 그 「정통성」이 역사의 비판을 감당해낼 수 있는가 어떤가라는 것이겠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자료를 입수할 수 있기에 그 의문점을 해명하는 데 불편을 느낄 일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지금 내가 거주하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측의 자료 중에서 조선문제의 본질을 밝히는 데 만족할 만한 재미있는 사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에 근거해서 쓴 것이 나의 저서『Cold War, Hot War ____ An Australian perspective on the Korean War, Hale and Iremonger Pry Ltd., Sydney. 1983』입니다.

2.

조선문제가 미국의 동의(動議)로 국련에 들어간 것은 1947년 9월입니다. 법적으로 본다면 조선문제가 국련으로 이관되기에는 2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첫째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상회의(미ㆍ소ㆍ영)의 조선문제에 대한 결정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파기함으로써 비로소 조선문제를 국련으로 이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둘째는 국련 헌장의 제107조에서 「전후처리에 관한 분쟁」은 국련 안으로 가지고 가는 일을 금지하고 있는데, 조선문제야 말로 바로 일제의 패퇴로부터 생긴 전후처리문제이기 때문에 조선문제에 대해서 국련이 관여한다는 것은 바로 국련 헌장을 명백히 위반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문제가 안보이사회가 아니라 총회의 의제로 상정되었다는 사실은, 물론 안보리에서 소련의 거부권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작전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정당한 방식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고, 조선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더구나 조선민족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이 분명한 문제를 토론하는 데 어느 누구 한 사람의 조선사람도 국련총회에 초청되어 발언이 허용된 사실이 없었습니다.

1948년 이후부터 당하는 조선민족의 고통과 비극은 그 근본 시작부터가 조선문제에 대해 국련이 관여하는 데에 있다고 말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태가 여운형선생의 죽음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는 것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몽양 여운형선생이 흉탄에 쓰러진 것은 1947년 7월 19일이었고, 여운형 선생이 없어지면 선생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던 좌우합작위원회가 유명무실하게 되고 결국 해산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10월 6일), 좌우합작의 성공에 희망을 걸고 있던 제2차 미ㆍ소공동위원회도 할 일을 잃고 만 격이 되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10월 18일). 이어서 11월 4일, 국련총회(제2차) 정치위원회에서 「국련임시조선위원단」*(UNTCOK)의 설치를 요구하는 미국 안이 소련의 반대를 물리치고 가결하기에 이르렀고 뒤이어 조선의 비극적인 운명이 결정되어버렸다고 하겠습니다.

* UNTCOK는 「국련임시조선위원」라고도, 「국련임시조선위원」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
다. 본문에서는 저자는 전자를 썼지만 여기에서는 후자를 썼다.


3.

아무튼 조선문제에 대한 국련의 관여는 다음의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① 국련의 관여는 조선에 병력을 주둔하고 있는 2개국 중 한 나라만의 제안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한 나라는 이를 반대하고 있었다는 사실.

② 38도선 이남에 군정을 실시하고 있는 미국은 이미 거기에 강력한 반공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고, 국련의 관여가 미국의 기득권을 위협할 염려는 전혀 없었다는 사실.(1)

③ 대저 국련은 평화로운 세계질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고 특히 대국의 권리뿐만이 아니라 소국의 권리도 보호됨으로써 정의의 지배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전세계의 기대를 부여받아야 할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 국련이 미국의 지배 밑에 들어가 미국의 국익을 옹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략되고 말았다는 사실.

1945년 당시, 세계의 경제, 군사, 정치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감히 이에 도전할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국련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적어도 총회에서 투표는 미국의 뜻대로 조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무국 직원의 3분의 1 이상은 미국인이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2) 국련총회에 가지고 온 조선문제가 미국이 바라는 대로 요리되는 것은 물론이고, 앞서 말한 「국련임시조선위원단」을 두고 보더라도 그 인선이 당시 국련의 미국 대표인 존 포스터 덜레스의 개인적인 선호(preference)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것은 지금에야 두루 알고 있는 사실로 되어있습니다.(3) 동 위원단은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국(대만), 엘살바도르, 인도, 필리핀, 프랑스, 시리아의 8개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자주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어서 미국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나라는 인도와 시리아 2개국뿐이었습니다.

이 위원단이 조선에 도착한 것은 1947년이 저물어가는 때였습니다. 서울에 도착하자 곧 그들이 발견한 일은 위원단의 활동이 숙사와 사무실부터 비롯해서 이동이나 통신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미군정청에 의존되어야 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과 일제시대부터 토지귀족이었던 김성수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민주당의 세력은 미 군정청의 전면적 지원 밑에서 남에서 실질적인 권력으로 장악하고 있고, 게다가 그런 권력이 폭력과 협박이라는 수단을 통해 행사되고 있다는 것,(4) 그리고 이미 구축되어 있는 냉전구조로부터 배제된 중도 내지 좌파세력은 철저히 박해를 받고 있고 폭력으로 비합법화되어 투옥, 고문, 죽음, 도망 등으로 침묵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5)

위원단은 처음부터 조선전토에 국련의 위탁사항을 전혀 실행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국련이 나선다는 것만으로 둘로 분단된 나라의 모순이 일거에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 등은 처음부터 빤히 알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미국이 조선문제를 국련에 들여온 것은 소련과 같은 격으로 놓인 입장에서는 해결할 수 없고, 국련이라는 장소가 자기의 입장을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하는 토의로써 조선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공정권 이외의 것을 자기 나라가 점령하고 있는 남쪽의 지역에 인정할 작정이 전혀 없는 그들의 결의를 생각한다면, 당시 미국의 강대한 힘과 국련의 힘으로 조선의 모순을 해결하리라고 생각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그래서 국련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떠맡은 것이었습니다.



4.

앞에 말한 바와 같이 국련임시조선위원단은 미국의 선호에 따라 그 구성원을 용의주도하게 선발했지만 미국의 기대에 반해 동위원단은 남쪽만의 단독선거에는 반대했고, 그에 대한 「감시」를 도맡을 이유도 없다는 태도를 명백히 했습니다. 위원단의 단장은 인도의 K. P. S. 메논이었는데, 그는 “남쪽에 수립될는지 모르는 단독분리정권은 적어도 국련총회(제2차)의 결의에 근거를 가진 합법적인 전국정부(네슈널 가버멘트)는 될 수 없다.”라는 것이 위원단의 일치된 의견이라고 발표했습니다.(6)

이 말은, 조선의 여러 지도자들과 이야기를 한 결과 위원단의 태반이 자유로운 선거가 실시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서방의 일원으로 당연히 미국의 노선을 추종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짓궂게도 그 오스트레일리아가 미국에 대해 반대파의 선두에 섰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표의 잭슨 대령은 1948년 1월 29일, 서울에서 본국정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미국의 군정청은 친미우익을 지지하고 있고 그 이외는 공산주의자거나 적어도 그와 가까운 자로 취급하고 있다. 우리들이 인터뷰를 한 많은 지도자들은 우익이 경찰의 배경을 얻어 사태를 완전히 조정하고 있어서 자유로운 선거 따위는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 사실과 가까울 것이다."

그보다 이전, 즉 1947년 11월 11일, 주일 오스트레일리아 사절단 쇼우 씨는 본국정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실권이 잔인한 경찰의 손에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한국의 감옥은 지금 일본 통치시대보다 더 정치범으로 넘쳐나고 있다. 극우단체에 의한 정적에 대한 고문, 살육은 일상다반사로 행해지고 있고 이와 같은 불법행위는 널리 공인되고 있다. 미군의 G-2는 좌익을 억압하는 데만 열심이고 그들의 한국인 앞잡이들이 어떤 수단을 취하건 단속할 생각은 없다."



5.

미국이 조선문제에 대해 국련이 관여하도록 강력하게 추진한 것은 이승만 친미단독정권에게 정통성의 이미지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 마디 말로 끝낼 수 있지만, 그러한 목적에 따라 설치된 국련임시조선위원단의 역할이 미국의 대한정책을 옹호하고 미국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조선을 위해서도 세계를 위해서도 비극적인 것이었습니다. 소련은 위원단이 북에 들어와 국련소총회의 지령에 근거해서 활동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만, 미국의 공산주의 박멸운동에 소련과 북조선이 협력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국련은 분단의 해소라고 하는 조선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불가능하도록 하는 역할을 떠맡게 된 것입니다.

1948년 2월 5일, 서울에 있던 임시조선위원단은 소련이 38도선 이북에서 위원단이 활동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상황 가운데서도, 역시 남쪽만의 선거 실시를 용인하고 단독정권수립하는 데에 손을 빌려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지시해주도록 국련소총회에 요청함과 동시에, 사태를 설명하기 위하여 단장인 메논을 소총회에 파견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국련의 미국 대표단과 함께 전 직원은 소총회가 남쪽만의 단독정권수립에 찬성하는 결정을 내리도록 각 대표에 대해 직접적인 압력을 포합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도록 명령했습니다.(9)

이러한 미국의 압력은 마침 소총회가 열리고 있었던 2월 중순에 체코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서 공산정권이 수립된 사실로 보다 쉽게 효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체코에서 공산주의가 이겼다면 조선에서는 절대로 이기지 못하도록 손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10)

국련임시조선위원단에 대해 남쪽만의 단독선거 실시를 인정하도록 하고 또 그것을 감시하도록 요청하는 미국의 제안을 표결한 것은 1948년 2월 26일이었습니다. 소련권의 보이콧 속에서 강행된 이 표결의 결과는 찬성 34, 반대 2, 기권 11이었는데, 반대의 2표가 미국의 동맹국이고 더구나 위원단의 구성원인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였다는 것, 기권 11표 가운데는 전통적으로 미국의 외교정책에 추종해왔던 라틴아메리카의 3개국(컬럼비아, 파나마, 베네수엘라)와 북구 3개국(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기억해둘만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소총회가 이 결의안이 채택한다는 것은 조선을 영구히 분단할 뿐 아니라 장차 세계평화를 크게 위협할지도 모르는 잘못된 방책이라는 것을 내심으로는 겁을 내고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단독선거에 대해서 일관되게 반대해왔던 위원단의 단장 메논 씨가 돌연히 태도를 바꾸어 소총회에서 찬성표를 던진 사실에 대해서 한 마디 해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K. P. S. 메논 씨는 그 후에 쓴 자서전 가운데, 조선임시위원단 단장을 맡았을 그때가 외교관으로서 재임했던 전 기간을 통해 “머리 속에 있는 이성(理性)이 자기의 심장에게 완패 당한 유일한 사례였다.”고 술회하고 있는데, 메논 씨의 심장을 꽉 잡은 여성은 바로 한국의 유명한 여류시인 마리안 모(毛允淑)이었습니다.(11)

정경모(鄭敬謨) 씨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메논과 모 사이의 「우정관계」는 자연발생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이승만이 생각한 술책에 모윤숙이 동의한 결과였던 것 같은데, 아무튼 메논 씨 자신의 고백으로부터 보더라도 단독선거를 반대했던 그가 돌연히 찬성 쪽으로 돌아버린 것은 모윤숙의 애원과 설득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조선민족으로서는 참으로 불행했던 이런 에피소드는 어떻게 사소한 우연에 의해 한 민족의 역사의 방향이 결정되는가를 아주 적절한 예로써 제공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6.

앞서 말한바와 같이, 2월 26일의 표결에 근거해서 국련소총회는 서울에 주재하고 있는 임시조선위원단에게 남쪽만의 단독선거의 실시를 진행시켰고, 또 이를 「감시」하도록 지령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그것으로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지령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는 의연히 단독선거에는 반대였고 남북 각각의 대표가 동의할 때까지는 최종적 결론은 보류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3월 11일, 단독선거의 가부를 두고 임시조선위원단으로서의 표결이 현지 서울에서 실행되었습니다. 이 표결에서 프랑스와 시리아는 기권을 했습니다. 결국 중국(대만), 엘살바도르, 필리핀, 거기에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인도의 6개국이 어떤 태도를 나타내는가에 따라 조선의 운명이 걸려 있게 된 것입니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2개국은 반대입니다. 대만, 필리핀, 엘살바도르 3개국은 미국이 제안한 것은 어떤 것이든 찬성하는 나라입니다. 문제는 인도가 어떻게 나오는가라는 것입니다. 만일 인도가 반대표를 던진다면 지령은 소총회로 반려되고, 적어도 「국련이 승인하고 감시했다」는 명분을 치켜든 단독선거는 불가능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미국은 단독선거를 강행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되었더라면 전쟁은 없었을는지도 모르고 「국련군」이 조선전쟁에 출동하는 일은 물론 없었을 것입니다. 남북통일의 문제가 오늘날과 같이 곤란한 상황으로 빠지고 마는 일도 없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인도를 대표하는 메논은 소총회의 지령에 따르는 데 찬성표를 던져서 단독선거는 4 대 2의 다수결로써 결정된 것입니다.(12) 메논의 이 투표가 그의 비극적인 여성관계로부터 생긴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메논 자신은 공무에 대한 이처럼 명백한 배임행위를 변호하면서 자서전 안에 “그것은 아무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역사가로서 본 바로는 그의 행위의 중대함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더구나 그 결과는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편 모윤숙 쪽은 아마 메논과의 관계로부터라고 하겠는데 국련에서 한국대표를 맡고, 국회의원, 예술원 회원, 펜크럽 한국본부 회장을 역임하는 등 화려한 생애를 보냈으며, 그녀가 자서전 풍으로 쓴 「잊지 못할 메논 위원장과 나의 우정」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우리들의 우정은 미묘한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만일 나와 메논 위원장 사이의 우정이 없었더라면 남쪽만의 단독선거는 없었을는지도 모르며,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오늘의 한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13)

창건 당시에 대한민국의 이러한 반영웅적(反英雄的)인 이야기와 그 불행한 유산은 오늘까지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7.

그런데, 단독선거를 감시한다는 감시위원단의 결정은 이상 본 바와 같이 아슬아슬한 차를 가지고 다수결로써 결정되었지만 그것은 또한 엄중한 조건이 붙은 것이었습니다. 그 조건이란, 「언론과 집회에 관한 민주주의적인 권리가 완전히 보장된 분위기 속에서만」 위원단은 감시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었습니다.(14)

그때에 이르러서도 오스트레일리아의 예상은 잭슨 씨의 말을 빌리면 “단독선거는 극우파를 제외한 모든 정당으로부터 보이콧 당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15) 임시조선위원단의 최종 표결이 있었던 당일, 이승만을 제외한 남쪽의 가장 저명한 지도자들은 북조선의 김일성에 대해서 민족문제를 토의할 남북회담의 개최를 제안했습니다.(16) 위원단 안의 반대파는 사태가 단독선거로 기울은 이 최종단계에 이르러서도 남북회담 개최를 환영하고 조선의 분단을 영구화하지 않을 해결책을 계속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는 단독선거의 강행은, “현명함이 결여됨과 아울러 동시에 제2차 국련총회의 결의를 짓밟는 것이고, 첫째로 남쪽에서 공평한 선거가 실시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라는 의견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캐나다 대표 바터슨)(17) 이에 대해 미 군정청의 하지 중장은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이와 같은 의견은 “소련에 대한 유화(宥和-appeasement)를 나타내는 것이며”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가열한 냉전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무지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면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18) 특히 캐나다 대표에 대해서는 “소련과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일에서 나는 그 사람처럼 열심인 사나이는 과거 수개월 사이에 만난 일이 없다.”라고 하는 비난마저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한편 오스트레일리아 대표단의 잭슨 씨는 3월 13일자로 다음과 같은 보고문을 제출하고 단독선거에 대해 반대를 표명했습니다.

"본 위원단 분과위의 인터뷰에 응해준 24명의 조선의 정치지도자 중 북측이 협력을 거부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단독선거라도 어쩔 수 없다고 진술한 사람은 9명. 나머지의 11명은 반대이고 4명은 의견을 보류했다. 이 24명의 대다수는 우파에 속한 사람들인데 그것은 좌파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우리들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들 사람들은 서면으로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는 취지의 의견을 표명해왔다. 요컨대 우파 정당 가운데 가장 무게를 가진 김구의 한국독립당, 중도좌파의 모든 온건파, 게다가 좌편향의 극좌 그룹은 예외없이 남쪽만의 단독선거에는 반대하고 있다."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의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압력은 바로 강경 일변도였습니다. 캠벨러의 오스트레일리아정부는 국련의 지원없이도 미국은 이래저래 단독선거를 강행할 것으로 생각하고 단독선거에 그 이상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선거가 독립국가의 국회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국련이 남북을 포함한 전 조선의 문제를 해결하는 모색과정에서 협의대상으로 될 수 있는 자문기관을 만들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확하게 해두었습니다.(21) 메논 자신이 선거는 단순히 자문기관을 도입하기 위한 것이고 결코 단독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고, 이것이 2월 13일의 임시조선위원회에서 전원일치로 된 사실임을 명백히 해두고 있습니다.



8.

그러나 이러한 제한조항 따위는 미국이 개의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해서 반대 측에 선 나라는 미국의 하는 짓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가를 통감했다고 하더라도 맞바로 미국을 비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군정청은 위원단의 염려를 달래기 위하여 「그저 그런 정도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보이기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3,140명의 정치범을 석방하고 그들에게 선거권을 준 것은 그 중 하나였습니다.(23)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위원단은 위원단의 시찰반이 4월 5일부터 10일간에 걸쳐 실행한 6일간의 조사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습니다.

"시찰반은 극좌파 그룹과는 접촉이 이루지지는 못했으나 인터뷰에 응한 다른 저명인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선거를 반대한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들의 염려는 남쪽만의 단독선거가 남북의 분단을 고정시킬 것이고 그러한 선거에는 협력하지 않는다는 것이 의론의 초점이었다."

조선위원단이 부닥친 국련선거에 대한 이와 같은 원칙적 반대는 미 군정청에 의한 개혁이나 보장으로는 ____ 그것이 어떠한 모양으로건 ____ 반론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선거를 약 2주일 앞에 둔 4월 28일, 국련조선위원단은 남쪽의 정치적분위기는 「그저 그런 정도의 자유로웠고」 따라서 선거에 대한 감시의 역할을 맡는다.」는 결의를 5 대 3으로 가결했습니다. 이 결의가 이루어진 바로 그때 제주도에서는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4. 3인민봉기가 한창때였고 로버츠 중장이 이끄는 한ㆍ미군의 무참하기 이를 데 없는 살육이 전개되고 있었다는 것도 덧붙여 두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 당시의 조선의 분위기가 「그저 그런 정도의 자유로웠다.」(2 reasonable degree atmosphere)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튼 반대표를 던진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의 대표는 이 단계에 이르러서도 아직 체념하지 않고 치연작전을 벌여 여운형 선생의 생전의 동지였던 김규식을 방문하여 북측의 지도자와 회담하기위하여 평양을 찾을 수 있도록 작용을 했습니다.



9.

선거는 5월 10일, 좌파와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우파 민족주의 진영의 보이콧 속에서 강행되었습니다. 이 선거에 관해서는 적어도 3가지 점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첫째는, 국련에 의한 이른바 「감시」라는 것은 실제로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거 때의 분위기는 대체로 「자유로운 것」이라고 일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조선위원단 자체가 이 선거가 「국민정부」(national government)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첫째의 점, 즉 「감시」는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 ___ 미군의 점령지역, 즉 현재의 한국은 10만 평방킬로미터의 면적을 가지고 당시 2,000만의 인구를 안고 있었습니다. 조선위원단은 각국의 대표와 사무원을 포함해서 총원 30명을 넘은 일이 없었고, 이 인원으로 전국에 걸친 일반선거를 감시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1935년에 실행된 자르지방의 국민투표에는 1,000명, 같은 해의 니카라과의 선거에는 775명의 중립인 감시원이 동원된 사실을 상기한다면 1948년의 한국에서 실시한 선거의 「감시」가 어떤 것이었다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26) 게다가 당시의 국련 사무총장 리이가 말한 바와 같이 감시반이 이동하기 위한 교통수단은 전면적으로 미군에 의존하고 있었고 미 군정청이 보이고 싶지 않은 곳에 감시반이 나갈 수가 없음은 명백합니다.(27) 사실상, 국련임시조선위원단의 감시반은 미 군정청이 지정한 겨우 몇 군데를 잠시잠간 얼굴을 내민 것뿐이고, 그렇게 얼굴을 내민 투표소는 전체의 2%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감시」라고 말할 것이 못됩니다.

둘째의 점은, 「자유로운 분위기」 가운데 선거가 실시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___ 한국의 경찰 발표조차도 3월 하순부터 선거가 실시된 5월 10일까지 589명이 살해되고, 10,000명 이상이 검속되었습니다.(28) 조선위원단의 보고는 한국 측의 부당행위라고 보아야 할 수많은 사건을 열거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독자적인 조사는 실행하지 않았습니다.(29) 투표소는 경찰 또는 예비대에 의하여 포위되어 있고 선거를 관리하는 임무는 특히 그것을 위해 미군에 의해 조직된 준경찰조직인 향보단(鄕保團)이 가세하고 있었습니다.(30) 오스트레일리아정부는 이와 같은 선거로는 「만족한다는 뜻을 도저히 나타낼 도리가 없고 경찰의 압력을 나타내는 수많은 증거를 발견했다.」고 발표했습니다.(31)

셋째의 점은, 단독선거가 정권수립을 위한 것이었는가라는 점에 대해서 ___ 국련조선위원단의 구성원 중 어느 누구도 이 선거에 의해 국회가 구성되고 남쪽만의 단독정권이 생겨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이것은 조선반도의 1구역 내의 지방선거로 생각하고 있었고 이 선거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은 단지 자문기관이고, 그 이상의 것은 아니라고 하는 점에서 전원이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32)

선거를 합법적이었다는 사실을 승인하라는 미국의 압력이 가해지는 속에서 위원단의 토의는 7주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만, 그러나 결론에 이르지를 못했습니다.(33) 그러던 중 시리아의 대표가 팔레스티나문제로 위원단에서 물러나고(5월말), 오스트레일리아 대표가 병으로 입원하는 일이 있어서(6월 24일)(34), 6월 25일에 위원단은 이른바 ‘말썽꾼이 없을 때 일 친다’고 “이 선거는 동위원단이 출입가능한 조선의 부분에서 선거민의 적법한 자유의사의 표현이었다.”라는 결의를 가결했던 것입니다.(35)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그리고 인도의 정부는 각각 개별적으로 이 선거 결과로 생겨난 서울의 정부는 1947년, 제2차 국련총회 결의문(112-II)이 생각하는 전 조선의 「국민정부」(national government)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을 미국정부에 대해서 명백히 밝혔습니다.(36) 국련임시조선위원단은 그 후 뉴욕으로 철수하여 다시 20회에 걸친 토의를 거듭했습니다만 위원단이 감시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견해 차이를 끝까지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37)



10.

그러나 조선위원단은 자신들이 「감시」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승만과 미국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선거에 당선된 「의원」들은 서울에 「국회」를 설치하고, 다시 「국회」가 「헌법」을 제정한 다음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이것은 그해 7월부터 8월에 걸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즈음 이승만은 얼굴 두껍게도 자기는 국련조선위원단의 결정에 근거해서 행동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물론 사실이 아니고 위원단의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이 이가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행세하는 일에 동의해준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8월 12일, 5.10선거로 성립된 기구는 이것을 일국의 국회로 인정하고 그로부터 생겨난 정부는 제2차 국련총회 결의문이 요구한 전 조선의 「국민정부」로 승인할 것을 선언했습니다.(38)

그러나 일이 여기까지 이르러서도 캠벨러의 오스트레일리아정부는 이러한 미국의 주장에 동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8월 15일(1948년)에 거행된 「대한민국」의 건국선언의 식전에 국련조선위원단의 자국대표(A. B. 제이미슨)의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39)

미국은 사방팔방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반대를 넘어가려고 국련에서 맹렬한 로비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파리에서 제3차 국련총회에서 그 후의 조선의 운명으로서는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결의안이 얄궂게도 오스트레일리아 대표(J. 프림솔)에 의해 제안되었습니다. 이 결의문은 그 자신과 미국, 대만의 대표 3자에 의하여 기초된 것입니다.(40)

이 결의안은 그 후 12월 12일에 채택되었는데(195-III), 그러나 이것은 선거결과로 남북을 통한 국민정부가 수립되었다는 따위를 승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바는 「임시위원단이 감시할 수 있었던 조선반도의 부분에서 유효하게 관리하고 통괄할 수 있는 합법정권이 수립되었다」는 것, 그리고 「조선에서 이러한 종류의 정권으로서는 이것이 유일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41) 국련총회의 이 결의문을 근거로 해서 “「대한민국」이 국련에 의하여 부여된 정통성의 이유로 한반도 전역을 지배해야 할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되고 있는데, 아무리 번잡한 말로 씌어 있다 하더라도 이 결의문은 그러한 사실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때까지 보아온 바와 같이 오스트레일리아는 미국의 대조선정책에 반대해왔던 중심적인 나라였지만 이상과 같은 번잡한 표현으로 말한 국련총회에 대한 결의문의 제안자가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대표였다는 것은 짓궂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반대의 중심이었던 나라가 지지 쪽으로 돌아버린 것은 미국으로서는 정말 기분좋은 일임에 틀림없겠습니다. 1948년 당시, 동서 어느 진영에건 속하도록 두 초대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압력은 지극히 컸으며 동서를 불문하고 힘있는 것을 섬기는 사대주의는 공통이었고 유독 오스트레일리아만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국련총회의 마당에서 사회주의 여러 나라가 전개했던 여러 가지 의론도 압도적으로 찬성 받은 국련임시조선위원단이 실제로 제출한 보고서의 내용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는 것도 한 마디 덧붙여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토론에 상정되지도 않았고 무시되기만 했습니다. 북조선의 대표를 국련에 초청하여 그들의 의견을 청취해야 한다는 제안도 미국과 그 지지그룹에 의하여 전면적으로 거부되었습니다.

조선민족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이 제3차 국련총회의 결의문은 이상과 같이 격렬하게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 채택에서 투표는 이른바 사령관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병졸들에 의하여 결행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11.

1948년의 이 결의문은 그 2년 후인 1950년에는 미국이 국련의 사무총장 트리구브 리이의 적극적 지지를 얻어 다른 나라들을 움직여 국련의 「기치」를 쳐들고 조선전쟁에 참전하는 법적 근거로 되었습니다.(42) 조선민족에게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참화를 가져온 이 전쟁이 「침략자에 대한 국련의 경찰행동」이라고 선전되고 있는 것은 국련 자체의 권위와 역사를 보더라도 비극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1965년 6월에 채결된 한ㆍ일기본조약은 그 제3조에서 「대한민국이 국련총회 결의문 195-III에서 명백히 나타내고 있는 대로 조선에 있는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라는 것이 확인된다.」라고 씌어 있어서, 허구의 위에다 또 허구를 쌓아올리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일본이 북조선과 적대하는 한편 한ㆍ일유착의 관계를 심화시킴으로써 남북의 대립을 부채질하고 조선의 통일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도 「국련총회 결의 195-III」가 그 애당초의 원인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며, 국련이라는 조직이 조선민족에게 가져다준 불행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지금에 와서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48년이라는 해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국가의 자립, 국련에서 정의와 평등이라고 하는 이념이 서서히 포기되고 있었고 그 대신 미국에 대해 무조건적 지지해주는 노선이 채용되기 시작한 해였습니다.(43) 오스트레일리아는 초대국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의 전쟁의 발생과 분단의 고정화라고 하는 그 뒤에 되어가는 결과에 중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나라, 그리고 그밖에 많은 나라가 국제문제를 생각할 때 정상적인 법의 규범과 도의의 감각을 회복하고, 「보호자」로 행세하는 초대국의 생각대로 추종할 것이 아니라 개개의 나라 각각의 주장과 이익이 관철되도록 하지 않으면 냉전체제와 냉전사고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문제의 해결은 냉전적 사고와 냉전적 대결의 해소와 불가분리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2가지 문제는 동시적으로 해결될 수밖에는 없고, 이렇 해서 조선문제가 해결될 때 국련은 1945년 창립당시의 원래의 이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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